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암정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31 에 있는,

봉화의 빼어난 정자, 청암정(靑巖亭)을 찾았습니다.

 

봉화 청암정(靑巖亭)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있는 석천계곡(石泉溪谷)과 더불어 명승 제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암정(靑巖亭)을 찾으며 옆에 있는,

권벌(權橃)의 호를 따서 세운 충재(冲齋) 박물관이 있어 먼저 들러 봅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권벌(權橃,1478~1548)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이며,

지금의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인 도지촌(刀只村)에서 태어 났으며,

중종조 조광조(趙光祖)·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안동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사림의 도학정치를 주장 하였던 인물로,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 하였고,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그 후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영천군수에 임명 되었고,

1519년 예조참판이었을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 하려고 하였으며,

이후 아버지가 연로하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고,

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 하여,

1520년 43세 때 안동부(安東府) 내성면(乃城縣) 유곡(酉谷)에 은거 하였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 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듬해 2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 되었으며,

1539년 3월에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그해 7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 왔습니다.

 

1545년(인종 1)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같은 해 8월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임백령(林百齡) 등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 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곧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같은해 9월 우의정 이기,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 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 되었습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인 1548년 유배지에서 졸 하였습니다.

 

권벌(權橃)은 조정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평소 독서를 좋아해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며,

 

1567년(명종 22)에 신원(伸寃)되었고 선조 즉위 후 직첩을 돌려받고 1568년 좌의정에 추증 되었고,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고 후에 현종때 사액이 내려 졌으며,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 (大明會典)이 수정되어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수정되자,

그는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히게 한 데 노력한 공으로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 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 되었으며 문집에 "충재문집 (冲齋文集)"등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청암정(靑巖亭)과 석천정사(石泉精舍) 및 닭실마을의 현판과 물품등을 도난에 대비해 한곳에 모아 전시해 두어,

2개가 한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옛날 닭실마을에서 혼례식에 사용했던 물품이며,

 

보물 902호 청암정(靑巖亭)에 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쓴 전서체의 청암수석(靑巖水石)의 현판으로,

허목은 권벌의 인품을 존경했고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누차 들었기에 한번 찾아가 보려 했으나,

너무 연로해서 봉화까지 갈 수 없는 처지여서 허목(許穆)은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글씨를 써 보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88세로 이 글씨는 1682년(숙종 8) 초여름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죽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그의 마지막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석천정사(石泉精舍)의 주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에게 써준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의 시문(詩文) 편액으로,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2수중 2수로,

酉谷先公卞宅寬(유곡선공변택관)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니

雲山回復水灣環(운산회복수만환)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정개절서횡교입)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하영청지활화착)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가포자능비가학)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헌상무모불상관)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

更燐巖穴矮松在(경인암혈왜송재)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있어

激勵風霜老勢盤(격려풍상노세반)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나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제석천정사(題石泉精舍)"로 석천정사(石泉精舍)에 있었던 편액으로,

肩輿溪上路(견여계상로) 작은 가마가 지날 수 있는 시내가 길가에

書舍水雲間(서사수운간) 글 읽는 정사가 물과 구름 사이에 보이네

風雨三秋夜(풍우삼추야) 깊은 가을밤에 내린 비바람과

煙霜十月寒(연상시월한) 뿌연 서리에 시월의 공기 차갑구나

葉稠巖竇密(옆조암두밀) 나뭇잎은 떨어져 바위틈에 빽빽하고

苔厚石稜斑(태후석능반) 이끼는 바위틈에 두껍게 끼여 아롱졌네

百歲徜徜地(백세상상지) 백세토록 조상께서 거니시던 이곳에

親朋幾往還(친붕기왕환) 친한 벗들 얼마나 오갔던고

 

석천정사(石泉精舍)의 현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 송일중(松齋 宋一中,1632~1717)의 글씨이며,

 

닭실마을의 옛 생활 도구들도 전시 되어 있으며,

 

보물 제 9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왕의 명령서인 유지(有旨)와,

충(忠)자 족자는 권벌(權橃)이 중국 명나라의 사신으로 다녀 올때 명 나라의 태조가 직접 써 건네준 것이라 합니다.

박물관을 나와 협문을 통하여 청암정(靑巖亭)으로 들어 갑니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청암정 기문(靑巖亭 記文)에,

"정자의 북쪽에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 높이가 약 한 길 가량으로 그 색이 매우 푸르렀기 때문에 청암(靑巖)이라 이름 했다"고 적고 있으며,

척촉천(擲燭川)이라 불리는 연못에는 돌다리인 석교(石橋)가 놓여 있고,

돌다리를 건너면 거북바위인 구암(龜巖)이고 바위 위 돌계단인 석계(石階)를 오르면 정자인 청암정(靑巖亭)에 오르게 됩니다.

 

청암정은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1526년(중종 21)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으며 구암정(龜巖亭)이라 했다가 청암정으로 바꿨으며,

당시에는 마루만 6칸으로 아궁이가 없었으나 뒷날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방을 2칸 늘려 지었으며,

정자 주변에 못을 판 후 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고,

장대석으로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정자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 두었으며,

청암정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

주추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어 자연을 활용하여 정자를 세운,

옛사람들의 지혜와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청암정을 짓고 주위에 연못을 만든 매우 탁월한 조경기법을 볼 수 있습니다.

 

청암정(靑巖亭)은 "정(丁)"자 형으로 마루가 6칸이고 방이 2칸이며 방의 좌우에는 누마루가 있어,

 

정자의 마루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있고 자연이 한눈에 들어와,

호방한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하며 높다란 누마루는 주변 경치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청암정(靑巖亭)은 평소 돌다리를 막고 정자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고 있으나,

마침 이곳에 계신 젊은 후손의 배려로 석계(石階)를 따라 청암정(靑巖亭)에 오를수 있어 다행 입니다.

 

6칸의 너른 마루에는 현판과 여러 시문(詩文)과 기문(記文)들을 볼수있어,

 

해서로 쓴 청암정(靑巖亭) 현판으로,

매암(梅庵) 조식(曺湜·1526~1572)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기제유곡청암정(寄題酉谷靑巖亭)"의 시문(詩文) 편액이 있으며,

예안인 민절공 백암 김늑이 차운(次韻)하여 지은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이며,

충재 박물관에서 보았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절필(絶筆)인 전서(篆書)체의 "청암수석(靑巖水石)"의 현판으로,

미수는 청암수석 네 글자를 쓴 뒤 그 옆에 작은 해서로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

(靑岩亭者 春陽權忠定公山水舊墻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여기서 8년은 숙종 8년으로 1862년에 해당합니다.

 

정조의 어명으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쓴 편액이 있고,

 

그외 2기의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1기의 편액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방은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개방성을 더 하였고,

마루방의 뒤편은 판재에 판문을 설치하여 문을 열면 문틀과 함께 하나의 그림이 되게하는 효과를 두었으며,

 

청암정(靑巖亭)은 영화 "스캔들"과 사극 드라마 "바람의 화원", "동이"등에 배경이 되었는데,

사극 "정도전"의 배경이 된 청암정 에서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고려의 흥망성쇠와 조선의 개국을 놓고 설전을 벌이던 장소로 활용 되었습니다.

넌출문인 분합문(分閤門)은 들어 올려 두어야 정자의 멋이 더욱 살아 나는듯 하며,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단아하고 간결한 충재(沖齋)의 모습이 들어 오고,

 

청암정(靑巖亭)이 자리하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정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경수를 심어 가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권벌(權橃) 사후에 청암정(靑巖亭)을 찾아,

큰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에게 써준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2수중 1수 입니다.

我公平昔抱深衷 依杖茫茫一電空 우리공이 깊은 뜻을 품었으나 좋고 나쁜 일들이 번 개처럼 지나가 버렸구나.

至今亭在奇巖上 依舊荷生古沼中 정자는 기암바위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모습 그대로일세.

滿目煙雲懷表樂 一庭蘭玉見遺風 아득하게 보이는 구름은 본래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는 바람에 향기로움을 더하네.

取生幾誤蒙知奬 白首吟詩意不窮 나같은 부족한 사람이 공의 은덕에 힘입어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읊으니 감사한 마음 끝이 없어라

청암정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떠있는 거북으로 비유되어,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 이라는 것이며,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마루가 깔려 있어 처음에는 온돌방으로 꾸며졌고 바위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여,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가리켜 거북바위라고 말하고,

정자의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았다고 하여,

이렇게 물을 담아 줌으로써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암정(靑巖亭)은 "丁"자 형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공간으로 되어있는 팔작지붕과 방을 들이고 양쪽에 누마를를 둔 맞배지붕의 구성은,

절묘한 조화와 우리 건축불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듯 합니다.

청암정(靑巖亭)이 있는 닭실마을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지국(金鷄抱卵之局)의 명당으로 유명한데,

닭실마을은 오늘날 유곡리(酉谷里)에 해당하며 "유곡"이란 "닭실"을 한자로 그대로 옮긴 말로 "금계포란"의 풍수형국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며,

마을 이름이 닭실인 것은 동쪽의 옥적봉이 수탉을 닮고 서쪽의 백운령이 암탉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서 4대 길지 중 하나라고 칭송한 명당 이기도 합니다.

청암정(靑巖亭) 정원은 사대부가의 별당 정원으로 고택 한쪽에 담을 둘러 별도 공간을 조성 했으며,

원래 있던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丁) 자 모양의 정자를 짓고 그 주위로 연못을 조성한 정원으로,

정원은 척촉천(擲燭川)이라 불리는 연못을 사이에 두고 충재(沖齋)와 청암정(靑巖亭)두 건물이 마주하고 있어,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청암정은 못 가운데 섬 같은 큰 돌 위에 있고, 사방으로 냇물이 고리처럼 감고 흘러 자못 경치가 그윽하다"고 표현 하였습니다.

