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천진해변이 최근 너울성파도로 인한 심각한 해안 침식에 노출되며 마을 주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마을 주민과 고성군, 해양수산부 관계자, 그리고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긴급 회의를 열고 침식 문제에 대한 대책을 모색했다.
▲해안도로 옹벽천진해변 연안침식으로 3M 높이의 절벽으로 변했다(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해안침식 대책을 논의하기위해 마을주민과 전문가, 해수부 관계자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8일, 고성군 천진해변에서 해안도로의 옹벽이 3미터 이상 노출되어 심각한 붕괴 위험에 처한 상황이 발생했다. 큰 파도가 밀려오면 해안가에 세워진 전봇대도 바닷속으로 잠길 위기에 놓였다. 또한, 해변에 설치된 시계탑은 너울성 파도가 몰아칠 경우 넘어질 위험이 있는 상황으로, 주민들은 밤잠을 설치고 있다.
"생계와 안전에 큰 위협 되고 있어 빠른 대책 필요"
▲현장조사하는 강원대 해양환경연구소팀3M 이상 절벽으로 변한 해안도로(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시계탑과 포토존해변 중앙에 설치되었던 시설물이 침식으로 쓰러질 위기에 처했다(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해안가 전봇대천진해변 해안가에 세워둔 전봇대가 쓰러질 위험에 처했다(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횟집과 상가들이 설치한 해수관로가 거센 파도에 휩쓸려 해변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해수관로는 강한 물살에 의해 파손되고 흩어져 있으며, 원래의 위치를 벗어난 채 해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로 인해 상가와 횟집은 큰 피해를 입은 상황으로,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더욱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연안침식으로 해수관로가 드러나 있다(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해안 침식으로 인해 일부 해안도로와 주변 시설물이 위태로워졌다. 마을 주민들은 생계와 안전에 큰 위협이 되고 있어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예견된 참사다"라고 관계 기관에 불만을 토로했다.
함홍렬 천진 마을주민은 "연안정비사업을 한다고 잠제(수중 방파제)를 설치했으나 오히려 잠제를 설치하는 바람에 침식만 가속화시킨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김종남 천진어촌계장은 "해안가에 무분별하게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연안침식의 안전지대였던 마을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라며 "침식으로 인해 항구에 배를 정박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즉시 대응... 주민들 안전 보장할 수 있는 방안 적극 모색"
▲연안침식방지를 위해 설치된 잠제(수중방파제) 3기가 설치되어 있다(2025/1/8). ⓒ 진재중관련사진보기
침식 현장을 직접 점검한 관계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즉각적인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김인호 강원대학교 지구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너울성파도가 주는 피해가 예측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현재의 침식은 단기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을 수 있으며, 지속적인 해안선 보호와 적절한 잠제 설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추가적인 침식 방지 작업을 강조했다.
장유비 해수부 동해청 항만건설과 과장은 "전문가들과 함께 침식 방지 및 해안선 복원 작업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며, "즉시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과 어릴 적부터 친했던 이철우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문재인 정부 시절 윤석열의 "사냥개 노릇"을 언급하며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극우 세력의 수괴가 될 것임은 생각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7일 밤과 8일 새벽 사이 페이스북에 극우 세력에 대한 통사적·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들로 인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 교수는 일본제국주의에서 시작된 한국 극우 세력이 해방 뒤에는 제1공화국의 군인과 경찰의 중심을 이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반공을 내세웠다는 점을 짚었다. 반대로 항일 민족주의의 동력은 4.19 혁명과 1987년 민주화로 이어진 역사를 언급했다.
