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암정

 
한 사람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쓴 글씨를 절필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서울 봉은사에 남긴 ‘판전’이 대표적인 절필작이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도 조선조 명필 미수 허목이 남긴 ‘청암수석’이란 절필작이 전한다.
이 마을에는 거북이처럼 생긴 넓은 바위 위에 지어진 청암정이란 정자가 있다.

최근 영화 ‘음란서생’, 드라마 ‘선덕여왕’, ‘바람의 화원’, ‘동이’에 이어

현재 KBS에서 방영중인 ‘정도전’ 등이 여기서 촬영되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청암정은 한국의 대표정원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정자 가운데 걸린

미수 허목의 전서로 된 편액글씨는 이곳의 절경을 대변하는 격조있는 작품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북바위 위에 지어진 청암정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강직한 성품과 직언을 한 충절지사로 이름 높은

충재 권벌(1478년~1548년)이 터를 잡은 곳이 봉화 유곡리 닭실마을이다.

 


일찍이 조선의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더불어 삼남지역의 4대 길지라고 말했던 곳이다.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이 마을은 마을의 서쪽 산에서 내려다보면 금

빛 닭이 알을 품은 듯이 보여 금계포란형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6명, 사마시(진사) 입격자 100여명,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 16명을 배출한 충절과 문필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닭실마을에 거북의 형상을 한 너럭바위가 있다. 
이 거북바위를 훼손하지 않고 그 위에 지은 정자가 청암정이다.


이 정자를 지은 충재는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42세 때 파직되어 물러난다.


다음해인 43세(1520년) 때 외조부가 살던 닭실마을에 정착했다.
49세(1526년) 때 집의 서쪽에 서재를 짓고 충재라고 써서 붙였다.


그리고 서재 옆에 있는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구암정으로 불렀다.
뒷날 충재의 큰아들 권동보(1517년~1591년)가 자신의 호를 따서 정자이름을 청암정으로 바꾸었다. 


충재는 이곳에서 15년 동안 산수에 묻혀 경학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진력했다.
56세 때 조정에 복귀하여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 병조판서로 중앙정가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70세 때 을사사화의 여파로 삭주로 유배되었고, 71세(1548년) 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충재가 낙향하여 청암정을 지은 거북바위에 대해 전하는 고사가 있다.
정자를 건축할 때 온돌방을 짓고 불을 넣으니 바위가 윙윙거리며 우는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어느 고승에게 물었다고 한다. 
“스님 왜 바위가 웅웅거리며 울까요” 스님이 곰곰이 생각한 뒤

“이 정자 아래의 바위는 거북이기 때문에 거북이 등에 불을 피우니 뜨겁지 않겠소.

둘레에 물을 채워야 할 것 같소”라는 비답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아궁이를 폐쇄하고 바위 주변을 고리처럼 돌아가면서 흙을 파내고

물로 채워 연못을 만들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적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의 풍광이 주변의 산세와 잘 어울려 보인다.
연못을 가로질러 정자에 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작은 돌다리이지만 연못에 비치는 정자의 풍광과 어울려 운치를 더한다.
훗날 퇴계 선생도 이런 정자의 경치를 보고

“구름 걸린 산에 두르고 다시 물굽이 둥근 고리처럼 둘러 있고/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들어가게 하였네”라는 시로 상찬했다. 


게다가 연못에 드리워진 아름드리 고목은 세월의 무게를 대변하고 바위에서 자라는

갖가지 수목과 꽃들은 철마다 계절에 맞는 빛깔을 담아내니 한국의 대표정원으로 불러도 될듯하다. 

 

 


‘미수전(眉篆)’으로 유명한 미수 허목(1595~1682)의 글씨 편액이다.<br />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고 골기가 서린 맑은 필획으로 단정함을 깨면서 변화를 모색한 점이 돋보인다.<br /> 현재 청암정에 걸려있는 현판은 최근 모각된 것이고 원본은 충재선생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br />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허목의 절필작 ‘청암수석’ 

 

 

청암정에 들어서면, 가로 175㎝, 세로 45㎝ 크기의 ‘청암수석’이라는

미수 허목(1595년~1682년)의 전서 편액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호를 미수라고 한 것은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조에서 누구보다 전서로 작품을 많이 했고,

진시황 이전인 선진시대의 고전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전서는 미전으로 불린다.