청암정 곁에는 아름다운 정자와 짝을 이뤄 하나의 연결된 건축이 되는 특별한 집으로 충재(冲齋)가 있어,

독서당인 충재(沖齋)는 권벌(權橃)의 호(號)지만 이곳에서는 당호로 쓰이며,

권벌(權橃)은 평소 충재(沖齋)에 거처했는데 평생 "근사록(近思錄)"을 즐겨 보아서 충재에 "근사재"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하며,

독서당 3칸집 충재는 선비의 공간인 만큼 단아하고 간결하여 충재와 청암정은 아주 대조적 입니다.

우선 건물 규모부터 달라서 충재가 방 2칸에 마루 1칸의 소박한 건물이라면 청암정은 방 2칸에 마루 6칸에 별도의 누마루까지 갖춘 호화로운 건물이고,

충재가 온돌 중심의 내향적인 서재로 낮은 곳에 있다면 청암정은 마루 중심의 외향적인 정자로 높은 곳에 있으며,

충재가 맞배지붕의 단아함으로 깊이 은둔한 형상이라면 청암정은 팔작지붕의 화려함으로 선계로 비상하는 형상이고,

충재가 주인이 학문을 연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서재였다면 청암정은 손님을 맞이하고 풍류를 즐기는 누정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충재(沖齋)는 집 중에서 가장 작은 집인 3칸집으로 흔이 말하는 초가삼간의 삼칸으로,

한옥 중에서 가장 작은 집으로 왼쪽부터 마루 한칸과 방 한칸 그리고 약간 덧붙인 부엌이 있으며,

지붕인 맞배지붕은 가장 단순한 형태여서 집은 최소한의 규모이고 가장 간결한 양식여서,

모든 것을 최소화 하고 모든 것을 절제하려 한 집으로 선비의 이상을 엿볼수 있으며,

마루를 보면 일부러 한 쪽에 벽을 만들어 벽을 낸 쪽은 청암정을 바라보는 쪽여서 마루에서 홀로 공부하고 책을 읽다가 정자가 보고 싶어지면,

판벽에 있는 판재의 창문을 열면 창문이 액자가 되고 그 안에 청암정(靑巖亭)이 바라 보이는 절묘함이 있습니다.

충재(沖齋)으 마루앞에는 석천정사(石泉精舍)에서 보았던 형태의 석물이 있어,

돌의 상부에 소나무잎을 뭉친 솔갑을 놓고 태우면 밤에 불을 밝히는 용도로 보여 집니다.

낮은 언덕의 암반위에 지은 단순한 정자로 남을수도 있었지만,

주변의 연못을 파고 물을 들여 거북바위에 생명을 불어 넣어 더욱 아름답고 빼어난 정자로 명승의 반열에 오른 곳으로,

금계포란(金鷄抱卵)의 길지에 자리하였고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생을 돌아 볼수 있는 곳으로,

경북 봉화의 빼어난 정자, 청암정(靑巖亭) 방문기 입니다.

 

석천정사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경상북도 봉화읍 삼계리 석천계곡에 있는,

봉화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찾았습니다.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사(石泉精舍)는,

청암정과 함께 명승 제60호로 지정 되었으며,

석천정사(石泉精舍)는 정자라 하기엔 큰 건물로,

전체 34칸의 규모로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정사(精舍)라 한 것 같으며,

서원에 가까운 규모로 되어 있으며,

정사(精舍)로 들어가기전,

배치도로 석천정사(石泉精舍) 건물의 위치를 살펴 봅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는 1535년 충재 권벌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1517-1591)가,

초계군수로 근무하다가 향리에 돌아와 선지를 계승하여 건립한 별서로 삼은 정사(精舍)이며,

이곳에는 소나무 숲과 기암으로 이루어진 석천계곡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빼어난 자연경관에 전통의 사적이 잘 어우러져 있는 명승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서편의 입구가 막혀있어 동편의 협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학문수양과 강학의 기능인 석천정사(石泉精舍)의 평면은 "ㄴ자" 형의 편대칭 형식인데,

정면 5칸 반,측면2칸의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6칸 대청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편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문과 담장을 연경되어 있는 2칸 규모의 아담 하면서,

정사 건물과 수직 방향으로 자세를 바꾸고 선 창고 건물인 일야각(一夜閣)이 있어,

일야각(一夜閣)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충재 선생의 신의를 모셨던 삼계서원이 철폐되며,

그 신의를 모실 곳을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며,

 

석천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과 2칸 반, 1칸의 건물이 서로 이어진 평면 구조로 한국 전통가옥의 단아한 미를 자랑하며,

석천정사는 금강산 유람을 하며 보았던 소담한 절집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 졌다고 하는 곳으로,

창살을 열면 계곡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물과 바람 등 자연의 소리에 독서를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난간이 있는 넓은 마루는 대략 10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로 옛날에는 학문 연마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학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의 현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松齋 ) 송일중(宋一中,1632~1717)의 글씨이며,

정사(精舍)와 연결하여 2칸의 작은 건물이 잇대어 있어,

원생들의 방인 독역재(讀易齋)로 2칸의 온돌방은 기거의 기능으로 여겨 집니다.

독역재(讀易齋)의 현판이며,

주역을 읽는 집이란 의미의 독역재(讀易齋)는 후손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이 건물로 인해 석천정에서 석천정사(石泉精舍) 되었다고 합니다.

정사(精舍)의 마루 앞에는 세워둔 석물을 볼수 있어,

일종의 조명 받침대 역할을 한 돌로 이 위에 소나무잎을 뭉친 솔갑을 놓고 태우면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세운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1517-1591)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36년 향시와 15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아버지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이 1547년 윤원형등의 소윤일당을 비난한 양재역 벽사사건(良才驛壁書事件:丁米士禍)에 연루되어,삭주(朔州)로 귀양가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 하였습니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전원의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으며,

 

권동보(權東輔)는 1564년 선친 등의 묘소를 수호할 추원재(追遠齋)와,

1588년 사림과 안동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건립 했으며,

부친에 대한 억울함과 상심으로 벼슬길 마다하고 낙향하여 부친을 추모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나라의 녹을 먹느니 산수간에 집을 짓고 마음편히 유유자적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정사(精舍)의 서편 산아래 암반에는 암각서가 보여,

석천정(石泉停)의 글씨로,

석천정사는 최초 정자로 만들어졌다가 후손에 의해 불을 넣는 방을 증축하며 석천정사(石泉精舍)가 되었다고 합니다.

 

뒤쪽 언덕 밑에는 석천정(石泉井)이라는 샘도 찾아볼수 있으며,

정사(精舍)의 난간에서 보이는 석천계곡의 풍경으로,

석청정사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싸여 있고,

정자는 계곡에 면한 원래 지형을 최대로 살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어 졌으며,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마루는 완전히 개방된 형태가 아니라 판장문을 두어 필요에 따라 문을 닫아 공간을 폐쇄하기도 하고,

문을 열어 자연과 소통할 수 있게 해두어 개울가에 있는 창문을 열면 계곡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 옵니다.

 

정사(精舍)에서 내려와 서편에 있는 정면 3칸 측면1칸의 산수요(山水寮)로,

왼쪽의 1칸에는 부엌이 딸려 있어 정사(精舍)의 부속 건물로 여겨지며,

부속 건물의 산수요(山水寮) 현판이며,

산수요(山水寮) 옆에는 사주문이 자리해 있어,

서편으로 들어오는 출입구 입니다.

 

동편의 문으로 다시 나와 담장아래에 서니,

처마 아래에 수명루(水明樓)와 계산함휘(溪山含輝)의 현판이 있어,

철종때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송벽 이정신(李正臣: 1792-1858)의 글씨이며,

수명루(水明樓)는 "물맑은 행실과 덕행을 후대에 퍼트림"의 의미 이며,

계산함휘(溪山含輝)는 "시내와 산이 빛을 머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정사(精舍) 아래의 석천계곡으로 나와 봅니다.

 

석천계곡의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비룡 폭(飛龍 瀑), 백석 량(白石 梁) , 사자 석(寫字 石), 청하 굴(靑霞 窟), 권충정공 산수구장(權忠定公 山水舊庄), 청하 동천(靑霞 洞天), 팔자 암 (八字 巖)등 암반에 새겨진 글씨가 있다고 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백석 량(白石 梁)의 글씨를 찾을수 있었고,

 

석천정사(石泉精舍)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솔바람 소리로 채워진 이곳은 학업에 정진하기 더없이 좋은 곳으로,

정사(精舍)의 마루에서 책을 읽으며 자연을 만끽하던 선비들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계곡을 따라 서편으로 향하면,

산책로를 따라 석천정사(石泉精舍)로 들어오는 운치있는 나무다리가 있고,

 

정사(精舍)를 관리하는 건물인 관리사가 "ㄱ"자 형태로 서있으며,

부엌이 있는 돌출된 부분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올돌방을 들인 부분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특이 합니다.

 

우리나라 4대 길지 중 하나라고 꼽히는 명당 지역에 자리하여,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부친을 향한 효성과 학문 연마와 후학을 위한 생을 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석천계곡의 아름다운 절경속에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경북 봉화의 석천정사(石泉精舍) 입니다.

 

 

백두대간에 깃들어 살아온, 전통마을 집성촌의 세상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8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봉화-바래미전통마을(개암종택/팔오헌종택/해저만회고택/해와고택)-봉화읍(쌍송정정침/북지리마애여래좌상/계서당)-닭실마을(석천정사/삼계서원/청암정/사동추원재/충재박물관/서설당)-황전전통마을(경암헌고택/봉산리사/도암정/송석헌/동암서당)-상운면(설매리3겹까치구멍집/설매리겹집/무진장재/종선정)-봉성면(봉화금씨군위공종택/봉서루/봉화향교/사덕정/영모당)-법전면(뇌풍정/경체정/기헌고택/송월재종택/이오당/법전강씨종택/법계서실)-춘양면(한수정/만산고택/권진사댁/와선정)-소천면(임란의병전적지/분천리도토마리집/분천리까치구멍집)-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 시간을 갖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봉화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8강 답사지인 <봉화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에 깃든 산간고을
봉화는 북쪽으로는 백두대간 넘어 영월과, 동쪽으로는 낙동정맥 넘어 울진과, 서쪽으로는 영주와, 남쪽으로는 안동과 접해 있습니다.

