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곧 그림…서예, 현대미술이 되다

[중앙선데이]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서예전 가보니

‘글씨와 그림은 한뿌리다(書畵同源)’. 원나라 문인화가 조맹부의 이 말은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개관 51년 만에 처음으로 서예 전시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의 시각에서 조형미가 뛰어나고 확장성을 갖춘 글씨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의 서도(書道)와 다른 한국의 서예(書藝)를, 300여 작품을 통해 재해석했다”는 것이 윤범모 관장의 설명이다.

1·2세대 서예가들 대표작 한눈에
“서법, 서도 아닌 서예의 재해석”
현대미술적 조형미, 확장성에 초점
유튜브 공개 열흘 만에 3만건 돌파

MMCA 덕수궁관의 이 야심찬 올해 첫 전시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하지만 중국 역병의 창궐로 전시장이 폐쇄되면서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먼저 관람객을 만나야 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공개된 1시간 23분 28초짜리 투어 프로그램은 열흘 만에 조회 수 3만건을 돌파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전시장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출입 기자들에게만 살짝 공개된 전시장은 일필휘지의 기운이 생동하는 예술혼의 각축장이었다.

① 당대 최고의 전각가로 꼽히는 철농 이기우가 대나무에 새긴 ‘장생’. ② 소전 손재형이 1956년 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의 탁본(부분). ③ 일중 김충현이 6종의 국한문체로 쓴 ‘정읍사’(1962). ④ 강병인이 종이에 먹으로 그린 ‘힘센 꽃’.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예가 또 다른 형태의 미술임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시(詩)·서(書)·화(畵)가 하나였던 문인화가 현대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글씨가 그림으로, 조각으로, 전각으로, 도자로 어떻게 확장됐는지, 무엇보다 서예가 고루한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전시를 기획한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1층 첫 전시실로 안내했다. 글과 그림이 어떻게 어울리고 글씨가 어떻게 예술이 됐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프롤로그’ 공간이다. 근원 김용준이 수화 김환기 집에 놀러 왔다가 그려준 수화의 모습과 예서체 글씨, 도둑 쥐들을 향한 분노로 서슬 퍼런 고양이를 그린 월전 장우성의 그림과 시구가 우선 시선을 끈다. 『주역』 64괘 문자의 획을 각기 다른 몸짓을 하고 있는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고암 이응노의 작품은 간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선 귀한 몸이다. 조각가로 알려졌지만 사실 대단한 서예가였던 우성 김종영이 만든 고졸한 나무 조각 역시 단단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① 서예가 청남 오제봉의 아들인 서양화가 오수환은 필획의 찰라적 속성을 자신의 그림에 반영했다. 2008년작 ‘Variation’. ② 먹과 마스킹테이프로 한글을 구현한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해주아리랑’(2012). ③ 하석 박원규가 서주시대 청동 제기에 새겨진 글자 ‘공정(公正)’을 재해석한 2020년작.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2층 두 번째 전시장의 부제는 ‘글씨가 그 사람이다’다. 배 학예사가 골라낸 ‘국전 1세대’ 대표작가 12명은 서로 흥미롭게 연결돼 있었다. 해방 이후 ‘서도’ 대신 ‘서예’라는 명칭을 정착시키고 자신만의 한글 서체를 개발한 소전 손재형은 일본인 소장가를 찾아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돌려 받아온 인물이다. 명량해전을 기리는 노산 이은상의 글을 소전의 글씨로 새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1956) 속 조형미는 지금 보아도 놀랍다. 그런 소전의 글을 두고 “글씨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사람이 여초 김응현이다. 법첩에 근거하지 않은 글씨는 서예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는 광개토태왕 비문의 글씨를 토대로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했다. 실제 비문의 탁본을 임서한 5m 가까운 높이의 4폭 지면(2003)은 관람객을 압도한다.