미수는 다독가였기에 ‘중용’을 십사만번이나 읽어서 무릎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한다.
그가 즐겨 읽은 서책은 육경과 같은 고문이었다. 


한 마디로 미수의 학문은 고학이고, 문장은 고문이며, 서예는 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청암정에 걸린 미수의 ‘청암수석(보물 902호-4)’을 음미해보자.

이 현판에서 미전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청’ 자는 원래 초목의 생물이 우물가에서 물줄기 힘으로 힘차고 푸르게 자라는 모양에서 비롯된 글자인데

아래의 왼쪽 세로획을 짧게 해서 좌우 대칭형을 기본으로 하는 전서 형태에 변화를 보여준다. 


‘암’ 자와 ‘석’ 자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대 인전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즉, 입구(口)자 위에 가로획 두 개를 더한 것이다. 


이는 다른 글자에 비해서 가로획이 적기 때문에 네 글자의 어울림을 위해 고전에서 고른 것으로 보인다. 
수(水)자와 석(石)자의 세로획도 바로 내려긋지 않고 한번 구부려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이처럼 비록 네 글자이지만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고 골기가 서린 맑은 필 획으로

전서의 단정함을 깨면서 변화를 모색한 점이 돋보인다.


현재 청암정에 걸려 있는 현판은 최근 모각된 것이고,

원본은 충재선생박물관에 두루마리형태로 보관되어 있고 원본 편액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 편액글씨는 미수의 마지막 묵적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미수의 절필작이 청암정에 걸린 사연이 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는 기력이 쇠약해져 별세를 앞두고 있던 88세(1682년) 때

충재의 종가에서 청암정기문을 써주길 사람을 보내 간청했다.


“미수 선생님께서 청암정기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미수는 “기문보다 편액을 써 줄 테니 청암정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시오”.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풍광이 좋다고 알려진 청암정을 직접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고전체로 크게 ‘청암수석’을 휘호한다. 


대자 휘호를 마친 뒤 좌측에 작은 해서로 이 작품을 만든 배경을 적어 놓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수의 절필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 간에 유람은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 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를 기록한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

 

여기서 8년은 숙종 8년으로 미수가 88세(1862년) 되던 해이며, 초여름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힘을 모아 대자휘호를 마치고는 자리에 누워 며칠 뒤 세상을 하직했다.
이런 까닭으로 150년 전 미수의 마지막 글씨가 이곳에 걸리게 된 것이다.

  

◆미수가 극약으로 고친 송시열의 병 

  

미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한다.
남인 중에서 청남의 영수로 알려진 미수가 최고의 정적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병을 고쳐준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날 우암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모든 약이 듣지 않아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우암은 아들을 불러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나의 증세를 말하고 화제를 지어오너라” 하니

아들은 “미수는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고 있는데 절대로 안 됩니다”하고 거절했다. 

우암은 “어차피 병을 구할 방도가 없으니 미수의 화제로 내가 죽더라도

내 명이 다한 것이니 어서 가서 지어오너라” 하면서 다시 재촉했다.
아들이 하는 수 없이 미수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고 화제를 지어오니 화제 속에 극약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아들이 그 화제를 보고 “이대로 약을 지으면 반드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하면서 간절히 청하자

우암은 “속히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아들이 마지못해 그대로 시행했더니 금방 쾌차했다고 한다.


훗날 미수를 만나 왜 극약인 비상을 화제에 넣었느냐고 물어보니

“증상을 말할 때 아이 오줌을 마셨다고 하길래 요독 때문으로 알고 독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로 인해 정치적 적대관계를 초월한 인간존중과 생명을 귀하게 여긴 미수의 따뜻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봉화 닭실마을을 찾으면, 조선을 대표하는 미수의 절필작과

한국의 대표정원으로 손색없는 청암정을 함께 감상하는 안복을 누릴 수 있다.