봉화의 산줄기는 북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남쪽으로 안동분지와 맞닿아 있습니다.

봉화의 물줄기는 태백산지에서 발원하여 응방산과 옥적봉을 지나 봉화산골에서 흘러온 옥수와 합쳐지면서 봉화의 서쪽을 흐르는 석천계곡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옥계수가 연화봉, 청옥산, 조록바위봉 등의 높은 고원을 16㎞를 지나 봉화의 동쪽을 흐르는 벽천계곡과,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y자형 사미정계곡이 경북 북부 중에서도 최고 오지인 봉화군 법전면과 청량산 일대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듭니다.

봉화는 삼한시대에 진한의 기저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현재의 봉성면 일대가 고구려의 내기군 고사마현에 속하였으며 신라 5대 파사왕(80~112) 때 신라 영토에 속하였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742~765) 때 내령군 옥마현으로, 고려 8대 현종(1010~1031) 때 봉성현으로, 1895년(고종 32)에 봉화현을 봉화군(奉化郡)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07년(순종 1)에 군청사를 봉성에서 춘양으로 옮겼으며 1914년 군청을 춘양에서 봉화읍 내성리로 옮기고 15개 면을 9개면으로 개펀하였으며, 1962년 춘양면 덕구리와 천평리를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시켰고 1963년 석포출장소를 설치하여 소천면 석포리, 대현리, 승부리를 관할토록 하였습니다. 1973년 법전면 소로리가 춘양면에, 상운면 두월리와 내림리가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되었고 1979년 5월 1일 봉화면이 봉화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손꼽히는 경승지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이며 석천계곡에는 석천정사가 있다.Ⓒ봉화군


봉화의 진산 청량산
청량산은 봉화의 진산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부터 소금강이라고 일컫는데, 기암절벽이 12봉우리를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한 낙동강이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흐릅니다. 산속에는 27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던 유지가 있고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공민왕이 은신한 공민와당과 산성 등 많은 역사적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봉화의 불교문화재는 666년(문무왕 6) 원효가 창건한 청량사와 청량사유리보전(淸凉寺琉璃寶殿), 같은 해 의상이 창건한 축서사(鷲棲寺)와 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 봉화 축서사 괘불탱, 676년 원효가 창건한 각화사(覺華寺)와 각화사귀부, 삼층석탑 등이 남아 있습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은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으로 지림사(智林寺) 남동쪽에 있는 자연암벽을 파서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습니다. 네모진 얼굴에 고졸한 미소를 나타내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각 기법으로 보아 실제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됩니다.

각화사 태백산사고지(太白山史庫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오던 태백산사고가 있던 자리로서 조선시대 5대 사고 중 하나로 각화사 뒤편 ‘사고지골’에 있었습니다. 이 사고(史庫)는 1606년(선조 39)에 건립하여 1913년까지 약 300여 년간 존속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보관되어 오던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보관 중입니다. 사고는 왕조실록 이관 후 약 30여 년간 방치상태로 있다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방화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산사태와 잡목으로 유구들이 매몰되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8년 8월에 발굴정비계획에 따라 대구대학교 박물관이 건물의 유구를 발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봉서면의 읍치 유적
봉화읍치구역의 유적은 봉서면에 남아 있습니다.

봉서루는 봉화현(奉化縣) 관아건물의 하나로, 1738년에 봉화현감 이광직(李匡直)이 동헌인 조양각(朝陽閣)을 중건하면서 외관아로 중건한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현내의 유현들이 집회하며 교류하던 장소인데, 한말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봉화현도(奉化縣圖)에도 객사(客舍)와 아사(衙舍) 앞에 영봉루(迎鳳樓)와 봉서루(鳳棲樓)가 나타나 있습니다. 봉서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ㄱ자형(字形) 건물로 평면은 좌측에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 3칸 건물을 두고 우측에는 앞쪽에 1칸이 돌출된 2칸 규모의 2층 누각을 연접시켰습니다.

봉화향교는 세종 때 창건하였고 1579년(선조 12)에 현감이었던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중건한 소설위향교(小設位鄕校)입니다. 배치는 유교문(由敎門), 누각,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을 동일축선상에 놓은 전학후묘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명륜당의 전면에는 동, 서재를 두었으며 대성전의 좌측에는 전사청인 정노당을 배치하였습니다.

▲계서당종택은 청백리 성이성(成以性)의 가옥이다.Ⓒ봉화군


청백리 성이성의 계서당종택
계서당종택(溪西堂宗宅)은 청백리로 녹선(錄選)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1613년에 건립한 가옥입니다. 6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중문칸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정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랑채 뒤에는 Π자형의 안채를 배치하여 정침은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보입니다. 정침의 우측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성이성은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창녕으로 부용당 성안의(成安義)의 아들입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문하에서 배우고 1616년에 생원을 거쳐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응교, 지제교, 통정대부 부사에 이르렀고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원종(인조의 생부)의 추승(追崇)을 논하고 인성군 공(珙)의 아들이 모역을 범했을 때 용서하기를 주청하여 죽음을 면케 했습니다. 영호남 어사로 네 번이나 암행하여 권선징악의 본을 모두 시행하였고 헌납으로 있을 때는 윤방, 심기원, 이민구 등의 불충함을 탄핵하였고 각 고을 수령으로 재직 시에는 청렴 정직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인평대군이 빈번히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김자점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이 두 차례 쌀과 콩을 내렸으며 부제학에 증직되고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계서집(溪西集)>이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 논문에 의하면 춘향전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으로 인조, 광해군 때의 실존인물이라 합니다.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들렀다고 합니다. 성이성의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변사또 잔치연에서 지은 <금준미주시>(암행어사 출두시)와 동일한 시를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손꼽히는 경승지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닭실마을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처음 입향한 충재 권벌이 은거한 이후 후손들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충재 권벌은 안동에서 태어나 1507년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으로 기묘사화에 연루, 파직 당하였다가 복직하나 을사사화 연장으로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귀양,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조 때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석천계곡 변에는 유적들이 남아 있고 많은 유물이 충재유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닭실[酉谷]마을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석천계곡과 어울려 울창한 소나무 숲, 넓은 바위와 깨끗한 물이 어우러진 곳으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경승지로 칭송한 곳이기도 합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는 1535년 충재 권벌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가 초계군수로 근무하다가 향리에 돌아와 건립한 별서로 삼은 정사입니다. 전체 34칸의 서원에 가까운 규모로 평면은 ‘ㄴ자’ 형의 편대칭 형식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의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6칸 대청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사 건물과 수직 방향으로 들어선 창고 건물인 일야각(一夜閣)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충재 선생의 신위를 모셨던 삼계서원이 철폐되자 그 신위를 모실 곳을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권동보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36년 향시와 1542년 사마시에 합격,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을 지냈고, 아버지 충재 권벌이 1547년 윤원형 등의 소윤 일당을 비난한 ‘양재역벽사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귀양 가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석천정사를 짓고 여생을 보냈으며 1564년 선친 등의 묘소를 수호할 추원재와, 1588년 사림과 안동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했습니다.

▲청암정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웠져 있다.Ⓒ봉화군


청암정(靑巖亭)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1526년(중종 21)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웠는데 주변에 못을 판 후 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고, 장대석으로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청암정에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 주추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입니다.

추원재(追遠齋)는 권벌과 그의 부모 및 외조부모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한 묘하재실(墓下齋室)로, 닭실마을 뒤쪽의 재궁골에 있습니다. 전면에는 9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한 곳에는 7칸 규모의 상실(上室)이 있으며, 좌측에는 4칸 규모의 관리사가 대문채와 연접하여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는 4칸 규모의 2층 누각건물인 동루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게 하였습니다.

서설당고택(瑞雪堂古宅)은 권벌의 둘째 아들 동미(東美)의 4대손 권두익(權斗翼)이 1708년 이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유곡리의 자연마을인 토일마을 뒷산을 뒤로 하고 마을 앞 토일천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택은 본체와 사당으로 구성되며, ‘ㅁ’자형으로 구성된 본체의 동북쪽으로는 사당이 있고, 본체와의 사이에 토석담장을 설치하여 협문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터의 풍수적 해석에 근거하여 담장 없이 이룬 외부 공간 구성, 17세기 이후부터 두드러지는 내외 공간 구분과 사랑채의 돌출, 사당의 독특한 팔작지붕은 문중 고유의 상대적 독창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은 1588년에 충정공사(忠定公祠)를 건립하여 권벌의 위패를 봉안하여 오다가 1660년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되었고, 1871년에 훼철되었던 것을 1960년에 복설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습니다. 서원의 배치는 콘크리트조의 2층 누각인 관물루(觀物樓)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강당인 정일당(精一堂)이 있으며 강당의 좌우에는 동, 서재를 배치하였습니다. 강당의 뒤에는 사당인 충정공사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관물루 우측에는 ‘충재선생묘허비각’이 있습니다.

송석헌고택은 동암(東巖) 권이번(權以番)이 아들인 선암(仙巖) 권명신(權命申)에게 지어준 살림집입니다. 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높은 축대 위에 口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중문칸의 우측에는 사랑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누마루인 영풍루(迎風樓)를 두었고 영풍루와 사랑채는 계단으로 연결시켰으며, 정침의 좌측에는 못채와 방앗간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선암재(仙巖齋)를 두었으며,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동암서당은 동암 권이번(東巖 權以璠)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 소암 사설(素巖 師卨), 소산 사주(所山 師周), 송학헌 윤석(松鶴軒 胤錫) 등이 1749년(영조 25)에 건립하였으나 1785년(정조 9)에 동산사(桐山社) 창건으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권진사댁은 성암(省菴) 권철연(權喆淵)이 살던 집인데, 건너 마을인 ‘운곡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건립하였다 합니다. 9칸 규모의 동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口자형의 정침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3칸 규모의 서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침의 양쪽 허리부분에는 토석담장을 설치하여 내외공간을 구분하였으며, 담장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워 안채로 출입케 하였습니다.