이 교수는 "40년에 걸친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통해 가지게 된 믿음에 취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 세력이 재편성되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한 것 같다"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일본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수정주의 역사 논객들이 등장하자 그들과 싸우는 담론 전선에 참여했지만 그들의 역사해석이 정치적 극우의 권력화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교수는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과잉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정부의 과잉 민족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적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거대 자본을 상대로 한 수사를 위해 진보 이념을 차용했고, 국정농단 수사를 맡아 문재인의 사냥개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문재인 정부가 조성한 반일정서에 발맞춰 강제징용 판결을 옹호하면서, 조심스러워 하는 나에게 눈을 부라렸던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극우세력의 수괴가 될 것임은 생각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2021년 그의 언동에서 진영적 사고와 갈라치기, 그리고 폭력적 기운을 느꼈지만 그의 졸개들이 추진한 홍범도 흉상 제거, 2023년 8.15 경축사를 통해 반대 세력을 공산전체주의로 몰아세우는 담론 전략을 보기 전에는 그가 정신적으로 화융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지 못했다"며 "홍범도 흉상 철거 계획을 꾸짖는 광복회장을 겁박하기 위한 시위대가 우리 집 앞에 와서 연일 고성을 지르는 것을 보면서,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궤변이 정권의 비호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들을 섬기는 자들, 식민지 노예근성을 노멀로 여기는 자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썼다.
이 교수는 "과거의 군중이 물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익숙함에 의해 동원되었다면, 현재의 극우 정치는 초보적 논리와 팩트를 부정하도록 군중을 세뇌하고 선동하는 것을 통해 전개된다"며 "그것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속의 노예가 된 한 개인의 심성과 행태로 문제를 환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극우세력의 역사적 기원 및 통시적 변천과 발전을 되돌아보고, 그들의 행동의 단순한 도구나 매개물이 아닌, 그들의 주체성과 행위를 구성하고 규정하는 물질의 작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글을 맺었다.
이 교수는 윤석열과 어릴 적부터 친했고, 초등학교·대학교 동기 동창이다. 이 교수의 부친인 이종찬 광복회장과 지난 2023년 별세한 윤석열의 부친 윤기중 교수가 친분이 깊어 두 집안이 50년 이상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의 동상 하나쯤은 센트럴파크에 세워질 거라 생각됐지만, 어째 승인이 잘 나지 않았다고 한다.
브라이언트가 워낙 날 선 논객이었던 탓에, 공원 감독관도
그와 척을 지고 있었고 허가를 미룬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 동상이 꼭 센트럴파크에 있을 필요는 없지."
그의 지인들은 곧 꼭 맞는 장소를 찾아냈다.
공립도서관 곁에 새로 조성되는 작은 공원이었다.
센트럴파크뿐 아니라 국립 디자인아카데미, 도서관, 뉴욕 메디컬 컬리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공공시설과 교육기관의 설립에 기여한 브라이언트를 기리기에 좋은 자리였다.
공원도 아예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시민들이 발걸음하기 좋은 아담한 공원, 브라이언트파크(Bryant Park)이다.
▲윌리엄 쿨런 브라이언트 동상공립도서관에서 브라이언트파크를 바라보는 방향으로그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영국 고전주의 문학풍을 벗어나 미국 시의 지평을 연 '미국 시의 아버지'이자 뉴욕을 거점으로한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센트럴파크의 조성 뿐 아니라 공공 교육기관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브라이언트파크는 뉴욕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큰 사랑을 받는 아담한 공원이다. ⓒ 장소영관련사진보기
센트럴파크 조성 캠페인을 벌리며 브라이언트가 했다고 알려진
"이곳에 공원을 짓지 않으면 같은 규모의 정신 병원을 짓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다.
브라이언트의 캠페인에 고무된 뉴욕시는 100만 평(여의도 공원의 15배)이 넘는 땅을 부지로 확보했다.
판자촌과 무허가 채석장, 가축 방목장으로 어지럽던 암벽과 습지의 땅이 약 20년에 걸쳐 정비되었다.
공원 계획 공모전에는 조경가 프레드릭 옴스테드(F. L. Olmsred)와
건축가 칼베르트 벅스(Calvert Vaux)의 'Greensward Plan(녹지 계획)'이 우승을 했다.
처음에는 대비와 대칭을 중요시하는 유럽의 공원을 본 따려고 했단다.
그러나 뉴욕시 당국은 자연 공원 형태를 원했다.
결국 조경가 옴스테드는 계획을 바꿔 뉴저지 각처에서 수목을 나르고,
습지를 야생 동물 보호 구역으로 조성하고, 두 개의 인공 폭포를 설치하고,
숲 사이에 산책로인 파크웨이(Parkway)가 지나는 자연공원을 구축해 냈다.
