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붓이야기
인제 합강정
백범의 일송오강
서예가 백범을 다시 보다
백범 김구가 1947년 2월 심산 김창숙에게 써준 ‘일송오강’.
사람의 도리를 요약한 5개 강령으로, 70여 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사진 은평역사한옥박물관]
1947년 2월 10일 겨울 찬바람이 불던 날, 백범(白凡) 김구(1876~1949)가
평생 동지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과 마주 앉았다.
고희(古稀) 전후의 두 노인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광복을 맞은 지 3년째 됐건만 진정한 독립은 아직 멀어 보였다.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정국은 혼탁하기만 했다.
심산이 백범에게 부탁했다. “백범, 내게도 글씨를 하나 써주시오.”
평생 동지 심산에 써준 ‘일송오강’
백범 특별전서 73년 만에 첫 공개
독립운동 매진한 두 거목의 우정
‘사람이 곧 글씨’ 우국충정 돋보여
중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지인들에게 글을 나눠주며 조국 광복을 염원해온 백범이었다.
그가 심산에게 되물었다. “어떤 문구가 좋겠소.”
심산이 답했다. “스승이신 대계(大溪) 선생의 ‘일송오강’(日誦五綱)이 적당할 것 같소.”
백범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산의 오늘을 있게 한 대계 선생이 아닌가.
그리고는 ‘일송오강’ 5개 강령 25자를 써내려갔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부모를 위해 몸을 세우고, 나를 위해 도를 세우고,
백성을 위해 진력을 다하고, 만세를 위해 규범을 세운다.’
(爲天地立心 爲父母立身 爲吾生立道 爲斯民立極 爲萬世立範)
두 노인은 뜻이 통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한 문구로 모자람이 없었다.
‘일송오강’은 중국 만주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독립운동 기지도 세웠던 대계 이승희(1847~1916) 선생이 직접 지어 매일 외던 글귀였다.
심산 자신에게도 좌우명 같은 경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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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추사의 삶만큼 파란만장...
주인이 10번이나 바뀐 그림
일본에서 사라질 뻔한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
-오마이뉴스-
▲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 그려진지 180년 만에 주인이 10번이나 바뀌며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세한(歲寒)’은 설 전후의 추운 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문인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거칠게 그려진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모진 풍파에 꺾인 가지는 겨우 생기를 유지한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그리고 잣나무 세 그루. 잣나무 사이 대충 윤곽만 그려진 초라한 집 한 채. 텅 비어 있는 오른쪽 여백에 화제가 적혀 있고 붉은 낙관 두 개가 찍혀 있다. 그게 전부다. 전체적으로 춥고, 외롭고,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다.
산수화도 아니고 인물화도 아니다. 메마른 붓질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고아하게 표현한 그림과 글씨. 우리나라 문인화의 정점을 이룬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 이야기다.
무릇 예술가들은 작품 속에 그들이 겪었던 삶의 이야기들을 오롯이 투영해 놓곤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명작의 이면에 불우하고 궁핍했던 예술가들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 추사의 절친 권돈인이 이한철에게 주문하여 그린 김정희 초상(좌측. 보물 제547-1호)과 추사의 수제자 소치 허련(小痴 許鍊 )이 그린 추사의 초상(우측) | |
ⓒ 국립중앙박물관 |
일생을 불행하게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웠던 시기에 귀를 자르고 '결핍과 고독'을 자양분 삼아 예술혼을 불태우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겼다.
고흐보다 70여 년 앞섰던 조선 후기. 금수저 중의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 인생의 중년기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가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글씨와 그림으로 승화시켜 '조선 학예(學藝)의 최고봉'을 이뤘다. 그는 서화가이자 실학자이면서 인문학까지 통달한 만능 예술가였다.
조선의 황금수저, 땅끝 제주도로
제주도, 경기도 과천시, 충청남도 예산군. 세 곳에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기리는 박물관과 기념관이 있다. 한 나라에서 무려 3개의 기념관을 지어 추모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다.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가 한국 사람 치고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잘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말했듯이, 추사 김정희를 조선 후기 서예에 통달해 추사체를 남긴 명필 정도로만 아는 것은 부족하다.
▲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 추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충남 유형문화재 43호 | |
ⓒ 문화재청 |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 할 수 있는 정조가 집권한 지 10년째 되는 1786년. 충남 예산군 용궁리 경주김씨 월성위(月城尉) 가문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역임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한 '왕의 사위'로 오위도총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냈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에 오른 명문 중의 명문 집안이다.
로열패밀리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24살에 생원 시험을 거쳐 34살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규장각 대교, 의정부검상, 예조참의를 거쳐 1839년 54세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추사는 아직 추사가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가문의 찬스'를 활용해 잘 나가는 엘리트 관료에 불과했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세상 이치다. 조선 후기, 왕을 둘러싼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주도했던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추사 가문은 큰 화를 당한다.
아버지 김노경의 고금도 유배에 뒤이어 1840년, 추사의 나이 55세 되던 해 안동김씨 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추사 가문의 최측근이었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자 안동김씨는 추사에게 대역죄를 뒤집어 씌웠다.
▲ 추사가 귀양살이를 했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유배지. 국가사적 제487호 | |
ⓒ 문화재청 |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벌한다 했으니, 국청에 수금한 죄인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도록 하라."
어린 왕,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안동김씨 순원왕후의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추사는 조선의 땅끝,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도 보통 유배가 아니었다.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도 '위리안치형'은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들에게 내려지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
험난한 제주 바다를 건너 한 달여 만에 도착한 척박한 땅 대정현. 추사의 거처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유배형에 따라 가시 울타리가 둘러쳐지고 울타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가택 연금의 귀양살이가 시작됐다.