▲한수정(寒水亭)은 충재 권벌의 손자 권래가 건립한 정자로,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이름지었다 한다.Ⓒ봉화군


한수정(寒水亭)은 충재 권벌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라는 모막(茅幕)이 있던 자리에 손자인 권래(權來)가 건립한 정자인데,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한수정(寒水亭)’이라 이름지었다 합니다. 정자는 T자형으로 정자의 주위에는 ‘와룡연(臥龍淵)’이라 불리우는 연못이 삼면에 조성되어 있으며 서쪽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초연대(超然臺)’라 불리는 넓은 바위가 있습니다.

의성김씨 집성촌 바래미전통마을

바래미전통마을은 의성김씨의 집성촌입니다.

개암종택(開巖宗宅)은 의성김씨 개암공파종택으로 ‘바래미마을‘의 뒤에 있습니다. 종택은 개암 김우굉(金宇宏)의 10세손인 김연대(金鍊大)가 매입하여 정착하였으며 11세손인 김우영(金佑永)이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3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一자형의 사랑채와 Π자형의 안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팔오헌종택(八吾軒宗宅)은 팔오헌 김성구(金聲久)의 종택으로, 口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좌측에는 중문칸과 아랫방을 연접시켰으며 작은 사랑방 뒤로는 통래칸과 고방을 두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상방을 두고 좌측에는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켰습니다.

해저 만회고택은 파리장서운동 때 유림들의 연명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받은 김건영(金建永)의 살림집입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건물로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인데, 평면이 측면출입형인 관계로 사랑채도 특색 있는 평면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문이 있어야 할 부분에 책방을 두었는데, 책방은 퇴칸까지 돌출되어 동쪽의 큰사랑과 서쪽의 작은사랑은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되게 하였습니다.

해와고택(海窩古宅)은 이조참의를 지낸 해와 김희택(金熙澤)의 손자인 김중수(金中銖)가 조부의 유지에 따라 건립한 주택입니다. 정침은 ㄱ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튼 口자형을 이루며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로 좌측에는 3칸 규모의 문간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로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건넌방을 두고 좌측에는 2통칸의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이 연접되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남호구택은 농산(聾山) 김난영(金蘭永)이 1876년에 건립한 주택으로, 솟을대문을 한 7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의 口자형 정침이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인데, 평면이 측면출입형인 관계로 사랑채도 특색 있는 평면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문이 있어야 할 부분에 도장방을 두어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공간적으로 분리되게 하였으며, 도장방의 주위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돌출시켜 두 공간을 연결시켰습니다.

황전전통마을에도 의성김씨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쌍벽당종택(雙碧堂宗宅)은 연산군 때의 문신 쌍벽당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의 부친인 죽헌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습니다. 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하여 口자형의 정침이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2칸 규모의 아래채를 두었습니다. 정자인 쌍벽당은 사랑채의 오른쪽 뒤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쌍벽당 뒤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며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암헌고택은 10대조인 김종걸(金宗傑)의 조부가 장인인 남구수(南龜壽)로부터 가옥을 이어 받아 의성김씨의 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정침의 오른쪽 뒤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과 못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 1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고 건넌방의 전면에는 통래칸과 고방이 우익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암정은 김종걸의 후손이 1650년에 건립한 정자로, ‘황전마을’ 앞에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방지를 조성하였으며 연못을 향한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후 좌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습니다. 평면은 어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전면의 퇴칸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퇴칸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봉산리사는 김종걸을 추모하기 위해 1793년에 건립한 이사(里社)로 ∪자형의 문간채와 一자형의 본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건물 사이의 트인 부분에는 토석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전면 좌측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어간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입니다.

상운면의 봉화금씨 유적들
상운면 일대에는 봉화금씨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군위공종택(軍威公宗宅)은 금계(琴啓)의 종택으로 ㄷ자형의 정침과 일자형의 작은 사랑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5칸 규모의 아래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평면은 중문칸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사랑채를 두고 우측에는 작은방과 고방을 배치하였습니다. 고방의 뒤로는 통래칸과 부엌, 안방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으며 안방의 좌측에는 안대청 2칸과 건넌방을 두어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종선정은 금응석(琴應石)이 1554년에 건립한 정자로, 상운에서 봉성으로 통하는 국도 변에 북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경사진 대지위에 건립한 까닭에 출입은 배면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측칸을 통칸 온돌방으로 꾸민 후 좌측에는 6칸 대청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계자각을 두른 헌함을, 후면에는 쪽마루를 각각 설치하였습니다.

무진장재(無盡藏齋)는 신라시대 사찰이었던 무진장사를 1480년경에 농수 금원정(琴元貞)의 재실로 개축하였습니다.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건물인데, 대지의 지형으로 보아서는 동남향한 좌익사 부분이 정면인 듯 하나 주출입은 동북향한 면에 난 중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중문을 들어서면 중정을 사이에 두고 앞에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익사에는 온돌방과 부엌, 마루, 통래칸, 외양간 등이 연접되어 있습니다.

쌍송정(雙松亭) 정침은 봉화인 금혜가 노후에 은거하던 가옥입니다. 당호는 정침 좌측에 소나무 2그루가 있는 곳에 정자를 지어 ‘쌍송정’이라 하였는데, 정자는 1975년에 영남대학교로 이건하여 현재는 정침만이 남아 있습니다. 평면은 경북 북부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口자형 건물인데, 중문칸 전면에 현관처럼 돌출된 부분은 후대에 증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법전면·춘양면의 진주강씨 집성촌
법전면과 춘양면에는 진주강씨의 집성촌이 있습니다.

강씨종택은 병자호란 후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친형인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함께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이라 하는데, 1798년에 후손인 강명규(姜命奎)가 중수하였다 합니다. 정침은 口자형의 건물인데, 정침의 우측에는 도은의 아들인 강찬이 학문 증진과 후학 계몽을 위해 1710년에 건립한 재청인 성건재(省愆齋)가 있으며 재청의 후면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해은고택(海隱古宅)은 해은 강필효가 살았던 집으로, 강윤의 <법천문집>의 기록으로 보아 1750년(영조 25)경 창건된 건물로 추정되나 그 후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정침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입니다. 해은 강필효는 명재 윤증의 학문을 계승한 소곡 윤광소의 문인으로, 1803년(순조 3) 유일로 천거되어 순릉참봉, 충청도 도사, 통정대부를 역임하고 돈녕부 도정에 올랐습니다. <해은문집> <경설도> <사유록>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중 <해은문집>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기헌고택은 강두환(姜斗煥)이 건립한 주택으로,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6칸 측면 7칸 규모의 口자형 정침이 있으며, 전면을 모두 사랑공간으로 구성한 까닭에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설치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입니다. 안채는 좌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있고 2통칸의 안방은 안마당을 향하도록 배치하였습니다.

법계서실은 해은 강필효(姜必孝)를 기리기 위해 1840년에 제자인 성근묵(成近默), 성수묵(成遂默) 등이 유림과 함께 건립한 서실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에 단칸 규모의 마루방을 마련한 후 정면과 양 측면에는 퇴 칸 마루를 둘렀습니다.

경체정은 강윤(姜潤), 강완(姜浣), 강한(姜瀚) 3형제를 기리기 위해 후손인 강태중(姜泰重)이 1854년에 건립한 정자로 ‘음지마을’ 입구에 위치하는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후 전면 좌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으며, 전면에는 연못을 조성하였습니다.

뇌풍정(雷風亭)은 강재항을 기리는 정자로 구릉지의 암반 위에 세워졌습니다. 조선후기의 독특한 정자 건물로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나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강재항은 영남지역에서 재지사족으로 자리잡고 있는 기호학파의 노론계열로, 관직에서 은퇴한 이후 향리에서 강학 활동을 하며 삼계서원의 향음주례에 참여하는 등 영남학파의 선비들과 활발하게 교유하였습니다.

이오당(二吾堂)은 잠은 강흡을 추모하기 위해 1679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1938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데, 이오(二吾)라는 당호는 낙오천(樂吾天)하여 종오년(終吾年)한다는 의미로 붙여 진 것입니다.

만산고택(晩山古宅)은 만산 강용(姜鎔)이 1878년에 건립한 가옥입니다. 11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口자형의 정침이 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칠류헌(七柳軒)’이라 편액한 5칸 규모의 별당이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랑마당의 좌측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서실 전면에 걸려 있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란 현판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 합니다.

와선정은 병자호란 때 대명절의를 지키며 이곳에 은거한 태백오현(太白五賢)인 강흡(姜恰), 홍우정(洪宇定), 심장세(沈長世), 정양(鄭瀁), 홍석(洪錫)이 교유지처로 건립한 정자인데,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은 년 1회씩 회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배면과 좌측면에는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배면 담장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정자로 출입케 하였습니다.

▲분천리 까치구멍집은 수안골 안쪽의 산기슭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까치구멍집은 한 용마루 아래에 앞뒤로 방를 꾸민 구조를 보여준다.Ⓒ봉화군


까치구멍집과 도토마리집
설매리와 분천리에는 까치구멍집과 도토마리집이 있습니다.

설매리 3겹까치구멍집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소유자의 7대조가 건립하여 대를 물려 살아왔다고 하며, 지붕은 1970년대에 시멘트기와로 개량하였던 것을 1996년에 다시 이엉으로 환원하였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봉당이 나오는데, 봉당의 좌우에는 외양간과 정지를 두었고 봉당 뒤쪽에는 어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과 샛방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안방을 두었습니다.