 


 

 

 

 

봉화 서설당 고택

 

봉화 서설당 고택은 안동권씨 충재 권벌 선생의 4대손 서설당 권두익이 1708년 이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br /> 이곳은 봉화읍 유곡리 자연마을인 토일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는 토일천이 있다.<br /> 집은 앞면 6칸ㆍ옆면 2칸 규모로 앞면 4칸과 옆면 2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br />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봉화 서설당 고택은 안동권씨 충재 권벌 선생의 4대손 서설당 권두익이 1708년 이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봉화읍 유곡리 자연마을인 토일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는 토일천이 있다.
집은 앞면 6칸ㆍ옆면 2칸 규모로 앞면 4칸과 옆면 2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지난 6월29일 문화재청은 18세기 사대부 주택의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봉화 서설당 고택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현대에 들어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사라지면서 이에 대한 기록 보존이 시급한 가운데 봉화 서설당 고택은 역사ㆍ학술적 면모를 잘 갖추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있다” 는 것이 지정 예고의 이유였다.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554번지, 서설당을 찾았다. 
닭실 마을은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극심한 가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여름의 들녘은 잘 자란 벼들로 푸르게 출렁거렸다.
금봉저수지를 흘러나와 콩밭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옥수수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문외한의 눈에도 길지란 여느 마을과는 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마을 뒤로는 알맞은 높이의 산, 앞으로는 끊일 줄 모르는 넉넉한 시냇물, 그 사이에 풍년을 기다리며 펼쳐진 논밭, 논밭을 안고 동서로 길게 형성된 남향의 기와집들은 정겨움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국가에서 명승지로 지정한(사적 및 명승 제3호) 유곡 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이 입향조인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 생김새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의 지세라 닭실 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조선의 4대 길지로 꼽은 바 있다. 


◆서설당에 내린 눈 

서설당 가는 길은 포장공사 중이었고 안내 표지판 없어 더듬더듬 30여 분을 걸어서 목적지에 이르렀다. 
서설당 택호는 도승(道僧)이 일러준 자리에 집터를 닦고 이튿날 아침 닦은 집터를 둘러보니 다른 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그곳에만 눈이 하얗게 내려 있어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름의 유래가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세월의 침식으로 일그러지고, 세상의 무관심으로 방치된 서설당은 잡초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바깥주인 권우붕옹은(서설당을 지은 권두익 선생의 12대손) 춘양으로 나들이 중이었고, 안주인 혼자 좁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연락도,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낯선 손님을 난처하게 맞았다. 
뜰에 붐비는 잡초, 이곳저곳 흐트러진 가재도구들이 부끄러운 듯 사진 찍는 것을 거북해했다.

손님을 맞는 난처함과 거북함이 어찌 이 집주인들만의 책임이겠는가. 방치된 문화재가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서설당 입구에는 경북도 민속자료 104호, 서설당을 소개하는 게시판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누구라도 이 집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ㅁ’ 자형 본채 동쪽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본채와의 사이에는 토석 담장을 설치해 영역을 구분했다.<br /> 오른쪽은 서설당 내부 모습. 

 

 

 

‘ㅁ’ 자형 본채 동쪽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본채와의 사이에는 토석 담장을 설치해 영역을 구분했다.
오른쪽은 서설당 내부 모습.

 

 

서설당 사당. 이곳은 팔작지붕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희소가치가 크다.<br />

 

 

 

서설당 사당. 이곳은 팔작지붕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희소가치가 크다. 

“본 건물은 숙종 34년(1708)에 권두익(1651~1725)선생이 송암정 앞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집은 ‘ㅁ’ 자형의 정침(正寢)과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의 팔작지붕을 한 사랑채 부분은 5량가 굴도리집(재단면이 둥근 도리를 사용한 집)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인데,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을 모두 우물마루로 꾸몄다. 
사당은 정침의 우측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면에 반칸의 퇴를 두어 개방한 3칸의 집이다. 
서설당은 18세기의 시대적 특성과 예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안채 대청의 특색 있는 구성 및 세간(집안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물건)과 민간신앙의 자취를 잘 보존하고 있다.
 