전각으로 일본에서 더 유명한 석봉 고봉주의 인장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여초의 형은 소전과 함께 제1회 국전을 기획한 일중 김충현이다. 6종의 서체로 쓴 대표작 ‘정읍사’(1962)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의 가치가 있다. 일중이 국한문 혼용서체에 집중했다면, 일생을 한글 궁체에만 매진한 여성 서예가가 갈물 이철경이다. 또한 소전의 제자로 국전 사상 처음 서예로 대통령상을 받았지만 소전의 아류라는 비난에 고민하다 마침내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어낸 평보 서희환의 청출어람, 58세에 오른손이 마비돼 글을 못쓰게 되자 왼손 필법을 고안해 다시 경지에 오른 검여 유희강의 인간승리 이야기도 놓칠 수 없다.

해강 김규진이 금강산 구룡폭포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을 쓸 때 사용한 대필과 관련 자료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두 번째 전시장은 한복판이 아주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바닥에 반짝이는 검정 타일을 깔고 어두운 가운데 조명으로 분위기를 내 관람객에게 벼루 속 먹물 한 방울이 된 느낌을 선사한다. MMCA에서 10년째 전시 공간 기획으로 각종 디자인 어워드를 휩쓴 김용주 디자이너의 세련된 손길이다.
세 번째 전시장은 ‘전통의 계승과 재해석’ ‘서예의 창신과 파격’ ‘한글서예의 예술화’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전문가 15인이 선정한 ‘2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초정 권창륜이 큼직한 필획의 행초서로 풀어낸 『명심보감』 속 글귀, 하석 박원규가 서주시대 청동 제기에 새겨진 글자를 재해석한 작품이 눈길을 붙든다.

마지막 공간은 디자인의 가능성을 통해 서예의 변신을 탐색하는 자리다. 한글 자모에 특유의 움직임을 부여한 강병인, 먹과 마스킹테이프로 글씨를 만들거나 파뿌리에 먹을 묻혀 글씨를 쓰는 이상현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저명 서예가들이 제호를 쓴 잡지, 다양한 붓과 벼루와 연적, 한글 서체로 완성한 TV 드라마 제목 등 쉬어가는 코너의 알찬 수준도 전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코로나19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길 기원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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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서예가들의 작품중 초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회소의 자서첩> 

장욱과 더불어 광초의 달인으로 꼽히는 회소의 초서는 <장욱의 반야심경>

대비해 볼 때 참으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자서첩에 관해서는 <석산 강창화님의 블로그>에 좋은 자료가 있어 전제합니다.

 

자서첩(自敘帖)
두루마리(卷), 종이에 먹, 28.3 x 755 cm

 

회소(懷素)의 성은 전(錢)씨이며 자는 장진(藏真)으로 회소는 그의 법명이다.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에서 태어나 훗날 장사(長沙)로 옮겨왔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신봉하여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초서 예술에 심취하였다.

대력(大曆) 7년(772)북쪽 지방으로 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발전의 기회 찾았다.

개성이 탈속하고 초서에 매우 탁월하여 안진경(顏真卿) 등 서예가와 시인 등

당시 명류(名流)와 귀족들의 찬송을 받았고 다투어 시를 증정하였다.

대력 12년(777)증정 받은 시와 서문을 뽑아서 광초(狂草)로 써서 완성하는데 바로 이 자서첩이다

 

이 작품에서 회소는 가는 붓으로 큰 글씨를 쓰고 있다.

둥글고 강건하며 기세가 좋은 필치는 마치 둥글리고 구부려진 철강선과 같고,

필획의 시작과 마무리가 갈고리나 바늘같이 예리한데 ‘철강과 같은 당당한 기세와

은과 같은 부드러운 필체(鐵畫銀鉤)’가 융합한 것과 같음을 일컫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초서의 기세를 강조하고 있는데 운필에 있어서

상하좌우로 종횡무진하며 기복이 요동치는 듯 하지만

그 중에 빠른 것과 느린 것이 있고 또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이 있어

마치 박자가 분명한 음악 선율처럼 동감이 풍부하다.

