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不變)이다. 사계절의 변화를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이치에 따라야 한다. 물이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살 수도 없다. 샘물이든, 강물이든 물에 기대 살아야 한다. 물이 풍부한 마을은 먹고 살만 했다. 사람들의 인심도 상대적으로 넉넉했다.
옛사람들의 풍류도 물에서 시작됐다. 물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에 누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숲과 물이 있는 자연을 찾아 의지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살고 있다.
화순 둔동마을로 간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그 물이 숲과 한데 어우러져 있다. 숲길과 물길이 이어지고,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수채화 풍경을 연출하는 마을이다. 둔동마을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둔리에 속한다.
둔동마을에 '숲정이'가 있다. 숲정이는 마을 숲, 마을 근처의 숲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숲정이는 1550년께 마을이 형성되면서 동복천을 따라 1000여m에 만들어졌다. 주민들이 울력을 해서 제방을 쌓았다. 제방에 나무도 심었다.
▲ 둔동마을로 오가는 동복천 다리. 낡고 추레한 다리가 가을풍경과 잘 어우러진다.
▲ 동복천과 어우러지는 둔동숲정이.
단풍이 든 나무숲이 물속에 비쳐 더욱 황홀경을 연출한다. 숲정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둔동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다. 그러나 동복천 건너 구암마을에서 그 바위가 보이면 큰 재앙이 닥친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만석꾼 강씨가 뒷산의 바위를 가리려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후 주민들이 함께 심고 가꿔 울창한 숲을 이뤘다는 얘기다.
제방에는 느티나무와 왕버들나무, 팽나무, 서어나무, 상수리나무 등 230여 그루가 늘어서 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다. 전라남도 기념물(제237호)로 지정돼 있다.
숲정이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천변에서 코스모스도 하늘거린다. 김상희의 노래처럼 '향기로운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숲도 보통의 숲이 아니다. 산림청과 생명의숲국민운동본부, 유한킴벌리가 함께 주최한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숲'으로 선정돼 공존상을 받았다. 지난 2002년이었다.
숲정이는 동복천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나무들이 강에 기대 살면서 숲을 이뤘다. 동복천에 비치는 나무와 숲의 그림자도 고즈넉하다. 물 속으로 들어간 파란 가을하늘도 예쁘다. 땅 위의 풍경까지 한 폭의 그림으로 버무려져 더욱 아름답다.
▲ 숲정이로 나온 어르신이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숲정이를 지키며 가꿔 온 어르신들이다.
▲ 가을 둔동숲정이.
마을숲은 사철 아름답지만, 겨울에 더욱 화려한 멋을 뽐낸다. 숲에는 마을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스며 있다. 주민들끼리 엄격한 규약을 만들었다. 썩은 나무일지라도 함부로 베어내지 않기로 했다. 나무가 썩어도 그대로 뒀다. 썩은 나무를 베거나 땔감으로 쓰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무렵, 국군이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려 할 때도 마을사람들이 목숨 걸고 맞섰다. 그렇게 지켜온 나무이고 숲이다. 마을사람들과 늘 함께 해왔다.
고목에서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그윽하다.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그저 그런 숲도 아니다. 마을사람들이 앞장서 지켜온 나무이고, 숲이다. 숲길도 호젓하다. 숲의 향이 기분 좋게 코끝을 간질인다. 숲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한참을 쉬어간다. 차분히 앉아 책을 봐도 좋겠다.
▲ 둔동숲정이에 놓인 나무의자. 그 위에 낙엽이 떨어져 있다.
▲ 둔동마을 풍경.
마을숲을 가꾸며 지켜온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숲정이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도 맑고 깨끗하다. 동복호에서 흘러온 물이다. 물 속에서 버들치, 갈겨니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물은 동복초등학교를 지나 남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나란히 흐른다. 마을사람들의 삶을 촉촉하게 적시며 고달픈 일상을 쓰다듬어 준 물길이다.
오래 전 마을사람들은 물을 담장 안으로 끌어들여 썼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었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도 했다. 지금은 농사용으로 쓴다. 예부터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유용하게 쓰이면서 지금껏 마을주민들과 함께 해온 귀한 물길이다. 지난여름엔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몸도 식혀줬다. 수심이 적당해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로도 맞춤이다. 어른들은 숲에 기대앉아 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철 아름답고 좋은 숲이다. 지금은 단풍이 들어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마을 숲이다.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는 새벽녘에 더욱 환상경을 보여준다. 안개가 자욱하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 난고 김병연 동상. 둔동숲정이 건너편 구암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난고 김병연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던 압해정씨 옛집. 구암마을에 복원돼 있다.
김삿갓도 이 숲과 물이 빚은 풍경에 반해 오래 머물렀다. 김삿갓은 1800년대 초·중반을 살면서 팔도를 방랑했던 난고 김병연을 가리킨다. 그는 숲정이 건너편 구암마을에서 말년을 보냈다. 금강산 유람으로 시작된 그의 팔도유람이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
김삿갓은 57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첫 무덤이 마을에 만들어졌다. 첫 무덤 자리에 표지석과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묘는 몇 년 뒤 강원도 영월로 옮겨갔다. 말년에 그가 살았던 압해 정씨의 종갓집도 복원돼 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던 김삿갓의 방랑과도 엮이는 숲이다. 숲정이 건너편에 삿갓문학동산이 만들어져 있다.
가까운 사평에 임대정원림도 좋다. 철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사애 민주현이 정자를 짓고, 주변에 조성한 숲이다. '물가에서 산을 대한다'는 송나라 주돈이의 시구를 따 '임대정(臨對亭)'으로 이름 붙였다. 봉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사평천과 만나는 지점에 정자가 있고, 주변은 대나무로 숲을 이루고 있다. 정자 아래에는 배롱나무 몇 그루와 연못이 있다. 전통적인 정원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