이 집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면 서설당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성주고사, 칠성고사, 용단지 등 우리 조상들의 전통생활 양식이었던 집 지킴이 문화의 지혜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조상의 혼백과 자연의 기운에 기대던 삶의 자세가 과학이 아닌 샤먼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한 때 그것은 집안의 안녕과 마을 공동체의 번성을 기원하는 미풍양속이었다.
단절과 갈등, 고립의 나날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사람과 땅과 하늘이 하나로 넘나들던 그때 그날의 풍속들은 한낱 옛이야기거리가 아닌 간절한 그리움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서설당의 내력이 궁금했지만 이 집의 안주인 이원귀 할머니(78)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고 춘양으로 나들이 간 바깥주인은 “언제 갈지 몰라, 다음에 다시 와여”라며 전화를 끊었다. 

충재박물관을 찾았다. 
충재 선생은 서설당을 지은 권두익의 4대조이다. 

충재 권벌 선생은 중종 27년(150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ㆍ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가 복직되었으나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삭주로 귀양,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선조 때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1507년 예문관검열로 있을 때의 기록인 ‘한원일기’ 2책, 1509년 1월부터 1510년 3월까지 승정원주서로 있을 때의 일기인 ‘당후일기’ 1책, 1518년 5~11월 정원승지로 있을 때의 기록인 ‘승선시일기’2책, ‘신창함추단일기’ 1책 등 모두 6책으로 구성된 충재일기를 남겼다.
당시 관료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큰 충재일기는 1963년 1월21일 보물 제261호로 지정됐다. 

유리관 속에 보존된 권벌 선생의 활달한 필체와 유려한 문장은 역사에 남긴 선비의 발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가 무너질 때, 선비가 걸었던 길은 세 가지였다. 
외침에 맞서 싸워 오랑캐를 쓸어낸다는 ‘거의소청(擧義掃淸)’, 적절한 곳을 찾아 유교적 규범을 보존한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치명수지(致命遂志)’가 그것이다.

선생은 후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비의 참된 길을 가르쳤을 것이다.
목숨을 바쳐 외세를 척결하고, 죽음을 통해 국권 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의병활동에 남다르게 앞장섰던 닭실 마을 후손들의 민족적 기개, 그 면면한 흐름은 선생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선비정신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국란을 이겨 낸 선비정신 

박물관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에게 “마을이 퍽 부유해 보이네요. 후손들이 모두 잘 되었나 보죠?” 라고 물었다. 
해설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며 왜인들을 성토했다.
항일 의병활동이 극심했던 닭실 마을의 지맥을 일제가 끊었다는 것이었다.

닭과 상극인 뱀과 지네 형상으로 도로를 닦고 영동선 철도를 부설, 닭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땅을 훼손한 탓으로 양동, 하회, 앞내 등 4대 길지 중 제일 빈한한 마을이 되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기록에 의하면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발생한 의병활동 당시 충재 선생의 후손인 권세연은 경상도 지역의 초대 의병장이었고, 1919년 유람단 의거 때에는 닭실 마을은 가열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박물관 곁에는 충재 선생의 유적지인 청암정(사적 및 명승 제60호)이 있었다.
거북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아름다운 정자였다. 
거북바위 둘레를 감싼 호수와 동, 남, 북으로 길을 낸 3개의 문과 오래된 버드나무숲이 청암정의 풍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멀리서 오셨으니 들어가 보시라며 초로의 후손 한 분이 ‘출입금지’ 팻말을 치워 주었다.

“충재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酉谷先公卜宅寬) ”로 시작해 “풍상의 세월 겪고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자랑스럽네(激勵風霜老勢盤)”로 끝나는 퇴계 이황의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가 현판으로 남아 청암정 주인의 꼿꼿한 선비로서의 발자취를 기리고 있었다.
귀양지 삭주에서의 나그네 설움을 노래한 권벌 선생의 ‘삭주영회(朔州詠懷)’는 이렇다.