남부러울 것 없던 조선의 황금수저가 인생의 절정기에 나락으로 떨어져 절해고도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원망, 외로움, 결핍, 고독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절망하지 않았다. 극한의 유배지에서 동생들을 비롯한 친구, 제자,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상과 소통하고 외로움도 달랬다. 인고의 세월을 책과 함께 보내며 학문과 인생의 깊이를 더했다. 추사는 귀양살이 9년을 학문과 예술을 연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다시 태어났다. 이 시기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 추사의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 권력을 잃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스승을 잊지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에 비유하여 세한도를 그렸다 | |
ⓒ 은송당전집 |
유배생활 5년째 되던 1844년.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인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가 탄생한다. 학문과 예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추구했던 추사의 철학과 사상이 담긴 불후의 명작 세한도에는 가슴 찡하게 울리는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귀양살이가 길어지면서 주변의 관심도 점차 멀어지고,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 예안이씨(禮安李氏)마저 잃게 되자 추사의 외로움은 깊어 가고 있었다. 이때, 청나라에 역관으로 가있던 제자 이상적(1804~1865)이 북경(北京)에서 막 발행된 신간 서적 <황조경세문편> 79책 120권을 구해 제주도로 보내왔다. 수레로 한 수레나 되는 분량이었다.
권력을 잃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스승을 잊지 않고 천리 먼길 위험을 무릅쓰고 책을 보내준 제자가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추사는 제자를 위해 붓을 들었다.
▲ 그림 왼편에 쓴 세한도 발문.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공자의 ‘자한편’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에 비유하였다 | |
ⓒ 국립중앙박물관 |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겠구나. 그대야말로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공자의 '자한편'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에 비유하여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세한도(歲寒圖)'라 화제를 쓰고 아래쪽에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고 약속하듯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화인(火印)과도 같은 붉디붉은 낙관을 찍었다.
▲ 오른쪽 여백에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가 가로로 크게 쓰여 있고 세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적혀 있다. ‘우선, 감상하시게’라는 뜻인데 우선은 제자 이상적의 호다. 완당이란 낙관과 함께 아래에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 |
ⓒ 국립중앙박물관 |
그림을 받아 든 제자 이상적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림을 청나라 연경으로 가져갔다. 중국인 친구 오찬의 연회에 초대받은 이상적은 세한도를 중국의 문인과 학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세한도를 본 중국의 문인들 16명이 시와 문장으로 찬탄의 감상평을 써 주었다.
청나라 문사들 뿐만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오세창, 정인보, 이시영 등 4명의 감상평이 달렸다. 그리하여 원래 세로 24cm 가로 70cm 정도였던 세한도는 20명의 감상평이 이어져 15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 원래 세로 24cm가로 70cm 정도였던 세한도는 20명의 감상평이 이어져 15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 |
ⓒ 국립중앙박물관 |
▲ 두루마리 앞쪽의 바깥 비단 장식 부분. 제목 완당 세한도(阮堂歲寒圖)는 청나라 문인 장목(1805~1849)이 썼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감상평을 옆으로 붙여 표구로 만들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 |
ⓒ 국립중앙박물관 |
주인 10번 바뀌며 돌고 돌아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국보
제주도에서 그려진 후 북경까지 다녀온 세한도는 추사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을 겪는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나고 세한도는 그의 제자,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을 거쳐 1930년대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에게 건너갔다.
후지즈카는 경성제대 교수로 한국사람들보다 추사를 더 존경하고 흠모했던 추사 연구가였다. 1944년 해방 1년 전, 후지즈카는 돌연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다.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田 孫在馨 1903~1981) 선생은 이를 알고 매우 애석해한다.
손재형은 도쿄로 건너가 100일 동안 매일 후지즈카를 문안하며 "제발 세한도를 넘겨달라"라고 호소했다. 손재형의 정성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그저 "잘 보존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한도를 넘겨줬다.
세한도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석 달 뒤 1945년 3월, 도쿄에 있는 후지즈카의 서재가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손재형의 문화재 사랑이 없었다면 세한도는 일본땅에서 한줄기 연기로 사라졌을 것이다.
▲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田 孫在馨 1903~1981). 손재형은 도쿄로 건너가 100일 동안 매일 후지즈카를 문안하며 세한도를 찾아왔다 | |
ⓒ 소전 미술관 |
손재형이 애지중지하던 세한도는 그의 손을 떠나게 된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이 화근이었다. 돈이 부족해진 손재형은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세한도를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다. 국회의원에 낙선한 손재형은 결국 세한도를 찾아올 수 없게 됐다.
이근태는 미술품 소장가인 개성 출신 인삼 무역상 손세기에게 넘겼고 손세기는 그의 아들 손창근(93)에게 물려줬다. 평소 기부에 앞장섰던 손세기·손창근 부자는 2018년 대를 이어 수집해온 문화재 304점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세한도' 만큼은 끝까지 놓지 못했다. 1년을 넘게 고민하던 손창근씨는 작년 2월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로서 세한도는 주인이 10번이나 바뀌며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손창근씨에게 문화훈장 중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를 기념해 <한겨울 지나 봄 오듯>이란 테마로 1월 31일까지 특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신축년 새해 들어 추위가 매섭다. 매서운 추위만큼이나 세상살이도 암울해 보인다. '의리와 절개'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티끌만 한 권세와 이익을 좇아 배신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하 수상한 세상이 돼버렸다.
180년 전, 멀고 먼 낯선 유배의 땅에서 '세한의 계절'을 견디며 고립된 채 그려진 옛 그림이 추운 날씨만큼이나 서늘하게 일갈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