설매리 겹집은 1840년경에 건립된 초가 까치구멍집입니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 겹집인데, 우측에는 3칸 규모의 초가집인 못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배치를 이루었습니다. 본채의 전면은 봉당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을, 우측에는 정지와 안방, 벽장을 연접시켰고 후면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을 두었으며 우측으로는 작은 마루를 1칸 더 연접시킨 후 고방을 배치하였습니다.

분천리 까치구멍집은 ‘수안골’ 안쪽의 산기슭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간의 두짝 판문을 들어서면 봉당을 사이에 두고 마루칸이 나타나는데 마루의 뒤에는 좁은 도장방을 설치하였습니다. 좌측칸에는 부엌과 안방을 앞뒤로 배치한 후 부엌의 앞에는 마구간을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우측칸은 통간으로 사랑방을 꾸몄습니다.

분천리 도토마리집은 평면은 어간의 정지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과 도장방을, 우측에는 외양간과 사랑방을 연접시켰는데, 정지를 가운데에 둔 평면형태가 베틀의 도토마리와 유사하다고 하여 ‘도토마리집’이라고 부릅니다. 이 집은 이러한 평면적인 특징과 함께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춘 것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어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6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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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법,장비소개

 

매듭이란

암벽등반에서는 자일이나 슬링이라는 연결체를 통해 모든 장비와 등반자들을 이어 준다.

이것은 모두 매듭이 없다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매듭법을 선택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매듭을 짓는 일은 안전한 등반의 기본이다.

매듭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실전에서는 주로 중요한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등반이 가능하다.


다만, 매듭법 역시 평소 충분히 익혀둬야만 실전에서 당황하지 않고 즐거운 등반을 할 수 있다.

매듭의 실수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등반중 잘못된 매듭으로 인하여 추락시 매듭이 풀린다면 그 추락은 영원한 추락이 되고 만다.

 

간혹 일반인들이 매듭을 가볍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매듭은 어떠한 등반 기술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든 매듭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어야 하며 등반 시작 전에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파트너의 매듭도 항상 체크하는 안전의식을 길러야 한다.

 

우선 등반시 꼭 필요로 하는 중요 매듭 몇 개만이라도 철저하고 완벽하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등반은 매듭으로 시작하고 매듭으로 끝이난다.

 

 

 


좋은 매듭의 조건

  • 모든 매듭은, 가닥이 꼬이지 않고 그 모양이 깔끔해야 한다.
    - 그래야만 강도가 높아지고 단단하며 부피도 작아져 보다 안전한 등반이 보장된다.
  • 모든 매듭은 짓고난 후 끝부분(남는 부분)이 적당히 여유가 있어야 한다.
    - 너무 짧으면, 매듭 부분이 힘을 받았을 때 풀어질 수가 있다.

  • 매듭이란 조작이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확실하고 견고해야 하며 다시 풀 때에도 쉽게 풀려야 한다.
  • 매듭에 소모되는 줄의 길이가 짧고 매듭 뭉치가 작은 매듭, 사용중엔 풀리지 않고 사용 후엔 잘 풀리는 매듭,
    ★ 강도가 강한 매듭. 익히기 쉽고 간단한 매듭이 좋다.

매듭의 종류

옭 매듭 (Over hand knot)
고리 매듭으로 자일 중간 매듭시에 사용되거나 잡끈을 간단하게 사용할 때 이용되며, 매듭 중 제일 간단한 매듭으로 빨리 할 수 있는 매듭이다. 등반시 힘을 받아 조여지면 잘 안 풀리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급하거나 정신이 혼미하여 다른 매듭이 잘 안 되었을 때 사용하면 적합하다. 어떠한 매듭이든 매듭을 한 다음에는 꼭 끝처리로 이 옭 매듭을 해야 안전하다.


 

테이프 매듭(Tape knot)
테이프 슬링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힘을 가하면 가할 수록 조여드는 장점이 있으며 주로 슬링 묶을 때 사용된다. 만드는 법은 먼저 한 테이프 슬링의 한쪽 끝부분에 옭매듭을 느슨하게 한 다음, 다른 한 끝으로 '되따라 들어가기'를 한다.
이 매듭은 등반중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자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되감기 매듭, 혹은 링 밴드(Ring Band) 매듭이라고도 한다.

 

 

8자 고리 매듭(Figure-eight knot)
선등자나 후등자가 안전벨트에 직접 묶을 때 주로 사용되며 지형 지물이나 확보물에 자일를 고정시킬 때에도 사용된다. 매듭 중 인장 강도가 가장 크다.
장점 : 안전벨트가 없을 때, 직접 몸에 연결할 때, 줄의 가운데에 맬 때, 확보물에 고정 시킬 때 사용하는데, 매기가 간단하며 안전도가 높고 충격에 강하다.
단점 : 매듭이 크고 복잡하며 매듭 조정이 번거롭고 줄의 길이가 많이 소요된다.

 

 

8자 연결매듭
자일과 자일를 연결할 때 사용한다. 사용시 매듭이 풀리지 않으며 힘을 받아 조여진 후에도 쉽게 풀 수 있다. 등반시 권장하고 싶은 매듭이다.
먼저 A 자일의 한쪽 끝부분에 한가닥의 8자 매듭을 느슨하게 만든다. 그 다음 B 자일의 끝으로 "되따라 들어가기"를 한다. 이렇게 하면 두 자일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안전하게 하나의 자일로 연결된다. 주로 하강용 자일을 만들때 사용하는데, 8자 매듭의 장점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매듭이다.

 

8자 되감기 매듭
강도가 높고 보울라인 매듭보다 잘 풀리지 않아 등반용 주자일을 안전벨트에 직접 묶을때 (카라비 너 없이) 사용한다. 우선 자일 한겹으로 8자매듭을 만든후, 자

 

일의 끝 부분을 되따라 들어가면, 8자 고리 매듭과 같아지는데, 물론 되따라 들어가기 전에 안전벨트의 고리 속을 통과해야 된다.

 

피셔맨즈 매듭(Fisherman's knot)
어부들이 낚시줄을 이을 때 사용한다는 매듭법인데, 자일과 자일을 연결할 때 주로 사용하는 연결 매듭이다. 한번씩 감으면 피셔맨, 두번씩 감으면 이중 피셔맨 매듭인데, 이 매듭의 장점은 매듭 하기가 쉬우며 한번 매듭을 지어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단단하게 조여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사용 후 쉽게 풀리지 않는 단점이 있다.
굵기가 작은 롤(코드) 슬링을 매듭할 때에 적합한 매듭으로서 보조줄로 고리를 만들 때나 긴 하강을 위해 두개의 줄을 이을 때 사용한다. 하지만 하강용 자일을 연결할 때는 이 매듭보다 8자 연결매듭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 매듭을 한 후 끝줄의 여분이 짧을 경우 풀릴 위험성이 있으므로 끝줄을 5-16cm 정도 남기는 것이 안전하다.

 

 

 

 

 

 

보울라인 매듭(Bowline knot)


로프를 안전벨트에 연결할 때, 안전벨트가 없어 직접 몸에 연결할 때 사용하는 매듭이다. 고리를 내어 주는 매듭으로 등반자가 안전벨트에 고정하고자 할 때에는 끝 부분을 반드시 다시 한 번 감아서 옭 매듭 해주어야 안전한 매듭이다.


매듭 중 가장 잘 풀어지는 단점이 있으며 장점은 고리의 조절이 쉽고 매듭후 조여들지 않으므로 벨트없이 자기 몸에 직접 묶을 때 사용하면 적합하다. 따라서 워킹산행시 곧바로 자기 몸에 묶을 때 적합하며 정상적인 등반에서는 사용치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주자일을 안전벨트에 묶을때 이 매듭을 쓰는 이들이 있으나 8자 되감기 매듭이 더 안전하다. 쉽게 조일 수 있으나 줄이 뻣뻣할 경우 풀릴 수 있기에 줄 끝의 여분으로 반드시 옭매듭을 해준다. 또한 그림 처럼 고리 부분을 이중으로 묶어 매듭부분을 보강할 수 있다.

 

 

이중 보울라인 매듭
자일 가운데를 두 줄로 만들어 안전벨트에 바로 묶는 매듭으로 매듭을 한 다음에 풀림을 방지하기 위해 옭 매듭이나 카라비너를 걸어서 마무리한다.



 

 

 

프루직 매듭(Prusik knot)
이 매듭은 고정된 자일을 타고 오르내릴 때 등강기가 없는 비상시에 사용하거나 또는 자기 확보줄로도 많이 사용한다. 오버행을 하강할때 자일이 엉겨 있거나, 자일 끝이 바닥에 닿지 않은 경우에 쓸 수 있다.


수직으로 늘어진 자일에 코드 슬링(프루직)을 두세번 감고 밑으로 잡아당기면 감긴 매듭이 수직 로프에 꽉 물려서 흘러내리지 않고, 반대로 힘을 빼면 매듭이 느슨해져 감긴 슬링을 위 아래로 이동시킬 수 있다.

코드 슬링의 굵기는 로프 굵기의 절반 정도가 제일 효과적이다. 코드 슬링이 너무 굵으면 제동이 되지 않아 위험하다. 즉, 주 자일의 굵기가 10mm일 때에는 프루직 슬링의 굵기는 주자일보다 가는 5∼7mm가 적합하며 코드 슬링을 사용해야만 매듭이 가능해진다.


하중을 풀고 손으로 밀면 줄을 따라서 자유스럽게 움직이지만 체중이 걸리면 밑으로 미끄러져 내리지 않는다 하중이 충격적으로 걸릴 경우 제동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줄이 얼어붙은 상태에서도 제동이 잘 안된다. 등반자가 추락시 자신을 스스로 구할 수 있으며, 추락한 동료나 짐을 끌어올릴 때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클램하이스트 매듭(Klermheist knot)


프루직 매듭이나 바흐만 매듭과 같은 용도로 쓰이고 위아래로 움직이기가 편하지만 마찰 때문에 연결줄이 많이 상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손으로 조작하기가 어렵긴 하나 감는 횟수에 따라 다양한 마찰을 줄 수 있고, 하중이 걸린 후 프루직 매듭보다 풀기가 쉽다.