천리관문 강가에서 길 잃은 나그네가(千里關河 失路人)/ 새해에도 변방의 모래바람 가슴 쓰리네(新年砂塞 更傷春)/ 눈 덮인 영마루 마주하고 고향을 생각하니(相看雪嶺 相思意)/ 아우 보고 싶고 형님 그리워 눈물 넘치네(憶弟懷兄 淚滿巾) 

 


청암정 난간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노라니, 옥정봉 산자락 뱀처럼 굽은 길을 자동차가 드나들고, 영동선 열차가 느린 걸음으로 닭실 마을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쩌면 춘양으로 나들이 간 서설당 바깥주인 권우붕옹 또한 저 길을 따라 돌아올 것이었다.
비켜설 수 없는 역사 속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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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님의침묵 서예대전 수상작 전시회’가 2018만해축전을 맞아

오는 11일부터 15일까지 인제 여초서예관에서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대상작인 박상준씨의 한문예서 ‘가을새벽’ 등

서예대전 수상작 252점이 선보여 관람객들을 수준 높은 서예의 세계로 안내한다.

또 초대작가 15명의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한편 ‘제16회 님의침묵 서예대전’수상자 시상식은 12일 오전 11시 여초서예관에서 열리며

대상,최우수상,우수상,장려상,삼체상 수상자에 대한 상장과 상금을 전달한다.이번

전시회에 앞서 지상전을 통해 대상작과 최우수·우수·장려상 등 14점을 미리 감상해 본다.


 

 ▲ 대상┃박상준  한문예서·가을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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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자경문 (初發心自警文)

 

처음으로 불교에 입문한 불자나 또는 출가자 스님들을 위해서

수행하정진에 관한 것을 말씀으로 경계한 것이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은 고려 보조국사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신라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그리고 고려말 야운선사의 자경문(自警文)을 말한다.

 

이것은 발심한 불자 특히 출가수행자는 꼭 잃어 습득해야만

올바른 수행자가 될 수 있다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불자들도 내용이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번 정독해서

불자로써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가지기 바란다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저자 보조국사 지눌스님

 

夫初心之人 須遠離惡友 親近賢善

受五戒十戒等 善知持犯 開遮

但依金口聖言 莫順庸流妄說

旣己出家 參陪淸衆 常念柔和善順

不得我慢貢高

 

무릇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자 처음으로 마음먹은 이(초발심자)

모름지기 나쁜 벗(계율을 지키지 않고 세속적 욕망을 즐기는 이)을 멀리하여야 한다.

반면 계행이 청정하고 지혜가 밝은이를 가까이 하여야 한다.

 

오계십계(또는 일체의 비구니계를)등을 받고 어떻게 하여야 계율을 생명처럼 지켜 잘 따르고,

어떤 경우에 계율을 어기고 범하게 되는 지도 잘 알아야 한다.

 

오로지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에만 의지할 것이며 용렬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의 부질없는 말을 따라서는 안 된다.

 

이미 이 몸 출가하여 세속의 욕망 버리고 청정한 수행의 무리에 참여하였으니

항상 부드럽고, 온화하고, 착하고, 공손하기에 힘쓸지언정

교만한 생각으로 잘난 척, 자기를 높이는 짓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大者爲兄 小者爲弟 儻有爭者

兩說和合 但以慈心相向 不得惡語傷人

若也欺凌同伴 論說是非 如此出家 全無利益

 

나이 많은 이 형이 되고 적은 이 아우가 되며 혹시라도 다투는 이가 있거든

양쪽 주장을 잘 화합시키되, 오로지 자비심으로 서로를 대하도록 할 것이지

모진 말로써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아니된다.

 

만약에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을 속이거나 업신여겨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시비를 따지려 한다면 ,

그같은 출가는 하나마나, 마음공부에 아무런 이득이 없게 된다.