그러는 사이 건축가 벅스는 36개의 나즈막한 아치형의
예쁜 돌다리들을 놓아 산책로와 마찻길을 이어 나갔다.
가난한 이민자와 자유 노예, 노동자의 삶터를 밀어내고
중산층의 주말 나들이 코스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센트럴파크는 세계 최대 도심 공원이자 미국 최초의 조경 공립 공원으로
맨해튼의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시간이 흐르며 공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피폐해지자,
공원 부지를 줄이고 재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이를 막아선 이가 뉴욕 마피아와의 전면 대결로 유명한 라과디아 시장이었다.
라과디아 시장은 공원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공원 감독관에 임명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악명 높은 도시개발자 로버트 모지스(R. Moses) 였다.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지 않으면 같은 규모의 정신 병원을 짓게 될 것이다."
조경가 옴스테드가 모지스에게 한 경고였다. 모지스는 이 경고를 받아들였다.
대신 공원 내에 스포츠 경기장 및 위락 시설을 대거 설치하고
산책로를 정비해 시민들의 이용률을 대폭 끌어올렸다.
맨해튼과 뉴저지, 롱아일랜드를 관통하는 대형 교각과 교외 순환 고속도로를 밀어붙이듯 건설해
인기와 원성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모지스는, 센트럴파크 내 나지막한 다리들을 눈여겨 본 듯했다.
맨해튼에서 롱아일랜드로 향하는 새로운 고속도로의 교각 높이를 전부 제한하고
돌로 만든 아치형의 운치 있는 교각만 허가했다.
자동차를 소유한 도시의 중산층이 교외 드라이브를 나올 때 최적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란다.
센트럴파크의 확장판인 셈이다. 지금도 '파크웨이'라고 이름 붙여진
롱아일랜드의 고속도로들은 대형 버스나 트럭, 트레일러가 진입할 수 없다.
교각으로 인한 높이 제한 때문이다.
▲롱아일랜드의 '파크웨이'를 가로짓는 낮은 교각맨해튼과 교외를 잇는 고속도로 위를 교차하는 교각의 높이를 제한하고 아치형의 돌로 건축했다. 이때문에 '파크웨이'라 이름붙은 롱아일랜드의 고속도로에는 대형 화물차나 트럭, 버스가 통행할 수 없다. ⓒ 장소영관련사진보기
칼과 자본에 맞선 브라이언트의 펜
브라이언트는 약 50년 동안 <뉴욕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장으로 활동한 뛰어난 논객이었다.
브라이언트의 펜대는 미국 사회 전반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덕분에 <뉴욕 이브닝 포스트>지는 종종 광고주를 잃고 재정에 허덕였다고 한다.
그는 어쩌다 공원 조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지난 2022년, BTS 맴버 뷔가 한 패션잡지 촬영을 위해
매사추세츠 커밍턴의 작은 고택을 방문했다.
윌리엄 브라이언트의 생가다.
매사추세츠에서 브라이언트는 먼저 시인으로 유명해졌다.
아버지 피터 브라이언트는 아들이 15세가 될 무렵, 책상에서
서정성이 뛰어난 시들을 발견하고 출판사로 보냈다.
설마 이런 글이 십 대 소년에게서 나왔겠나 싶어 편집자가 아버지 피터의 이름으로 인쇄했다가
나중에야 사실을 확인하고 인쇄물을 전량 폐기하는 일도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브라이언트는 '미국의 워즈워스'라고 칭송받았으나
곧 다시 '미국 시의 아버지'라는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영국 고전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미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브라이언트의 눈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통상 금지법(Embargo Act, 1807)>에 반박하며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한 그의 풍자시 금지령(The Embargo) (1808)은
출간되자마자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불과 13세였다.
1825년, 브라이언트는 뉴욕으로 이사를 왔다.
그가 매사추세츠를 떠난다는 것은 법률가로서의 안정된 생활과 청교도 후예로서의
종교 전통 그리고 문학가로서 가족의 기대에서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뉴욕은 브라이언트에게
언론인으로 시대 정신을 펼칠 평생의 둥지가 되어 주었다.