서로 떨어져 있는 필과 획들이 끊어짐이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필세(筆勢)를 형성하며 글자와 행, 행과 행 사이 점과 획들도

서로 호응하고 있다. 이 작품은 법도를 지키면서도 자유롭고 변화무쌍하여

초서 예술의 최고 경지를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사서첩의내용에 관해서는 초서라 너무 어려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윤봉주님의 번역문이 있어 전제합니다.

 

<懷素自敍帖의 飜譯>

尹 鳳 周(안양시 서협회원)

自敍帖

1. 懷素家長沙하고 幼而事佛하며 經禪之暇 頗好筆翰이라 然恨未能遠覩前人之奇迹하고 所見甚淺하여 遂擔笈杖錫하고 西遊上國하여 謁見當代名公하고 錯綜其事하니 遺編絶簡 往往遇之하고 豁然心胸하여 略無疑滯하다 魚牋絹素 多所塵點 士大夫不以爲怪焉이라.

懷素1)는 長沙2)에서 살았고, 어려서 부처를 섬겼으며, 讀經과 參禪하는 여가에 매우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멀리 전인들의 기이한 자취를 보지 못하고,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淺近함을 한탄하여, 마침내 책 상자를 메고 錫杖3)을 집고, 서쪽의 上國(洛陽)을 유람하여, 그 당시의 明公을 만나보고, 그 일을 錯綜4)하게 되었으니, 남아있는 책과 끊겨진 편지들을 때때로 보고, 마음을 豁然하게 하여 전혀 막힌 것이 없게 되었다. 魚箋5)과 흰 비단에 많은 얼룩진 점들을 士大夫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2. 顔刑部 書家者流이며 靜極筆法하다 水鏡之辨(喩) 許在末行이라 又以尙書 司勳郞盧象 小宗伯張正言으로 曾爲歌詩하여 故敍之曰 開士懷素 僧中之英으로 氣槩通疎하며 聖靈豁暢하다. 精心草聖하야 積有歲時하더니 江嶺之間 其名大著 故吏部侍郞偉公陟 覩其筆力하고 勖以有成하다 今禮部侍郞張公謂 賞其不羈하여 引以遊處하며 兼好事者同作歌以贊之하니 動盈卷軸이라하다.

顔刑部6)는 書家者의 流派이며, 필법에 精密하고 至極하였다. 水鏡7)의 辨은 末行에 있다. 또한 尙書(:刑部尙書,稱顔眞卿)는 司勳郞盧象8)과 小宗伯張正言9)과 함께 한때 시가를 지었기 때문에 서문에 말하기를, “開士(보살)인 懷素는 중 가운데에 영재로, 氣槩가 通疎10)하며, 性靈이 널리 통하였다. 草聖11)에 오로지 마음을 갖고 여러 세월동안 계속 하더니, 江嶺12)의 사이에 명성이 크게 떨쳤다. 故人인 吏府侍郞韋公陟13)은 그의 필력을 보고서 힘써 성취함이 있게 하였다. 현재 禮部侍郞張公謂는 그가 拘束되지 않음을 讚揚하고, 그를 이끌고 유람하며 쉬었다. 아울러 好事者들과 함께 시가를 지어 贊하니, 순식간에 卷軸(권축: 두루마리)을 채웠다.”

 

3. 夫草藁之作 起於漢代 杜度․崔瑗是以妙聞하고 迨乎伯英尤擅其美라. 羲․獻玆降 虞․陸相承하여 口訣手授하여 以至吳郡長旭하다. 長史 雖姿(資)性顚逸하고 超絶古今하나 而模楷精法1)하여 特爲眞正이라.

草藁(:草書)2)가 쓰여 진 것은 漢代에서 시작되었고, 杜度3)와 崔瑗4)이 매우 뛰어난 명성이 있었고, 伯英5)에 이르러서 그 명성이 더없이 우뚝 솟았다. 羲之6)와 獻之7)이후에는, 虞世南8)과 陸柬之9)가 서로 이어서, 口訣을 손으로 전하여, 吳郡의 張旭10)에 까지 이르렀다. 長史(:張旭)은 資質과 天性이 顚逸11)하여 고금에 가장 뛰어났으나, 楷書를 익힘이 精密하고 仔詳하여 특히 眞正이라 했다.

