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암정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서울 봉은사에 남긴 ‘판전’이 대표적인 절필작이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도 조선조 명필 미수 허목이 남긴 ‘청암수석’이란 절필작이 전한다.
이 마을에는 거북이처럼 생긴 넓은 바위 위에 지어진 청암정이란 정자가 있다.
최근 영화 ‘음란서생’, 드라마 ‘선덕여왕’, ‘바람의 화원’, ‘동이’에 이어
현재 KBS에서 방영중인 ‘정도전’ 등이 여기서 촬영되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청암정은 한국의 대표정원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정자 가운데 걸린
미수 허목의 전서로 된 편액글씨는 이곳의 절경을 대변하는 격조있는 작품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북바위 위에 지어진 청암정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강직한 성품과 직언을 한 충절지사로 이름 높은
충재 권벌(1478년~1548년)이 터를 잡은 곳이 봉화 유곡리 닭실마을이다.
일찍이 조선의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더불어 삼남지역의 4대 길지라고 말했던 곳이다.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이 마을은 마을의 서쪽 산에서 내려다보면 금
빛 닭이 알을 품은 듯이 보여 금계포란형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6명, 사마시(진사) 입격자 100여명,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 16명을 배출한 충절과 문필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닭실마을에 거북의 형상을 한 너럭바위가 있다.
이 거북바위를 훼손하지 않고 그 위에 지은 정자가 청암정이다.
이 정자를 지은 충재는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42세 때 파직되어 물러난다.
다음해인 43세(1520년) 때 외조부가 살던 닭실마을에 정착했다.
49세(1526년) 때 집의 서쪽에 서재를 짓고 충재라고 써서 붙였다.
그리고 서재 옆에 있는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구암정으로 불렀다.
뒷날 충재의 큰아들 권동보(1517년~1591년)가 자신의 호를 따서 정자이름을 청암정으로 바꾸었다.
충재는 이곳에서 15년 동안 산수에 묻혀 경학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진력했다.
56세 때 조정에 복귀하여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 병조판서로 중앙정가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70세 때 을사사화의 여파로 삭주로 유배되었고, 71세(1548년) 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충재가 낙향하여 청암정을 지은 거북바위에 대해 전하는 고사가 있다.
정자를 건축할 때 온돌방을 짓고 불을 넣으니 바위가 윙윙거리며 우는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어느 고승에게 물었다고 한다.
“스님 왜 바위가 웅웅거리며 울까요” 스님이 곰곰이 생각한 뒤
“이 정자 아래의 바위는 거북이기 때문에 거북이 등에 불을 피우니 뜨겁지 않겠소.
둘레에 물을 채워야 할 것 같소”라는 비답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아궁이를 폐쇄하고 바위 주변을 고리처럼 돌아가면서 흙을 파내고
물로 채워 연못을 만들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적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의 풍광이 주변의 산세와 잘 어울려 보인다.
연못을 가로질러 정자에 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작은 돌다리이지만 연못에 비치는 정자의 풍광과 어울려 운치를 더한다.
훗날 퇴계 선생도 이런 정자의 경치를 보고
“구름 걸린 산에 두르고 다시 물굽이 둥근 고리처럼 둘러 있고/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들어가게 하였네”라는 시로 상찬했다.
게다가 연못에 드리워진 아름드리 고목은 세월의 무게를 대변하고 바위에서 자라는
갖가지 수목과 꽃들은 철마다 계절에 맞는 빛깔을 담아내니 한국의 대표정원으로 불러도 될듯하다.
◆허목의 절필작 ‘청암수석’
청암정에 들어서면, 가로 175㎝, 세로 45㎝ 크기의 ‘청암수석’이라는
미수 허목(1595년~1682년)의 전서 편액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호를 미수라고 한 것은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조에서 누구보다 전서로 작품을 많이 했고,
진시황 이전인 선진시대의 고전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전서는 미전으로 불린다.
미수는 다독가였기에 ‘중용’을 십사만번이나 읽어서 무릎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한다.
그가 즐겨 읽은 서책은 육경과 같은 고문이었다.
한 마디로 미수의 학문은 고학이고, 문장은 고문이며, 서예는 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청암정에 걸린 미수의 ‘청암수석(보물 902호-4)’을 음미해보자.
이 현판에서 미전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청’ 자는 원래 초목의 생물이 우물가에서 물줄기 힘으로 힘차고 푸르게 자라는 모양에서 비롯된 글자인데
아래의 왼쪽 세로획을 짧게 해서 좌우 대칭형을 기본으로 하는 전서 형태에 변화를 보여준다.
‘암’ 자와 ‘석’ 자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대 인전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즉, 입구(口)자 위에 가로획 두 개를 더한 것이다.
이는 다른 글자에 비해서 가로획이 적기 때문에 네 글자의 어울림을 위해 고전에서 고른 것으로 보인다.
