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째 모은 문화재급 소장품 300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21일 손창근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불이선란도'.
손씨는 이 작품 외에도 총 304점의 소장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중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손세기·손창근컬렉션 국립중앙박물관에 21일 기증
국립박물관, 22일 '손세기·손창근기증 명품 서화전'
![겸재 정선(1676~1754)이 그린 '북원수회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21/95e272e5-6023-473b-8ad0-56c8e080362f.jpg)
겸재 정선(1676~1754)이 그린 '북원수회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 컬렉션에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지정문화재급 명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4)이 서울 장의동(장동)안 북원에서 마을 원로들의 장수를 기원한 축하 잔치 장면을 그린'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가 수록된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1716년 이후)도 그중 하나다.
김정희의 40대 작품으로 추사체가 형성돼 가는 과정과 청나라 문인과의 교유관계를 보여주는 '함추각행서 대련(涵秋閣行書對聯)(1831년 이전) 그리고 김정희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불이선란도'와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도 있다. '잔서완석루'는예서 글씨 편액인데, 조선시대 문인들이 지향한 학문과 예술 그리고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불이선란도'는 난초 그림으로 김정희가 지향한 학예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걸작 중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손씨, "죽을 때 가져갈 수 없으니…"
손씨는 21일 열린 기증 기념식에서 "한 점 한 점 정이 든 물건들이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며 "우리나라의 귀중한 국보급 유물들을 저 대신 길이길이 잘 보관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앞으로 기중품에 '손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달라.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컬렉션은 일찍이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회화' 특별전을 비롯해 다수의 전시와 서적에 소개됐으며 한국미술사 연구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손창근씨는 2005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전시와 연구에 써달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컬렉션을 기탁한 바 있다. 금년 11월 아흔 살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고 손세기 선생은 일찍이 고향 개성에서부터 인삼 무역과 재배에 종사한 촉망을 받은 실업가였고, 특히 우리 겨레의 토착 자본의 성장에 기여한 개성삼업조합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다. 그의 아들 손씨는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 후 공군을 예편하고, 1960년대 외국인 상사에서 다년간 근무한 이후 사업에 매진했다.
대를 이은 나눔 정신 손세기 선생은 생전인 1974년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제1624호)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이어 선친의 나눔 정신을 계승한 손씨는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2012년에는 50여년간 매년 자비로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경기도 용인의 1,000억대산림 약 200만평(서울 남산의 2배 면적)을 국가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미 산림녹화 공적으로 1966년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한 그는 전대미문의 기부로 2012년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현재 이 산림은 선친의 아호를 딴 ‘석포숲 공원’으로꾸며져 많은 시민의 휴식처가 됐다.
또한 88세가 되던 2017년에도 50억 상당의 건물과 함께 1억원을 KAIST에 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22일부터 전시
국립중앙박물관은 손세기·손창근부자의 숭고한 기증 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상설전시관 2층 서화관에 ‘손세기·손창근기념실’을 마련했다. 이 기념실은 손세기·손창근컬렉션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서화 소장품을 전시해 우리나라 서화 유산의 정수를 보여줄 예정이다. 이 기념실의 첫 번째 전시는 김정희 서화에 초점을 맞춘 '손세기·손창근기증 명품 서화전'을 22일부터 연다.
이 전시에는 김정희의 '불이선란도','잔서완석루' 등과 김정희 제자 허련이 그린 '김정희 초상', 그리고 19세기를 대표하는 남계우의 '호접묘도(胡蝶猫圖), 장승업의 회화가 전시된다. 두 번째 기증 명품 서화전은 내년 3월에 열리며, 여기에는 정선의 『북원수회첩』,'비로봉도'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서강대박물관은 10월 12일 '(故)석포 손세기 선생 기증 서화의 특징과 문화사적 의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故)석포 손세기 선생 기증 서화 특별전’을 12월 14일까지 연조선시대 서예 전반과 후기의 회화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자리다.
배기동 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손세기·손창근컬렉션 기증은 국립중앙박물관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상 손에 꼽을 경사스러운 일"이라며 "우리나라 기증 및 기부 문화가 퍼져 문화강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기증자의 아름다운 뜻이 널리 알려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정희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의 필법이 함께 녹아있는 추사의 잔서완석루.