 

4. 眞卿早歲 常接遊居하고 屢蒙激昻하여 敎以筆法하나 資質劣弱하며 又嬰物務하여 不能懇習하여 迄以無成하다 追思一言하니 何可復得이리오. 忽見師作인데 縱橫不群하고 迅疾駭人하니 若還舊觀이라. 向使師得親承善誘하고 函揖規模하면 則入室之賓 捨子奚適리이다. 嗟歎不足하여 聊書此以冠諸篇首하노라.

顔眞卿은 일찍부터 항상 한가하게 거처하며, 자주 激昻(마음속에 분발하여 감정이 고조됨.)하여 필법으로 가르침을 입었으나, 자질이 용렬하고 나약하며, 또한 당면한 일에 얽매여, 능히 정성 들여 익히지 못하고, 끝내는 이루지 못했다. 一言을 미루어 생각하니 언제 다시 얻겠는가? 문득 스승(張旭)의 작품을 보았는데, 자유자재하여 뛰어나고, 글씨를 신속히 쓴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니, 마치 옛날에 보던 때로 돌아온 것 같다. 가령 스승으로부터 친히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고, 規模(書法)를 函挹(남모르게 취하다.)할 수 있다면 入室之賓12)은 스승을 버리고 어디론가 갈 것이다. 嗟歎하여도 부족하여 더욱이 이를 써서 글의 첫머리에 올린다.” 라고 하였다.

 

5. 其後繼作不絶하여 溢乎箱篋하다 其述形似 則有張禮部 云奔蛇走虺勢入座하고 聚雨旋風聲滿堂이라하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글 쓰는 것이 끊이지 않아 箱篋(상자)에 넘쳤다. 그 形式과 外觀이 비슷함을 저술한 것에는 張禮部(張謂)가 있으니, 이르기를 “나르는 뱀과 달리는 이무기의 형세가 자리에 들어오고, 소나기와 회오리바람 소리가 집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6. 盧員外 云初疑輕煙澹古松 又似山開萬仞峰이라하다.

盧員外(盧象)은 이르기를, “처음에 가벼운 안개는 澹澹(담담)한 古松인가 여기고, 또한 산이 열리게 되니 萬仞의 봉우리와 같다.”라고 하였다.

 

7. 王永州邕 曰寒猿飮水撼枯藤하고 壯士拔山伸勁鐵이라하다.

王永州邕1)은 이르기를, “ 추운 원숭이는 물을 마시며 마른 등나무를 흔들고, 壯士는 산을 뽑아 강철을 伸張한다.”라고 하였다.

 

8. 朱處士遙(逵) 云筆下唯看激電流 字成只畏盤龍走(去)이라하다.

朱處士遙2)는 이르기를,“글을 쓰는 신속함이 오직 번개 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글자의 완성은 서려 있는 龍이 가려고 하는 자태를 心腹한다.”라고 하였다.

 

9. 敍機格 則有李御使舟 云昔張旭之作也 時人謂之張顚이라하고 今懷素之爲也 余實謂之狂僧이라하다. 以狂繼顚인데 誰曰不可리오하다.

機格(格式)을 서술하는 데에는 李御史舟3)가 있는데 이르기를, “옛날에 張旭이 글을 씀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張顚이라고 불렀고, 지금 懷素가 글을 쓰니, 나는 실로 그를 狂僧이라고 불렀다. 狂(懷素)이 顚(張旭)을 잊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0. 張公 又云稽山賀老粗知名이나 吳郡張顚曾不面(易)이라하다.

張公(張謂)은 또한 이르기를, “稽山賀老4)는 대략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나, 吳郡의 張顚은 아직도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11. 許御史瑝(瑤) 云志在新奇無定則이오 古瘦灕纚半無墨이라 醉來信手兩三行 醒後却書書不得이라하다.