 

財色之禍 甚於毒蛇 省己知非 常須遠籬

無緣事則不得入他房院 當屛處 不得强知他事

 

재물과 여색의 화는 독사의 독보다 더 심하니,

항상 자신의 마음자리를 관하고 그릇됨을 밝혀 모름지기 이를 멀리 여의도록 할 일이다.

참여해야 할 일이 없으면 이 방, 저 방, 이 집 저 집으로 드나들지 말아야 하며,


非六日 不得洗浣內衣 臨貫漱 不得高聲涕唾

行益次 不得塘乭越序 經行次 不得開襟掉臂

 

엿새가 아니면 속 옷을 빨아서는 안되며,(6?16?26일에는 빨래하느라.

,벼룩 따위를 죽이게 되어도 살생이 되지 않는다는 율법에 근거함)

 

세수하고 양치질 할 때는 소리를 내거나 큰 소리로 코풀고 침뱉지 말 것이며,

모든 대중행사(법요식?공양등)에서는 당돌하게 차례를 어겨서는 안되고

거닐 때는 옷깃을 풀어 헤치거나 활개쳐서는 아니 된다.

 

言談次 不得高聲戱笑

非要事 不得出於門外

有病人 須慈心守護

見賓客 須欣然迎接

逢尊長 須肅恭廻避

 

말할때는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서는 안 되며,

요긴한 일이 아니거든 산문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병든 이가 있거든 모름지기 자비심으로 돌보아 주고

손님을 보거든 모름지기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여

웃어른을 만나거든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비켜서야 한다.

 

辦道具 須儉約知足

齋食時 飮綴不得作聲

執放 要須安詳 不得擧顔顧視

不得欣厭精醜

須默無言說 須防護雜念

 

생활도구를 가려 쓰되 모름지기 검약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하며,

공양할 때에는 후루룩 쩝쩝 마시는 소리, 씹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고,

수저나 그릇을 다룸에 있어서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다루며,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말고 ,

 

맛있는 음식은 반기고 거친 음식은 싫어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공양 중에는 말을 하지 말며 잡념이 일지 않도록 심신을 단정히 하여야 하며,

 

須知受食 但療形枯 爲成道業

須念般若心經 觀三輪淸淨 不違道用

赴焚修 須早暮勤行 自責懈怠

知衆行次 不得雜亂 讚唄祝願

須誦文觀義 不得但隨音聲 不得韻曲不調

 

음식을 받는 것은 다만 이 몸뚱이 말라 시드는 것을 다스려

도업을 성취하기 위한 것인 줄 잘 알아야 하며,

 

모름지기 반야심경을 호념하되(모름지기 물질과 마음이 둘 아닌 줄을 길이 관하되)

무주상 보시의 청정함을 생각하여 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할 것이다.

 

향 사르고 예불 올릴 때는 모름지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게 스스로 늘 채찍질하고 대중의식을 행할 때는 어수선하지 않게 하며

 

범패하고 축원 함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글을 외어

참 뜻을 관할지언정 단지 소리를 따라 외지 말고

소리와 곡조가 고르지 못하게 해서도 아니 된다.

 

瞻敬尊顔 不得攀緣異境

須知自身罪障 猶如山海

須知理懺事懺 可以消除

深觀能禮所禮 皆從眞性緣起

深信感應不虛 影響相從

 

일념으로)부처님의 거룩한 얼굴을 우러러 보되

다른 경계에 끄달려(형상으로 보아)얽매여선 안 되며,

모름지기 자신의 업장이 마치 저 산 같고 바다 같은 줄 알되,

 

모름지기 이참(마음으로 참회) 사참(몸으로 행한 일을 참회)으로

이를 녹일 수 있음을 알라(모름지기 죄업엔 본래 자성이 없어

오직 삼독심(탐진치) 번뇌 망상의 생각 따라 일어 난 것임을 깊이 관하여

그것이 나온 자리에 몰락 놓고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사무치게 느끼면 이로써 가히 죄업이 소멸될 수 있음을 알라).