수(水)자와 석(石)자의 세로획도 바로 내려긋지 않고 한번 구부려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이처럼 비록 네 글자이지만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고 골기가 서린 맑은 필 획으로
전서의 단정함을 깨면서 변화를 모색한 점이 돋보인다.
현재 청암정에 걸려 있는 현판은 최근 모각된 것이고,
원본은 충재선생박물관에 두루마리형태로 보관되어 있고 원본 편액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 편액글씨는 미수의 마지막 묵적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미수의 절필작이 청암정에 걸린 사연이 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는 기력이 쇠약해져 별세를 앞두고 있던 88세(1682년) 때
충재의 종가에서 청암정기문을 써주길 사람을 보내 간청했다.
“미수 선생님께서 청암정기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미수는 “기문보다 편액을 써 줄 테니 청암정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시오”.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풍광이 좋다고 알려진 청암정을 직접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고전체로 크게 ‘청암수석’을 휘호한다.
대자 휘호를 마친 뒤 좌측에 작은 해서로 이 작품을 만든 배경을 적어 놓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수의 절필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 간에 유람은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 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를 기록한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
여기서 8년은 숙종 8년으로 미수가 88세(1862년) 되던 해이며, 초여름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힘을 모아 대자휘호를 마치고는 자리에 누워 며칠 뒤 세상을 하직했다.
이런 까닭으로 150년 전 미수의 마지막 글씨가 이곳에 걸리게 된 것이다.
◆미수가 극약으로 고친 송시열의 병
미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한다.
남인 중에서 청남의 영수로 알려진 미수가 최고의 정적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병을 고쳐준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날 우암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모든 약이 듣지 않아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우암은 아들을 불러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나의 증세를 말하고 화제를 지어오너라” 하니
아들은 “미수는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고 있는데 절대로 안 됩니다”하고 거절했다.
우암은 “어차피 병을 구할 방도가 없으니 미수의 화제로 내가 죽더라도
내 명이 다한 것이니 어서 가서 지어오너라” 하면서 다시 재촉했다.
아들이 하는 수 없이 미수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고 화제를 지어오니 화제 속에 극약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아들이 그 화제를 보고 “이대로 약을 지으면 반드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하면서 간절히 청하자
우암은 “속히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아들이 마지못해 그대로 시행했더니 금방 쾌차했다고 한다.
훗날 미수를 만나 왜 극약인 비상을 화제에 넣었느냐고 물어보니
“증상을 말할 때 아이 오줌을 마셨다고 하길래 요독 때문으로 알고 독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로 인해 정치적 적대관계를 초월한 인간존중과 생명을 귀하게 여긴 미수의 따뜻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봉화 닭실마을을 찾으면, 조선을 대표하는 미수의 절필작과
한국의 대표정원으로 손색없는 청암정을 함께 감상하는 안복을 누릴 수 있다.
봉화 서설당 고택
지난 6월29일 문화재청은 18세기 사대부 주택의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봉화 서설당 고택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현대에 들어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사라지면서 이에 대한 기록 보존이 시급한 가운데 봉화 서설당 고택은 역사ㆍ학술적 면모를 잘 갖추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있다” 는 것이 지정 예고의 이유였다.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554번지, 서설당을 찾았다.
닭실 마을은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극심한 가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여름의 들녘은 잘 자란 벼들로 푸르게 출렁거렸다.
금봉저수지를 흘러나와 콩밭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옥수수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문외한의 눈에도 길지란 여느 마을과는 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마을 뒤로는 알맞은 높이의 산, 앞으로는 끊일 줄 모르는 넉넉한 시냇물, 그 사이에 풍년을 기다리며 펼쳐진 논밭, 논밭을 안고 동서로 길게 형성된 남향의 기와집들은 정겨움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국가에서 명승지로 지정한(사적 및 명승 제3호) 유곡 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이 입향조인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 생김새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의 지세라 닭실 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조선의 4대 길지로 꼽은 바 있다.
서설당 택호는 도승(道僧)이 일러준 자리에 집터를 닦고 이튿날 아침 닦은 집터를 둘러보니 다른 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그곳에만 눈이 하얗게 내려 있어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름의 유래가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세월의 침식으로 일그러지고, 세상의 무관심으로 방치된 서설당은 잡초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바깥주인 권우붕옹은(서설당을 지은 권두익 선생의 12대손) 춘양으로 나들이 중이었고, 안주인 혼자 좁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연락도,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낯선 손님을 난처하게 맞았다.
뜰에 붐비는 잡초, 이곳저곳 흐트러진 가재도구들이 부끄러운 듯 사진 찍는 것을 거북해했다.
손님을 맞는 난처함과 거북함이 어찌 이 집주인들만의 책임이겠는가. 방치된 문화재가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서설당 입구에는 경북도 민속자료 104호, 서설당을 소개하는 게시판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누구라도 이 집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 건물은 숙종 34년(1708)에 권두익(1651~1725)선생이 송암정 앞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집은 ‘ㅁ’ 자형의 정침(正寢)과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의 팔작지붕을 한 사랑채 부분은 5량가 굴도리집(재단면이 둥근 도리를 사용한 집)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인데,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을 모두 우물마루로 꾸몄다.
