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족이 온전히 사랑하는 길... 지독히 낭만적이네
소양호 둘레길, 추곡약수터에서 박수근미술관까지
▲ 수변도로에서 내려다 본 소양호. | |
ⓒ 성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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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촉촉이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온 뒤에는 날이 더 추워진단다.
가을이 왔나 싶었는데 어느새 겨울에 대비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
강원도 대관령에 서리가 내리고, 산간에는 더러 얼음이 얼기도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17일(수), 비는 오전 10시 무렵이 돼서야 잦아들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한 시간가량 더 늦어지고 있다. 너무 늦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가을비는 여름비와 달리 싸늘한 느낌이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야 할 판이다.
▲ 추곡약수터. 철분 성분이 있어 검붉은 색을 띠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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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탓인지, '추곡약수터'엔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추곡약수터는 오색약수처럼 톡 쏘는 약수 맛에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다.
약수터 올라가는 길,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 바람결에 머리 위로 다 익은 밤송이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땅바닥에는 비에 젖은 낙엽과 지나가는 차바퀴에 밟혀 으깨진 알밤이 지천이다.
이제 이런 산밤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모양이다. 누군가 성한 알밤 몇 개를 길가 담장 위에 올려놨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산마루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세상이 온통 검은빛 투성이다. 길도 검고 산도 검다.
그래도 산비탈을 물들이는 가을빛을 모두 감출 수 없었던지 산비탈 위로 여기저기 노랗고 붉은빛이 감도는 걸 볼 수 있다.
여행은 추곡약수터에서 시작해, 소양호 둘레길을 따라 양구 박수근 미술관까지 달려가는 걸로 정했다.
길을 가는 내내, 발아래로 소양호가 내려다보인다. 소양호는 이맘때가 가장 아름답다. 소양호가 가을빛으로 물드는 광경이 장관이다.
▲ 수변도로로 들어서기 전, 갑자기 나타낸 불청객을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던 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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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가고 오는 사람만 바뀔 뿐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빗줄기가 가랑비로 잦아들 무렵, 자전거에 올라탄다.
얼마 안 가 추곡삼거리(말이 삼거리지 그냥 세 갈래로 갈라진 길에 불과하다)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길로 방향을 잡는다.
이 길이 '소양호 수변도로(둘레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수변도로라는 말에 알 수 있듯이, 호숫가를 따라 난 길이다.
그 옛날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길을 닦는데, 첩첩산중 가로막는 사명산(1199m) 산줄기를 피해 가야 하는 까닭에 호숫가로 길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이 길은 양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 소양호 수변도로, 비에 젖은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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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호숫가를 따라 이리저리 정신없이 굽어 돈다.
길이 소양호를 따라 얼마나 심하게 굽어 돌던지, 옛날 이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 차멀미를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다.
겨울엔 도로 곳곳이 얼어붙어 교통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 수인터널로 들어서기 직전의 46번 국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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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7여 년 전, 호숫가 사명산 산줄기를 꿰뚫고 지나가는 터널이 뚫렸다.
이 터널이 뚫리면서 춘천에서 양구를 오가는 시간이 1시간 40분에서 40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 바람에 이 도로는 지금 차 몇 대 지나다니지 않는 '버려진' 길로 남았다.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을 지나다니는 차들로 호황을 누렸던 상점과 휴게소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완전히 버려진 줄 알았던 이 길이 요즘에 와서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자전거 타기 좋아하고 걷는 일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이 길이 가진 가치를 재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 길은 주로 자전거족들과 오토바이족들과 등산객들이 이용한다.
그 중에 이 길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부류가 자전거족들이다.
등산객들은 사명산 등산을 위해 이 길을 일부 구간만 이용할 뿐이고,
오토바이족들은 이 길을 자동차들만큼이나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 아무래도 이 길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부류는 자전거족들이다.
이 길이 자전거족들을 불러들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스팔트길에, 호수를 끼고 달리는 산길이 오로지 자전거를 타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호숫가 둘레길치고는 언덕도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이 길은 또 지독히 낭만적이다. 굽이 도는 길마다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굽잇길이라고 다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그 옛날 누군가에겐 생각만 해도 속이 다 울렁거리는 '고생길'이었을 이 길이
지금 누군가에게는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즐겁고 아름다운 '여행길'이 돼 가고 있다.
