가훈이 돌아왔다
‘돈은 안 쓰는 것’‘ 아내 말 잘 듣자’, 젊은 층은 유행어·유머 코드 선호
[중앙선데이]
무료로 가훈을 써주는 재능기부 활동을 20여 년간 해온 서예가 전병문씨는 새해 가문으로
‘가화만사성’(왼쪽)과 ‘자비무적(慈悲無敵ㆍ자비로우면 적이 없다)’을 추천했다.
‘집안의 가장이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 백과사전에 나오는 가훈(家訓)의 정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가훈을 액자에 표구해 걸어두는 집이 많았다.
유서 깊은 가문에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전통적인 가훈도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가훈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주된 가족의 형태가 십여 명이 함께 모여 살던 대가족에서 많아야 4~5명인 핵가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구태의연한 가부장제의 유산으로 취급되면서 가훈은 우리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훈 써오기 숙제라도 받아 오면 없던 가훈을 급조하는 일이 빈번했다.
가훈이 돌아왔다
아날로그 감성 찾는 이 늘어
한 해 5만 명 무료 가훈 의뢰
구체적이고 짧은 문구가 좋아
계속 보게 돼 머릿속에 입력
캘리그래피 작가 조철희씨가 고객 의뢰를 받고 쓴 명언ㆍ유행어형 가훈.
하지만 근래 들어 사라졌던 가훈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다.
여기에 수년 전부터 인기를 끌어온 캘리그래피(손글씨) 열풍까지 겹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가훈에 다시 관심을 갖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예술문화원이 주관하는 무료 가훈 써주기 행사에 올해만 5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예술문화원 관계자는 “체감상 가훈을 원하는 사람들이 지난해보다 많이 늘었다.
행사에 나가 보면 통상 대기줄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선 20~30분씩 줄 서서 받아 가는 게 보통이다.
서예가들이 쉴 시간도 없이 계속 서서 쓰는데도 그 정도”라고 설명했다.
왜 사람들이 가훈을 다시 찾기 시작할까.
사회학자들은 가훈의 의미가 핵가족 시대에 맞게 새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해석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훈은 개인주의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중시하는
지금의 문화와는 맞지 않아 사라졌었다.
하지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현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다시 관심을 끄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이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교훈이 아닌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들고 지키고자 하는
중요한 가치로 의미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현장에선 통통 튀는 가훈을 의뢰하는 이들이 많다.
20여 년간 가훈 써주기 행사에 재능기부를 해온 서예가 전병문(60)씨는
시민들이 요구하는 가훈이 과거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고 전한다.
그는 “예전엔 명심보감에 나오는 한자성어를 선호했었다.
하지만 최근엔 한글로 된 유행어나 생활밀착형 문구를 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번은 ‘개X 마이웨이’란 글귀를 가훈으로 적어 가는 사람도 봤다.
황당해서 뭔 뜻이냐고 물었더니 ‘누가 뭐라 해도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얘기해서 써 줬다”고 말했다.
서예가 전병문씨가 작업실에서 의뢰받은 가훈을 쓰고 있다.
유행어도 가훈으로 많이 활용된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쓰이는 문구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방식이다.
조철희 홍익캘리그라피 서예교육원 원장은 “최근에 가장 많이 의뢰를 받은 가훈은 ‘돈은 안 쓰는 것이다’다.
개그맨 김생민씨가 영수증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유행시킨 말인데
공감한 사람들이 많아서 덩달아 가훈으로도 인기를 끄는 것 같다.
젊은 부부들은 ‘여자의 말은 다 옳다’ ‘아내 말을 잘 듣자’ 같은 유머가 섞인 글귀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연령대별로 선호하는 가훈도 차이가 난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혼부부들은 ‘최선을 다하자’ ‘정직하게 살자’ 등 다짐류의 가훈을 많이 찾는다.
40~50대 중년층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등 한자성어 의뢰가 많다.
60대 이상 노년층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하게 살아도 편안한 마음)’ 등 가정과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는 문구를 선호한다.
전병문씨는 “가훈을 써줄 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상생낙생(相生樂生·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즐거운 날이 찾아온다)
’ ‘유지경성(有志竟成·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등
추천 가훈 20여 개를 보여주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가훈은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까. 전문가들은 집에서 활용하는 문구인 만큼
가족 구성원들이 충분히 소통해 모두 공감하는 글귀로 정하는 게 좋다고 추천한다.
한국가훈써주기운동본부 이상문(69)씨는 “현실적인 가훈이 좋다.
추상적인 내용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지향점, 가족의 지향점을 정한 문구가 좋다.
또 장황한 것보단 간단명료한 게 더 낫다.
최근에 쓴 가훈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건강이 제일’ ‘보증을 서지 말자’
‘각방을 쓰지 말자’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전통 있는 가문들의 가훈도 참조해 볼 만하다.
김해 김씨는 ‘근신(勤愼·항상 부지런하고 매사에 신중하라)’,
밀양 박씨는 ‘불인불행(不仁不行·어진 일이 아니면 행하지를 말자)’,
전주 이씨는 ‘관홍장중(寬弘將重·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위엄을 갖춘 사람이 돼라)’,
안동 권씨는 ‘무신불립(無信不立·신용이 없으면 설 자리가 없다)’ 등의 가훈을 갖고 있다.
가훈을 써서 걸어 놓으면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인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장은 “가훈을 써서 걸어 놓으면
집안을 오가면서 계속 보게 돼 머릿속에 입력이 된다.
무의식적으로 가훈의 태도를 체화시키게 된다.
또 가족 구성원이 공유하는 하나의 틀이 생기면서 주는 편안함·안정감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