 

 

 

 

 

바흐만 매듭(Bachmann knot)
카라비너에 롤 슬링이나 테이프 슬링을 걸어 주자일에 돌려주면 되는데, 프루직 매듭보다 매듭을 위아래로 움직이기 쉽고 무게가 걸린 다음에도 매듭이 느슨해진다.



 

 

 

 

아카데미 매듭
서로 다른 두 줄을 이을 때 쓰는 매듭으로 사각 매듭과 비슷하지만 가는 줄을 한번 더 돌려 매듭을 해야 한다. 겨울철에는 자일이 얼어 매듭이 잘 풀리지 안는데 아카데미 매듭은 매듭을 쉽게 풀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역시 매듭을 한 다음에 자일 끝을 꼭 옭 매듭으로 마무리한다.

 

 

 

 

 

 

 

에반스 매듭
자일 끝을 이용해서 고리를 만드는 매듭으로 자일을 당기면 고리가 조여 들고, 풀 때는 고리에서 카라비너를 빼낸 다음 긴 쪽 자일만 당기면 매듭이 저절로 풀리는 특징이 있다.
나무 밑둥 등에 자일을 돌려 묶을 때나 안전벨트에 줄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풀기가 쉽고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충격이 가해지면 매듭의 고리가 죄어들기 때문에 몸에 직접 매어서는 안 된다

 

 

 

까베스땅(Cabestan) 매듭
까베스통 매듭
두 고리를 하나의 고리로 합치는 것인데, 마치 창문을 열듯 서로 겹쳐지게 하면 까베스땅 매듭이 책갈피를 닫듯 서로 겹쳐지게 하면 반까베스땅 매듭이 된다.

 

이 매듭은 확보점에 로프를 고정시킬때, 자기 확보 및 후등자 확보시, 짐을 올릴때 등 이용범위가 넓고 조작도 간단하며 매듭을 조정하기가 쉽다.

 

또 자기확보줄이 거추장스러워 안전벨트에 연결된 주자일로 직접 자기확보를 할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 매듭은 양쪽 중 어느쪽 줄을 잡아당겨도 반대쪽 줄이 딸려오지 않는다. 등반 도중에 사용되기도 하므로 한손으로 할수 있도록 숙달시켜야 한다. 클로브 히치 매듭(Clove hitch knot )이라고도 한다.

 

 

 

반 까베스땅 매듭
반까베스통
카라비너에서 쉽게 자일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추락제동용 매듭으로 적은 힘으로도 제동이 잘 된다


뮌터 히치(Munter hitch) 매듭, 또는 하프 크로브 히치 매듭(Half Clove hitch knot)이라고도 한다. 상대방 (특히 후등자)의 확보를 볼 때 많이 사용하며, 이중 자일(두 가닥) 사용시에는 사용할 수 없다. UIAAUIAAUU 에UIAA에서 공인된 확보용 매듭이다.

 

 

터벅 매듭(Tarbuck knot)
줄을 팽팽하게 당겨맬 때 쓰는 매듭이다. 줄의 길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잇점이 있어 자기 확보줄에도 사용하고 버팀줄을 맬때, 현수막을 달때 말고도 많은 곳에 쓸 수 있다.

 

 

 

 

 

 

 

오버핸드 슬립 매듭. 프로스트매듭
나무나 하켄과 같은 확보물에 거는 매듭이다.


 

 

 

 

거스 히치(Girth hitch) 매듭
이 매듭은 나무에 연결줄을 두를 때나 슬링을 안전벨트 걸이에 걸 때, 슬링 두 개를 길게 이을 때와 같이 여러 용도로 많이 쓰이고 있다.


 

 

 

암벽.등반 장비 소개

 

등반장비는 생명과 직결되는데, 선택방법이나 이용법, 사용효과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장비들로는 자일( 로프), 안전벨트, 암벽화, 카라비너, 퀵드로, 하강기, 슬링, 초크, 등이 있으며, 낙석이나 추락시에 대비하여 헬멧도 필수적이다.


이외에도 암벽등반 대상지의 각종 등반조건에 따라 좀더 많고 다양한 장비들이 필요하다. 또한 복장은 일반 산행 때와 같이 움직임에 편한 것이면 무난하다.

 

 

 

자일(Seil, Rope, Code)

자일은 등반자의 추락을 잡아 주거나 하강할 때 사용된다. 굵기와 길이에 따라 그 사용범위가 다른데 대체로 10∼11mm 굵기에 40∼50m 길이의 자일을 많이 사용한다. 등반용 자일은 그 굵기가 8∼12mm 까지 여러 가지며 길이는 40∼100m인 것을 쓴다. 등반자의 등반양식, 암벽의 길이, 목적 등에 알맞은 굵기와 길이를 골라 써야 한다.

 

 


자일은 방수가 되는 것과 방수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특히, 방수 처리된 자일은 빙벽 등반과 우천시 유리하지만 암벽등반에서는 굳이 비싼 방수용 자일을 사용할 필요는 없으며, UIAA 공인을 받은 제품을 쓰도록 한다.

 

 


한 줄(single rope) 등반시엔 10.5mm와 11mm를 많이 쓰고 있지만 10mm나 12mm를 쓰기도 한다. 두 줄(double rope) 등반시에는 8mm, 8.5mm나 9mm를 많이 쓰고 길이는 80∼100m를 많이 쓴다. 두 줄을 겹쳐서 한 줄처럼 쓰면 11mm 한 줄을 사용할 때보다 자일 유통이 잘되며, 추락에도 더 안전하다. 자일의 종류에는 꼰 것(마닐라삼), 짠 것(나일론, 케른망틀 구조) 등이 있다.


자일 관리하는 법
자일은 생명과 연관되는 것이므로 소중이 다루어야 한다. 우선 자일을 밟아선 안 된다. 자일을 밟으면 흙과 먼지 같은 입자가 껍질을 통해 들어가 마찰을 일으켜 강도가 약해지는 탓도 있지만, 밟고 미끄러질 확률이 높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새내기 때 모르고 밟았다가 선배에게 죽도록 혼난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자일을 쓰고 난 뒤에는 항상 자일을 점검하고 청소를 하여야 한다. 수명도 사용기간과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 할 때보다 경사가 급한 곳, 다시 말해 추락횟수가 많았던 자일은 자주 교체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일이 충격을 자주 받으면 인장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자일을 교체하려 해도 사용 기간이나 사용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기란 어렵다. 새 자일은 대체로 부드러운데 반해 많이 사용하다 보면 매듭할 때 뻣뻣함을 느낄 수 있다. 또 색깔이 많이 변색되었거나 외피가 손상되었거나 부푸러기가 많이 일어난 자일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일을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잘 사려 놓아야 다음에 사용할 때 꼬이지 않고 쓸 수 있다. 양팔을 이용해 일정한 길이로 접은 다음 로프의 끝을 이용해 여러번 감아 고정시키고 매듭을 지으면 된다. 장기간 보관할 때는 매듭을 풀어놓는 게 좋다. 자일 사리기에는 나비 사리기, 둥글게 사리기, 8자 사리기 등이 있으나 꼬임 방지나 자일의 보관상 나비 사리기를 주로 하는 편이다.

 


자일사리기

 

자일의 기능
인장강도 1800∼2000 Kg, UIAA(국제산악연맹) 충격계수 5회 이상일 것:
UIAA 충격 테스트는 2.8m의 줄 끝에 80Kg의 추를 달아 2.5m 위로 올렸다가 5m를 자유낙하시켰을 때 5회 이상 견디면 등반용 자일로 공인한다.

  • 충격흡수능력이 좋을 것:
    80Kg의 추를 달아 떨어뜨렸을 때 6∼9% 늘어나는 것이 적당하다.

  • 표면처리:
    실리콘액 코팅이 되어있는 줄은 방수기능이 있고, 암각에서 내마모성이 30%이상 증진하며, 자외선을 차단한다.

사용상 주의사항
1. 절대 밟지 말것.
2. 불필요하게 햇빛에 노출시키지 말것.
3. 화기(담뱃불 등)와 부식액(배터리액 등)의 접촉을 피할 것.
4. 땅바닥이나 바위에 던지지 말 것. 줄에 흙먼지가 많이 끼었으면 세탁후 깨끗한 바닥에 펼쳐 널어 말릴 것.
5. 손상된 부분이 없는지 수시로 점검할 것.

폐기해야 될 경우
1. 낙석에 맞았거나 아이젠에 밟혔을 때.
2. 암각에 손상을 입었을 때.
3. 마모로 인해 자일의 외피가 벗겨졌을 때.
4. 화기나 배터리액, 산 등으로 손상을 입었을 때.
5. 심한 추락 때문에 속심이 늘어났을 때

 

 

카라비너(Karabiner)

변D형 캬라비너 각종 장비 뿐만 아니라 자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금속고리로서 등반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며, 개폐장치가 있어 자일을 쉽게 통과시키거나 꺼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등반 도중에는 자일을 묶거나 걸거나 푸는 행위를 두 손으로 할수가 없으므로 카라비너를 사용하여 한손으로 처리한다. 개폐구는 스프링에 의해 항상 닫힌 상태를 유지하며, 절대 열리지 않도록 잠금장치를 한 링 카라비너도 있다.
자일을 끼워 넣기 쉽도록 입구를 넓게 만들고 개폐 확보물은 등반자를 암벽에 고정시키는 지지점이 되고, 추락시 추락거리를 최소화시키는 수단도 된다. 종류로는 잠금(안전, 링)카라비너, O형, D형, 변형D형, 특수용도 카라비너 등이 있다.