사당은 정침의 우측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면에 반칸의 퇴를 두어 개방한 3칸의 집이다.
서설당은 18세기의 시대적 특성과 예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안채 대청의 특색 있는 구성 및 세간(집안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물건)과 민간신앙의 자취를 잘 보존하고 있다.
”
이 집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면 서설당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성주고사, 칠성고사, 용단지 등 우리 조상들의 전통생활 양식이었던 집 지킴이 문화의 지혜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조상의 혼백과 자연의 기운에 기대던 삶의 자세가 과학이 아닌 샤먼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한 때 그것은 집안의 안녕과 마을 공동체의 번성을 기원하는 미풍양속이었다.
단절과 갈등, 고립의 나날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사람과 땅과 하늘이 하나로 넘나들던 그때 그날의 풍속들은 한낱 옛이야기거리가 아닌 간절한 그리움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서설당의 내력이 궁금했지만 이 집의 안주인 이원귀 할머니(78)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고 춘양으로 나들이 간 바깥주인은 “언제 갈지 몰라, 다음에 다시 와여”라며 전화를 끊었다.
충재박물관을 찾았다.
충재 선생은 서설당을 지은 권두익의 4대조이다.
충재 권벌 선생은 중종 27년(150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ㆍ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가 복직되었으나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삭주로 귀양,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선조 때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1507년 예문관검열로 있을 때의 기록인 ‘한원일기’ 2책, 1509년 1월부터 1510년 3월까지 승정원주서로 있을 때의 일기인 ‘당후일기’ 1책, 1518년 5~11월 정원승지로 있을 때의 기록인 ‘승선시일기’2책, ‘신창함추단일기’ 1책 등 모두 6책으로 구성된 충재일기를 남겼다.
당시 관료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큰 충재일기는 1963년 1월21일 보물 제261호로 지정됐다.
유리관 속에 보존된 권벌 선생의 활달한 필체와 유려한 문장은 역사에 남긴 선비의 발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가 무너질 때, 선비가 걸었던 길은 세 가지였다.
외침에 맞서 싸워 오랑캐를 쓸어낸다는 ‘거의소청(擧義掃淸)’, 적절한 곳을 찾아 유교적 규범을 보존한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치명수지(致命遂志)’가 그것이다.
선생은 후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비의 참된 길을 가르쳤을 것이다.
목숨을 바쳐 외세를 척결하고, 죽음을 통해 국권 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의병활동에 남다르게 앞장섰던 닭실 마을 후손들의 민족적 기개, 그 면면한 흐름은 선생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선비정신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해설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며 왜인들을 성토했다.
항일 의병활동이 극심했던 닭실 마을의 지맥을 일제가 끊었다는 것이었다.
닭과 상극인 뱀과 지네 형상으로 도로를 닦고 영동선 철도를 부설, 닭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땅을 훼손한 탓으로 양동, 하회, 앞내 등 4대 길지 중 제일 빈한한 마을이 되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기록에 의하면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발생한 의병활동 당시 충재 선생의 후손인 권세연은 경상도 지역의 초대 의병장이었고, 1919년 유람단 의거 때에는 닭실 마을은 가열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박물관 곁에는 충재 선생의 유적지인 청암정(사적 및 명승 제60호)이 있었다.
거북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아름다운 정자였다.
거북바위 둘레를 감싼 호수와 동, 남, 북으로 길을 낸 3개의 문과 오래된 버드나무숲이 청암정의 풍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멀리서 오셨으니 들어가 보시라며 초로의 후손 한 분이 ‘출입금지’ 팻말을 치워 주었다.
“충재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酉谷先公卜宅寬) ”로 시작해 “풍상의 세월 겪고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자랑스럽네(激勵風霜老勢盤)”로 끝나는 퇴계 이황의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가 현판으로 남아 청암정 주인의 꼿꼿한 선비로서의 발자취를 기리고 있었다.
귀양지 삭주에서의 나그네 설움을 노래한 권벌 선생의 ‘삭주영회(朔州詠懷)’는 이렇다.
천리관문 강가에서 길 잃은 나그네가(千里關河 失路人)/ 새해에도 변방의 모래바람 가슴 쓰리네(新年砂塞 更傷春)/ 눈 덮인 영마루 마주하고 고향을 생각하니(相看雪嶺 相思意)/ 아우 보고 싶고 형님 그리워 눈물 넘치네(憶弟懷兄 淚滿巾)
청암정 난간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노라니, 옥정봉 산자락 뱀처럼 굽은 길을 자동차가 드나들고, 영동선 열차가 느린 걸음으로 닭실 마을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쩌면 춘양으로 나들이 간 서설당 바깥주인 권우붕옹 또한 저 길을 따라 돌아올 것이었다.
비켜설 수 없는 역사 속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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