이 길이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춘천과 양구 경계선. 앞에 보이는 건물은 지금은 문을 닫은 농특산물판매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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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여 만에 다시 열린 물길, 소양호를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
▲ 잡초로 뒤덮이기 시작하는 도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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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가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길가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잡초들이 사람 키만큼이나 높이 솟아 있다.
이대로 놔두면, 아스팔트 전체가 풀과 나무로 덮여 버릴지도 모른다.
보기에 따라 조금은 삭막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들이 사라진 길에서는 이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길을 나선 지 얼마 안 돼 날이 개면서 서서히 태양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구름이 걷힌 산 위로 노란빛을 띠고 있던 나뭇잎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눈이 부신 게 그 황금빛 때문이지 태양 빛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심지어 길 아래 소양호 검푸른 물마저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 도로변 절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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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 둘레길은 무언가 살아서 기어 다니는 걸 찾아보기 힘든 길이다.
그런 길 위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초록색 뱀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차바퀴에 깔려 바싹 말라버린 뱀 껍질만 보아오던 터에 살아 있는 뱀이라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 소양호 꼬부랑 옛길에서 보게 되는 조형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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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드문 탓에 사람마저 드물다.
그렇다고 이 길에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로 아래로, 호숫가에 바짝 기대 사는 집들이 꽤 있다.
호숫가에서 밭을 일구거나 물고기를 잡으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집들이다.
그곳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영업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몇몇 휴게소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
그중에 사명산쉼터 한 군데만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사명산쉼터는 그나마 등산객들이 오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어 사람들이 비교적 자주 찾아오는 편이다.
주인 말이, 아직은 살아갈 만하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이 적어 하루하루가 심심한 건 피할 수 없다.
▲ 양구 선착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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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 양구 선착장에서 한 무리의 자전거족들과 마주쳤다.
이들은 어제 춘천에서 출발해 화천 평화의댐과 양구 두타연을 거쳐 오늘 이곳 선착장에 도착했단다.
이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다시 춘천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이곳 선착장에서는 소양강댐으로 하루 3번(주말엔 4번) 배가 오간다.
이곳을 오가는 배(이름은 '쾌룡호'다)는 지난 7월초, 4년 6개월 만에 다시 운행을 재개했다.
물길이 무려 27km다. 그 옛날 이 뱃길을 이용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겐 추억이 남다를 것 같다.
배가 도착하면서, 잔잔한 소양호만큼이나 조용하던 선착장이 갑자기 활기가 띠기 시작한다.
지금 이곳 선착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호수 위에서 바라보는 가을 소양호는 또 어떤 풍경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 박수근미술관 앞 주택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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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근미술관 자작나무숲 빨래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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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 선착장에서 박수근 미술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미술관에는 그 사이 못 보던 풍경 하나가 더 늘었다. 자작나무숲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박수근 화백'은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영혼이 깃든 미술관을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든 게 그가 그린 그림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추곡약수터에서 박수근미술관까지 40km가 넘는다. 길은 전체적으로 인적이 매우 드물다.
때에 따라 으스스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여행할 때는 여럿이 함께 어울려 가는 것이 좋다.
중간에 웅진교차로 부근에서 호숫가쪽에 붙은 길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터널을 지나가야 하는 불상사를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차가 거의 다니지 않지만, 굽이가 심해 사고가 날 위험성이 아주 없는 게 아니다.
이 길에도 자동차 사고 흔적이 남아 있다.
아마 굽잇길을 돌던 차들이 상대방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서로 추돌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길은 춘천 지역과 양구 지역을 넘나든다. 양구 지역에서는 이 길을
도보여행길이자 자전거여행길로 만들기 위해 꽤 애를 쓰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양구 지역에서는 여행이 좀 더 편안하고 쾌적한 느낌이다.
양구에서는 이 길을 '소양강 꼬부랑 옛길'이라고 부른다.
▲ 박수근미술관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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