 

예배 하는 자신과 예배 받는 부처가 본래 둘이 아니어서

다 같이 진여성품으로부터 인연 따라 나툰 줄을 깊이 (믿고) 관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중생과 부처가 둘 아니게 감응함이 (결코) 헛된 게 아니라

물체에 그림자 따르고 소리에 메아리가 서로 좇아오는 것 같음을 깊이 믿을 지어다.

 

居衆寮 須相讓不爭 須互相扶護

愼諍論勝負 愼聚頭閒話

愼誤着他鞋 愼坐臥越次

 

대중 밤에 거처할 적에는 모름지기 서로 양보하여 다투지 말고,

서로 간에 북돋우고 도와서 옳으니 그르니 논쟁하여 승부 가리기를 삼가하라.

 

또한 머리 맞대고 모여 않아 한가히 쑥덕거리지 말며,

다른 이의 신발을 잘못 신을 정도로 들뜨거나 예의를 몰라서는 안 되고

자리 잡아 않거나 누울 때도 차례를 어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對客言談 不得揚於家醜

但讚院門佛事 不得詣庫房

見聞雜事 自生疑惑

非要事 不得遊州獵縣

與俗交通 令他憎嫉 失自道情

 

손님과 대화를 나눌 때는 절 집안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지 말고

다만 사원의 불사를 찬탄할 지언정 고방(창고 사무실)을 드나들며

이 일 저 일 듣고 보아 일없이 의혹을 품지 말라.

 

요긴한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 고을 저 고을로 노닐며 떠돌지 말고

속인들과 서로 사귀어 오가며 다른 이로 하여금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내게하여 도 닦는 뜻을 스스로 저버리지 말지어다.

 

有要事出行 告住持人 及菅衆者

令知去處 若入俗家 切須堅持正念

愼勿見色聞聲 流蕩邪心 又況披襟戱笑

亂說雜事 非時酒食 妄作無碍之行 深乖佛戒

又處賢善人 嫌疑之間 豈爲有智慧人也

 

혹시라도 요긴한 일이 있어 꼭 나다녀야 하거든 주지나 대중을 통솔관장하는 이에게 고하여

가 머무는 곳을 알게 하라. (그때) 만약 속인의 집에 들게 되거든 부디 바른 생각을 굳게 지니되

보고 듣는 경계에 끄달려 방탕하고 삿된 마음에 휩쓸리지 말아야 할 것인 바,

 

하물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웃고 떠들면서, 쓸데없이 잡된 일이나 지껄이고,

 때도 아닌 때에 밥먹고 술 마시며 망녕 되이 무애행을 하노라 하여

부처님이 정해주신 계율을 크게 어길 것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어질고 착한 이들과 싫어하고 의심하는 사이가 된다면

어찌 지혜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住社堂 愼沙彌同行 愼人事往還

愼見他好惡 愼貪求文字

愼睡眠過度 愼散亂攀緣

 

공부하는 처소에 머물 때는 어린 사미와 함께 행동하기를 삼가하고

세속의 인사로 오가는 것을 주의하며,

 

다른 이의 잘 잘못을 밝히려 하지말고 지나치게 문자를 구하려 하지 말며,

잠 자는 것도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하고 인연 경계에 끄달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若遇宗師陞座說法 切不得於法

作縣崖想 生退屈心

或作慣聞想 生容易心

當須虛懷聞之 必有機發之時

不得隨學語者 但取口辦

 

만약 종사(선지식)가 법상에 올라 설법하는 때를 만나거든

그 법을 듣고 부디 벼랑에 매달린 것 같은 생각(나 같은 범부가 어찌 까마득이 높디높은 법을

이룰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을 지어 물러서려는 마음을 내서는 아니 되며,

또는 익히 들어본 법문이라는 생각에 그렇고 그렇노라는 식의 쉬운 마음을 지어서도 아니 된다.

 

법문을 들을 때는 모름지기 마음을 텅 비우고 들으면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는 텅 빈듯한 마음에서 그윽히 귀를 기울일 뿐이면

반드시 깨달음의 기연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문자와 말만 배우는 사람을 따라서

다만 입으로 판가름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所謂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

智學 成菩提 愚學 成生死 是也

 

이른바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하듯이 뜻을 취해 슬기롭게 배우면 깨달음을 이루고

문자나 말에 얽매어 어리석게 배우면 생사에 빠진다 함이 바로 이를 두고 이름 이니라.