許御史瑤1)는 이르기를, “意志가 新奇에 있으니 일정한 법이 없고, 古瘦(나이가 많아 쓴 획이 가느다란 것)는 灕纚(스며들어 이어지는 것)하여 반은 먹물이 없더라. 술기운에 손 가는 데로 쓴 두서너 줄의 書는, 술이 깬 후에는 오히려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12. 戴御史叔倫 云心手相師勢轉奇하니 詭形怪狀飜合宜 人人欲問此中妙 懷素自言初不知이라하다.

戴御史叔倫2)이 이르기를, “마음과 손이 서로 본받아 筆勢가 기이하게 변하여, 怪異한 형상을 해도 도리어 서법에 합치되더라. 사람들은 이 가운데 오묘함을 물으려 했으나, 懷素자신은 말하기를, ‘처음부터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13. 語疾速 則有竇御史冀 云粉壁長廊數十間 興來小豁胸中氣하야 忽然絶叫三五聲하니 滿壁縱橫千萬字이라하다.

빨리 쓰는 것을 말함엔 竇御史冀3)가 있었으니 말하기를, “석회 바른 긴 행랑 수십 간에 興이 일어 가슴속의 氣가 다소 소통된다. 忽然히 三五 聲을 絶叫하니, 벽안에 縱橫으로 천만 자가 가득했다.”라고 하였다.

 

14. 戴公 又云馳毫驟墨列奔駟하니 滿座失聲看不及이라하다.

戴公(戴叔倫)은 또한 이르기를, “몰아치는 붓과 먹물은 달리는 사륜 말을 列擧하니, 가득히 앉은 사람은 숨을 죽이고 보았으나 미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15. 目愚劣 則有從父司勳員外郞吳興錢起 詩云遠錫(鶴)無前侶하고 孤雲寄太虛로다 狂來輕世界하고 醉裏得眞如이라하다.

愚劣을 지목하는 데는 從父司勳員外郞吳興錢起1)가 있었으니, 이르기를,“遠錫은 전에도 벗할 것이 없고, 외로운 구름은 太虛(하늘)에 기대고 있다. 狂(懷素)이 와서 세계를 경시하고, 취중에 眞如(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었다.

 

16. 皆辭旨激切하고 理識玄奧하여 固非虛蕩之所敢當하다 徒增愧畏耳이로다.

모두 말한 뜻이 지극히 간절하고, 理解와 認識이 깊고 奧妙하여, 진실로 虛蕩(허랑 하고 방탕함)한 말이 감당 할 바가 아니다. 다만 부끄럽고 두려움을 더할 뿐이다.

 

時는 大曆丁巳冬十月卄有八日이다.

때는 대력(大曆) 정사(丁巳: 777)年 겨울 10月 28日 이다.

 

<인물탐구 ; 회소 [懷素, 725~785]>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술을 좋아해서 만취한 상태로 붓을 종횡으로 놀려 연면체(連綿體)의 초서 즉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 《자서첩》, 《초서천자문》, 《성모첩》등이 남아 있다.

별칭 자 장진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중국 창사
주요작품 《자서첩》 《초서천자문》 《성모첩》

원래는 승려로, 자는 장진(藏眞), 속성(俗姓)은 전씨(錢氏)이다. 창사[長沙] 출생. 일찍이 불문에 들어갔으며 어려서부터 서도를 좋아하여 연찬(硏鑽) 끝에 일가를 이루었다. 초서로는 그 당시 장욱(張旭) 다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술을 좋아해서 만취가 되면 흥에 못 이겨 붓을 종횡으로 놀려 연면체(連綿體)의 초서, 즉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 《자서첩(自敍帖)》 《초서천자문》 《성모첩(聖母帖)》 《장진첩(藏眞帖)》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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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간 : 2019.11.11~11.18

장소 : 춘천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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