브라이언트는 그의 필력으로 소수의 거대 자본가가 움직이는
경제 체제와 맞서고, 연방 정부의 중요성을 외쳤다.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며 노조 결성을 지원하고,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링컨을 지지했고 공화당 창당에도 기여했다.
후일,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우리에게 투표권을(Give us Ballot)>이라는 유
명한 연설 속에 브라이언트의 시 <전장(Battle Field)>을 인용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미국 자유시의 아버지 휘트먼도 그가 영향을 받은 두 사람으로
엘리아스 힉스와 윌리엄 브라이언트를 꼽곤 했다.
힉스는 퀘이커교의 지도자였고, 브라이언트는 미국 유니테리언 종파의 일원이었다.
교리가 뚜렷한 청교도 전통에 비해, 이 두 종교는 교리나 신조가 없다(No Creed).
대신 신의 섭리, 이성, 도덕을 함께 중시하며 욕망이 낳은 제도와 풍토를 배격했다.
그래서 노예제 폐지는 물론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 착취에도 반대했다.
인류애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인문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브라이언트는 꿰뚫어 보고 있었던 셈이다.
나소카운티 예술 박물관 인근의 브라이언트 저택과 묘소
내가 사는 롱아일랜드에는 브라이언트가 말년을 보낸 고택이 있다(The Home of Cedarmere).
50여 년 간의 논객 생활을 마무리하고, 브라이언트는 다시 문학의 세계로 돌아왔다.
맨해튼을 떠나 롱아일랜드 북쪽의 아름답고 잔잔한 해변에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같은 고전을 번역하며 지냈다.
▲브라이언트의 고택롱아일랜드의 아름다운 동네 라슬린에 있는 브라이언트의 저택이다. 미국 시의 아버지이자 언론인이었던 브라이언트는 말년에 고전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힘을 다했다. 주말에는 가이드투어가 가능하며 해변 길을 따라 산책과 피크닉을 할 수 있다. 저택에서 바라다보이는 롱아일랜드의 북쪽 해변이 아름답다. ⓒ 장소영관련사진보기
지금은 2차선 도로가 갈라놓고 있지만, 고택에서 이어지는 자그마한 동산에
그가 지은 게스트 하우스도 아직 서 있다.
브라이언트가 아끼던 유니테리언 목사 듀이 남매를 위한 집(Dewey Cottage)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낀 동산과 목장이었던 넓은 부지는 현재 나소카운티
예술 박물관(Nassau County Museum of art)으로 사용되고 있다.
작은 연못을 낀 자연과 야외 설치 작품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둘레길은
사시사철 주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이다.
▲나소카운티 예술박물관과 듀이코디지언덕 위에 저택을 개조한 나소카운티 예술박물관이 서있다. 주변에는 실외 설치 예술품이 곳곳에 있어 둘레길을 걸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자연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듀이 코티지는 브라이언트가 생전에 아끼던 유니테리언 목사 듀이 남매를 위해 지은 게스트 하우스이다. 나소예술박물관 앞 둘레길이 시작되는 지점 약간 아래쪽에 서있다. 겨울이면 듀이 코티지에서 브라이언트의 고택이 언덕 아래로 보인다. 듀이 코티지에서 바라보이는 롱아일랜드 북쪽 해변이 무척 아름답다. ⓒ 장소영관련사진보기
▲브라이언트 묘소라슬린은 맨해튼 동쪽 롱아일랜드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나소카운티 예술박물관 옆 라슬린묘원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브라이언트의 묘소와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 장소영관련사진보기
브라이언트는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기념식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했다가 그만 낙상사고를 당했다.
그 길로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소천했다.
그와 사랑하는 아내가 잠든 묘소도 박물관 곁에 있다(Roslyn Cemetery).
지구촌이 어지럽고 고통 속에 있다.
참된 지도자도 드물고, 도덕과 상식도 으스러진 듯 보인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용했다는 브라이언트의 시,
전장(Battlefield) 속 한 문장을 되뇌어 본다.
"진리는, 대지에 짓눌려 으스러져도 다시 솟아 오르리라!" (There is something in this universe which justifies William Cullen Bryant in say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