 

又不得於主法人 生輕薄想

因之於道 有障 不能進修 切須愼之

論 云 如人 夜行 罪人 執炬當路

若以人惡故 不受光明 墮坑落慙去矣

 

또한 법사에 대해 업수히 여기는 생각을 내지 말라.

그런 생각으로 말미암아 도에 장애가 생기어 닦아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니

지극히 삼가하고 삼갈 할지어다.

 

논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밤길을 가는데 죄진 이가 횃불을 들어

앞길을 비춘다고 할 때에 만약 그 사람이 나쁘다는 이유로 불 비춰줌을 마다할 것 같으면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라 하였다.

 

聞法之次 如履薄氷

必須側耳目而聽玄音 肅情塵而賞幽致

下堂後 墨坐觀之 如有所疑

博問先覺 夕朝詢 不濫絲髮

如是 乃可能生正信 以道爲懷者歟

 

그러니 설법을 들을 때는 마치 살얼음을 밟고 가듯이 간절히 이목을 기울여

깊고 깊은 진리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마음 속의 번뇌티끌 밝히고

그윽한 뜻을 맛보도록 해야 한다.

 

그런 뒤 법사가 당에서 내려가면 묵묵히 앉아서 관하되 어떤 의심되는 게 있거든

선지식에 널리 물을 것이며 아침 저녁으로 간절히 안으로 찾아

의심나는 것을 털끝만큼도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아야 이에 가히 바른 믿음을 지녔다 할 수 있고

도로써 자기 마음자리를 삼는 자라 할 것이다

 

無始習熟 愛欲痴 纏綿意地

暫伏還起 如隔日瘧

一切時中 直須用加行方便智慧力

痛自遮護 豈可閒晩 遊談無根

虛喪天日 欲冀心宗而求出路哉

 

처음을 알 수 없는 옛부터 버릇처럼 익혀온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얽히고 설켜있어 잠시 숙어진듯 했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게

마치 하루 걸러 앓는 학질과 같나니

 

먹고 잠자고 일하는 일체시에 모름지기 수행을 돕는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써

스스로 뼈를 깍는 아픔으로 막고 지킬지언정 어찌 한가하고 게으른 마음으로

 근본 없는 잡담을 즐기면서 금쪽같은 세월을 허송하며

마음깨치기를 바라고 삼계로부터 벗어날 길을 구하고자 할 것인가.

 

但堅志節 責躬匪懈

知非遷善 改悔調柔

勤修而觀力 轉深 鍊磨而行門 益淨

長起難遭之想 道業 恒新

常懷慶幸之心 終不退轉

 

다만 출가한 발심한 뜻과 절개를 굳게 다지고 스스로 채찍질해 게으르지 않도록 하고

그른줄 알면 바르게 고치며 회개하고 뉘우쳐 마음을 조어하고 늘 부드럽게 할 것이다.

 

부지런히 닦아 나아가면 관하는 힘이 더욱 깊어지고 단련하고 갈아 나아가면

수행문이 더욱 청정해지리니

 

억겁 윤회 중에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천행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을

오래 오래 일으키면 도 닦는 일이 새록새록 새롭고 언제나 마음으로 발심한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경축할 일인가 생각하면 끝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如是久久 自然定慧園明 見自心性

用如幻悲智 還度衆生

作人天大福田 切須勉之

 

이와 같이 오래오래 닦아 나아가면 자연히 정과 혜가 원만하게 밝아져

스스로 마음 성품을 보게 될 것이며, 비록 법계가 공한 줄 아나

자비와 반야의 지혜를 굴려서 중생을 고해의 길에서 돌이켜 제도하고,

 

인천(人天) 가운데 큰 복밭을 일구리니

부디 간절히 바라노니 모름지기 힘쓰고 힘 쓸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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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에서 참선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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