링 캬라비너 

 

사용상 주의사항
1. 항상 긴 쪽이 힘을 받도록 한다.
2. 여닫는 곳이 힘을 받아서는 절대 안 된다.
3. 여닫는 곳이 열려있으면 긴 쪽으로 힘을 받더라도 강도는 크게 약해진다.
4. 여닫는 곳은 항상 부드럽게 움직여야 하고, 힘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열 수 있어야 한다.
5. 여닫는 곳이 뻑뻑하거나 더러우면 기름칠을 한 다음, 끓는 물에 넣어 기름을 제거한다.
6. 높은 곳에서 떨어진 카라비너는 눈에 보이지 않은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므로 쓰지 않도록 한다.
7. 등반중 루트에 걸려있는 카라비너나 바위 아래에서 주운 카라비너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슬링(sling, runner)

테이프 슬링 슬링은 등반장비 중 가장 많이 쓰이는 편이다.
일종의 등반용 잡끈인 슬링은 사소한 것 같지만 등반에 많은 도움을 준다.
자신의 확보줄이나 장비들을 서로 연결할 때 주로 사용하며, 어깨에 걸칠 수 있도록 만들어 휴대하고 등반하면서 암각이나 나무에 설치하여 좋은 확보지점을 만들거나 중요한 연결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쓴다.
이외에 유동 확보물들을 설치하여 확보지점으로 사용할 때나 하강시 각 확보물에 힘이 균등하게 가해질 수 있도록 하는데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요즘은 박음질을 한 슬링도 많이 나와 있으므로 취향에 따라 사용한다.

 

 

퀵드로(Quick draw)

퀵드로는 테이프 슬링을 박음질하여 앞뒤로 카라비너를 걸어 자일의 설치와 유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개량한 것이다.
등반시 자일의 꺾임을 원활하게 할 수 있으며 중간 확보물 설치시 편리하다.
퀵드로 역시 카라비너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데, 2개의 카라비너를 15∼30cm 정도의 테이프 슬링(넓적한 끈)으로 연결해 놓으므로써 활용도를 극대화한 것이다.
주로 선등자가 등반하면서 확보지점마다 설치하면서 한쪽 카라비너는 확보물에 걸고 다른쪽 카라비너에는 자일을 통과시켜 둔다.
그 결과 자일은 슬링의 길이만큼 확보점으로부터 여유로워지므로 자일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추락시 추락거리를 줄여준다.


하강기(Descender)


8자하강기 8자 하강기

로보트하강기로보트하강기

스톱 디센드

페츨사의 그리그리그리그리

 

 

 

 

 

 

 

 

 

션츠션츠

하강시 필요한 장비이지만 선등자나 후등자를 확보할 때 확보기로도 중요하게 쓰인다.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하강기는 8자형이다.
무거운 것이 흠이지만 안전하고 편리하여 초보자에게 알맞은 장비다.
자신의 등반 실력이 향상되어 어려운 루트를 오르게 된다면 무게 절감을 위해 가벼운 튜브형 하강기를 선택해도 좋다.


그러나 튜브형은 조작이 약간 불편하고 카라비너에 로프가 마찰되기 때문에 마찰열에 의해 카라비너의 강도가 떨어지게 되므로 자칫 파열될 우려가 있어 경험이 필요하다.
그 밖에도 로보트 하강기,브레이크 바,그리그리, 튜브형 하강기등이 있다.

 

 

등강기(Ascender)

 

 


쥬마베이직 고정자일을 타고 올라갈 때, 짐을 올릴 때, 확보를 볼 때, 구조중일 때 등에 쓰인다.
흔히 쥬마라고 부른다.
쥬마(Jumar)와 션트(Shunt) 등이 있다.

(* 쥬마는 페즐회사에서 만든 등강기의 이름이다)




암벽화

암벽화 암벽화는 등산화와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밑창은 마찰력이 강한 탄력성이 있는 고무창으로 되어 있다. 바위 모양이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용도의 암벽화가 있다.

 

국산제품도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암벽화는 암벽의 형태에 따라 기능이 서로 다른 것을 선택한다. 슬랩등반처럼 마찰력이 주로 요구되는 곳에서는 부드러운 창을 가진 암벽화가 좋다.

 

물론 부드러운 암벽화도 발에 너무 꼭 맞게 신으면 슬랩등반에서는 어색해진다. 맨발이나 혹은 얇은 양말 한 켤레를 신고 발가락이 펴진 편한 상태에서 꼭 맞는 것이 좋다.

수직벽이나 오버행에서는 홀드의 모양에 따라 선택하되 가급적 창이 단단한 것이 유리하다. 즉 홀드의 돌기가 손끝 정도만 걸리는 각진 것이라면 뻣뻣한 암벽화가 좋으며 이것도 발에 꼭 맞게 신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부드러운 암벽화일지라도 발가락이 약간 굽어질 정도로 꼭 맞게 신으면 작은 홀드에서 효과적일 수 있다. 뻣뻣한 것은 발끝의 촉감이 부드러운 것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쉬운 루트보다는 고난도 루트에서 암벽화 발끝으로 느끼는 감촉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안전벨트(safe belt)

안전벨트 안전벨트(하네스)는 추락하는 등반자의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골고루 분산시켜 부상을 막기 위한 장비다.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최근엔 어깨까지 채워주는 벨트보단 허리와 허벅지만 죄는 벨트를 많이 쓴다.

 

안전벨트는 일반용, 겨울용, 자유등반용, 경기등반용으로 나눌 수 있다. 겨울용은 오랫동안 써도 강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고, 허리 벨트와 다리 고리가 두꺼워서 오랜 시간 매달려도 편하도록 제작되어 있다. 자유 등반용과 경기 등반용은 가볍고 부피가 작다.

 

안전벨트는 조작이 간단한 것이 좋다. 또한 가격이 비싼 것보다는 자신의 체격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경기등반용 같은 가냘픈 것을 사용하거나 체중이 적게 나가는 사람이 투박한 것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안전벨트라고 해서 다 안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체격과 체중에 맞게 웨빙(띠)의 너비나 바느질의 상태를 보고 또한 등반성에 맞는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안전벨트는 허리와 허벅지 치수가 잘 맞는 것이 좋다. 안전벨트는 강도와 내구성이 뛰어난 편이지만, 가볍게 만들어진 요즘의 제품은 3∼5년이 지나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헬멧(Helmet)

낙석이나 낙빙, 그리고 추락시 머리를 보호하는 용구다.
그러나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착용시의 불편함과 멋을 내기위해 쓰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잘못된 습관이다.
등반중 언제 낙석에 맞을 지 모르는 일이므로 등반 준비를 할 때부터 등반이 끝날 때까지 꼭 써야 한다.
헬멧 역시 UIAA 공인제품이 믿을 만하다.




너트(Nut)
헥센트릭
스토퍼 크랙에 집어넣어 지지력을 얻는 확보물이다.
크랙 등반시 많이 이용되며 설치와 회수가 용이하다.
크랙의 모양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제품이 있다.
마이크로너트는 일반 너트를 사용할 수 없는 미세한 크랙에 사용한다. 모양이나 구조에 따라 스토퍼,핵샌트릭,웻지,새들웻지,록,등 으로구분한다


프렌드(Friend)

1978년 Ray Jardine이 발명한 크랙 속에 끼워 넣어 양쪽 날개가 벌어지면서 지지력을 얻는 확보물 이다.
미세한 크랙에 사용되는 것부터 주먹보다 큰 대형 사이즈까지 다양하다.

 

 

 

 


T C U

 

 

 

 

 

TCU(Tri Cam Unit); 캠이 3개로 된 프렌드 이다..

트라이 캠

 

 

 

 

 

 

트라이 캠(Try cam);
캠모양의 쇄기를 회전력을 이용하여 확보하는장비.

얼음과 바위가 혼합된 곳에서도 사용가능하다.

빅 브로우(Big bro);
아주 넓은 크랙에 사용한다

 

 

 

 

 

 

 

 

로우볼(Lowe ball);프렌드나 너트를 사용할 수 없는 미세한 크랙에 넣어 확보물로 사용한다.

 

 

 

 

 

 

 

 

러프(RURP);작고 가느다란 틈새에 끼워서 손도끼처럼 생겼고, 크기는 우표 만하다
.

 

 

 

 

 

 

 

버드 피크
러프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러프보다 길이가 길고 걸거나 빼기가 쉽다. (크레킹업에서 한쪽 날개가 없다)






크래킹 업(crack'n-up)

크레킹 업피톤, 스카이 훅, 캠의 좋은 점을 따서 만든 것으로 가느다란 바위 틈새에서 쓰기 좋다.

 

 

 

 

 

 

코퍼 헤드(copper head)
카퍼헤드
하켄이나 프렌드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벙어리형 부분에 대고 해머로 두들기면 바위 모양새에 따라 파고 들어간다. 즉 연한 금속 재질로 되어 있어 변형되면서 파고 들어간다.

 

 

서클 헤드(circle head)
서클헤드
철선이 고리 모양을 만들면서 한 개 이상의 구리 형철이 달려 있는데, 코퍼헤드처럼 구리 형철을 바위에 찌그러뜨리면서 때려 박는다.


 

 

 

하켄(Haken)
나이프.앵글하켄
로스트 애로우나이프 하켄
크랙 속에 넣어 해머로 두들겨 박아서 확보물로 사용한다.
나이프 하켄, 앵글 하켄 등이 있다.



봉봉 보통 하켄을 설치할 수 없는 넓은 크랙에 박아서 사용하는 하켄이다.

볼트(Bolt)
반반한 바위면에 인공적으로 구멍을 뚫고 쐐기용 볼트를 때려 박아 추락 방지 및 자기확보 지점을 만들어 주는 도구.