제주도 유배후 강상 시절에 쓴 완당의 대표작이다.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로 풀이된다.
모든 글씨가 위쪽에 정연하게 맞춰져 있고 거기서부터 아래로 늘어져 있는데
유홍준 교수는 이를 두고 글씨를 빨래줄에 걸어놓은 듯 하다고 표현했다.
완당의 범접할 수 없는 필력과 서권기(書卷氣)를 느낄 수 있는 작품. 보자마자 홀딱 반했다.
김정희 글씨 중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예서(隸書)이지만
전서(篆書)의 字形을 응용한 데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運筆法을 섞어 썼기 때문에
횡액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중함과 활달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글자의 변화는 심하지 않지만 붓끝의 힘은 종이를 뚫을 듯하여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또한 거친 붓질은 희끗희끗한 飛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 깨진 빗돌의 글씨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김정희 글씨에서 느낄 수 있는 金石氣이다.
‘잔서완석(殘書頑石)’에서 ‘殘’은 깨지고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뜻하고 ‘書’는 책이 아니라 글자를 의미한다.
‘殘書’는 세월이 흘러 깨지고 뭉그러져 겨우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 몇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頑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말이고 ‘頑石’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을 말한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깨지고 부서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잔서완석(殘書頑石)’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 개의 글자’라는 의미가 된다.
‘殘’과 ‘頑’의 대비, ‘書’와 ‘石’의 대비는 더욱 강렬하게 가슴을 울리는 문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글씨에 있어서 김정희 서권기(書卷氣)의 일면을 보여준다.
글씨에 있어서 ‘서권기’란 수많은 독서를 통해 가슴속에 온축된 기운이 표현된 것을 의미하지만,
이렇게 종종 글씨를 쓰는 사람이 만들어낸 문구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당시 청나라의 문사들이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의 찬구(撰句; 자신이 새로운 문구를 만들어냄)와
집구(集句; 다른 사람의 글을 모아 새롭게 문구를 만들어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대련(對聯)으로 표현되지만 글자 수가 적은 편액(扁額)에서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하기도 한다.
(이상 ‘추사 김정희 학예의 일치’에서
잔서완석루를 ‘왕가의 족보를 꿰어 맞춰(殘書) 아둔한 종친(頑石)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대왕대비의 치맛바람(樓)으로 세 번 만에 성사되었다.’로 풀이하고 있다
.
이 해석에 등장하는 왕은 강화도령으로 익히 알려진 25대 국왕 철종(1831~1863)이다.
‘잔서 완석루’의 뜻풀이로 내세운 전거는 ‘송사(宋史)’와 ‘시경(詩經)’이다.
‘송사’에서 ‘잔서’는 ‘상대를 설 득하기 위해 옛 자료를 모아 작성한 글’이라고 풀이한다.
‘완악할 頑’은 ‘둔하다’ ‘어리석다’는 의미 로 사람의 속성을 일컫는 글자이다.
‘시경’은 바위(岩)나 돌(石)을 천자의 종친이란 의미로 자주 사 용한다. 즉 ‘완석’이란 ‘아둔하고 고집 센 종친’을 지칭한다.
추사는 書자의 아래 부분에 ‘가로 曰’ 대신 옛글자를 사용하여 ‘사람 者’를 채워 넣었다.
특히 ‘者’의 대각선 획을 세 번에 걸쳐 완성했다.
이는 세 번 만에 왕위 계승권자로 결정됐다는 의미라 고 지은이는 풀이한다.
‘石’자는 어떨까.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은 대각선 획이 2번에 걸쳐 이어 붙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 김씨들이 종친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대비의 치맛바람을 빌려 3 번 만에 성사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풀이다.
‘누각 樓’도 마찬가지다. ‘계집 女’부분을 관찰하면, 추 사가 3획으로 女자를 그린 뒤
가필을 하여 획을 이어 붙였으니 ‘치마를 휘젓고 있는 계집’이란 뜻 을 그려내기 위함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친정식구들에게 권세를 몰아 주던 대비의 치맛바람을
‘樓’자 속에 담아내기 위해 추사는 특별한 모양의 ‘계집 女’자가 필요했다 는 분석이다.
-서울=뉴스1,2016.5.3 이기창,추사는 왜 글씨에 암호를 심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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