점핑세트;
볼트를 설치하기위하여 바위에 구멍을 뚫는 기구
자세히보기(Click)

 

 

 

 

 

 

 

스카이 훅 ; 크랙 속에 끼워 넣어 사용하거나 큰 홀드나 미세한 돌기 부분에 걸어 지지력을 얻는
다.

 

 

 

 

 

 

 

 

 

 


타일론

 

 

 

 

 

 

 

 

 

 

타일론;여러종류의 훅을 한 개로 만든것

 

 

 

 

 

 

 

 

피피;자기 확보줄에 연결한 카라비너와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인공 확보물에 빠르고 쉽게 걸거나 뺄 수 있어 더 편할 때가 있다. 잠금 장치가 없으므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도르래;
짐을 끌어올릴 때 로프를 걸어 사용하며 제동장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에뜨리에(레다);수직벽이나 오버행의 인공등반, 홀링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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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월식 붉은 달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이 시작되었다

개기월식은 지구가 달과 태양 사이에 위치해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질 때 발생하는 현상으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지난 2011년 이후 3년 만이다.

 

614분에 달이 지구 그림자에 일부 가려지는 부분식이 시작돼,

개기월식은 724분부터 한 시간 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754분경 절정에 달했다가 밤 934분에 부분식이,

1035분에는 반영식이 끝나면서 월식은 완전히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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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관련 사진
 우두산 산 비탈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나무들.
ⓒ 성낙선

 

봄기운이 완연하다. 춘천에도 봄빛이 무르익고 있다.

봄이 당도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봄비가 한두 차례 더 내리고 나면,

곧 이어서 세상이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일 게 분명하다.

춘천의 호숫가는 물론이고, '공지천'처럼 춘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변에도 푸른빛이 점점 더 짙어지는 걸 볼 수 있다.

황사와 미세먼지 탓에 늘 뿌옇기만 하던 하늘이 오래간만에 밝은 빛을 띠고 있다.

한동안 기세 좋게 휘몰아치던 꽃샘추위도 지금은 그 기운이 한풀 꺾인 듯하다.

이런 날 춘곤증에 시달리며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봄맞이 여행으로, 춘천의 '진산'으로 불리고 있는 산들인 '우두산'과 '봉의산'에 올랐다.

어느 산이 '진산'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두산은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부족국가인 '맥국'의 도읍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산이다.

지금은 소양강 변의 작고 낮은 산으로 남아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춘천에 살면서 춘천이 연면히 이어온 역사를 오래도록 탐색해온 사람들에겐

그 어느 산보다도 중요한 산 중에 하나다.

지금도 맥국의 존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종종 이 산을 찾곤 한다.

역사 속 고대부족국가는 이미 오랜 전에 사라졌지만, '빛나던 과거'는 좀처럼 잊히지 않고 있다.

봉의산은 춘천 시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치 세상의 중심처럼 군림하는 산이다.

춘천 시내 동서남북 어디에서든 고개를 조금만 올려다봐도

금방 눈에 들어오는 산이 이 산이다.

 

 

 

 

산은 결코 높지 않다.

 그렇지만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 까닭에, 때로 춘천시 외곽에 포진해 있는 산들보다 더 높아 보일 때도 있다.

한 도시의 중심이라고 해서, 봉의산이 마냥 왕 노릇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봉의산처럼 친숙해지기 쉬운 산도 없기 때문이다.

점심나절, 산책 삼아 잠깐 걸어 올랐다가 다시 내려올 수 있는 산이 또 봉의산이다.

 

 

 기사 관련 사진

 점심 시간, 우두산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우두산] '천제'를 지내던 과거는 사라지고, 전쟁의 상흔만 남아

 

 

우두산은 겉보기에 매우 평범해 보이는 산이다. 이름만 그런 게 아니다.

산 형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산은 한때 꽤 큰 영광을 누렸던 고대부족국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산이다.

하지만 겉만 봐선, 그런 과거를 알 수 없다. 산이 꼭 '동네 뒷산'이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산이 낮고 작다. 한눈에 봐도 산 높이가 길가 도로가 있는 위치에서 100여 미터를 넘지 않은 걸 알 수 있다(해발 133미터).

 높이만 놓고 봤을 땐 산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주위를 조금만 더 둘러보면 어딘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두산의 한쪽 사면은 절벽에 가깝다. 그 아래로 소양강이 소리 없이 흐른다.

그리고 그 반대편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강원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우두평야가 펼쳐져 있다. 강과 평야가 있고, 그 한가운데 우두산이 서 있는 형태다.

기사 관련 사진
 우두평야에서 바라다본 우두산. 산 정상 가운데 하얀 점이 충렬탑.
ⓒ 성낙선

 


우두산에서는 강과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두산은 어딘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는 산임에 틀림이 없다. 

우두산은 또 군사적으로도 꽤 유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우두산이 상당히 중요한 산이었다는 사실은 정작 그 이름에 숨어 있다.

우두산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깊은 속뜻을 지녔다. 우두산 곧 '소머리산'이라는 이름 속에,

이 산이 왜 중요한 산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주는 숨은 뜻이 있다.

 우두산은 옛날에는 '소슬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소슬뫼는 가축의 하나인 '소'와 '신성하다'는 뜻의 '슬'자가 모여서 된 말이다.

그러니까 소슬뫼인 우두산은 오래 전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신성한 동물인 소를 희생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매우 신성한 곳이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춘천의 향토사학자들은 '소슬뫼'를 두고, 소양강의 옛말인 '원아리'와 함께,

이곳에 고대 부족국가인 맥국의 도읍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지명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옛날 고대부족국가들의 도읍지에는 모두 원아리와 같이

 '근본이 되는 강'과 소슬뫼 같이 천제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가 있었다.

 향토사학자들이 원아리와 소슬뫼를 예사롭게 보지 않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소슬뫼가 나중에는 그 이름이 간직한 의미가 잊히면서 생뚱맞게 소머리산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한자어인 우두산으로 굳어지는 험한 과정을 거쳤다.

이곳은 또 한국전쟁 당시 아군과 적군이 매우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한국전쟁 초기 전선에서 유일하게 승전보를 울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과 연합군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 당시 국군이 세운 공적이 우두산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다.

우두산 정상에는 그때 이곳에서 산화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충렬탑'을 세웠다.

한국전쟁을 치른 탓에 이 산이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영광은 더욱 더 빠르게 사라졌을 것이다.

고대국가가 존재했던 역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전쟁이 남긴 상처뿐인 역사가 몇 개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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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두산 정상, 충렬탑.

 

[봉의산] 선정비들 사이에 함께 서 있는 '친일파 이범익' 불망비


기사 관련 사진
 소양정.
ⓒ 성낙선

 

 

 

 

 

 

 

 

 

 

 

 

 

 

 

 

 

 

우두산이 춘천에서 비교적 먼 과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면,

봉의산은 그보다는 훨씬 더 가까운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봉의산은 또 최근의 역사부터 현재 춘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까지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봉의산은 그만큼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춘천 시민들에게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이다.

봉의산을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다. 크게는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소양강변에 있는 비석군에서 시작해 소양정 쪽으로 오르는 길이고, 또 하나는 한림대 쪽에서 오르는 길이다.

소양정 쪽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한림대 쪽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등산을 하는 기분을 맛보고 싶다면 소양정 쪽에서, 단순히 산책을 즐기고 싶은 생각이라면 한림대 쪽에서 오르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개중에는 두 가지 경험을 한꺼번에 맛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땐, 소양정 쪽에서 시작해, 한림대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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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소양강변 봉의산 자락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비석군.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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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지사 이범익 불망비와 친일파 이범익 단죄 안내판.
ⓒ 성낙선

 


소양정을 오르기 전에 등산로 입구에 비석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낡고 오래된 비석들이 줄맞춰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비석들은 춘천시 내 곳곳에 산재해 있던 공덕비나 불망비 같은 선정비들로,

도시 개발에 밀려나면서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그저 그런 공덕비들이려니 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 비석들 중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비석이 하나 있다.

두 줄로 서 있는 비석들 맨 뒤에 '강원도지사 이범익 불망비'와 함께 '친일파 이범익 단죄문'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범익은 일제강점기에 도지사와 만주국 젠다오성 성장을 지낸 인물이다.

젠다오성 성장으로 있을 때, 간도특설대를 창설해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뜻있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불망비 옆에 단죄문이 적힌 안내판을 세웠다.

 

 

소양정으로 오르는 길, 절벽 위에 앞서 본 선정비들만큼이나 낡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춘천절기 전계심 묘비'이다.

 전계심은 춘천의 관기로서, 한 남자를 향해 끝까지 절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묘비는 전계심의 절개를 가상히 여긴 춘천의 선비들이 세웠다.

사연이 애틋하다. 묘비는 원래 봉의산 산자락 소양간변에 있었다. 그곳에 도로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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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관기 전계심 묘비.  

 

 

봉의산 정상을 오르는 동안, 틈틈이 뒤를 돌아다본다.  

산 아래로 소양강이 보이고 그 너머로 멀리 우두산도 보인다.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두 산이 영욕을 달리 하고 있다.

 

봉의산 정상에서는 소양강과 북한강을 비롯해, 춘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밀조밀한 집과 도로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춘천을 흔히 호반의 도시라고 부른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춘천하면 먼저 호수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춘천은 호수가 전부인 도시는 아니다.

 

봉의산 정상에 올라서면, 춘천이 '산'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라는 걸 알 수 있다.

봉의산은 그만큼 깊은 역사와 많은 사람들의 삶을 품어 안은 산이다.

우두산과 봉의산은 지금, '산동백나무'로도 불리는 '생강나무'들이 앞다퉈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노랗게 꽃을 피운 생강나무들이 산비탈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산 밑에서는 봄꽃을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우두산과 봉의산을 오르고 나서야 봄꽃을 보게 됐다.

춘천에서는 생강나무 꽃이 봄의 전령사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래는 3월 17일 낮에 본, 춘천의 봄 풍경이다.

기사 관련 사진
 봉의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소양강.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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