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8m 고소를 힘들다며 걸어 오르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다

  • 글·김영도 대한산악연맹 고문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노 산악인의 염려와 의견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 올라 환호하는 등산인.
▲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 올라 환호하는 등산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보아도 잘못 돼가는 것 같다. 산이라는 산에 저마다 케이블카를 놓는다니 말이다. 아직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다지만 이미 그렇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야 관광객이 많이 모여든다는 발상이다. 돈 생각만 한 것이다.


나는 내 생각만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 남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주 비근한 예로, 해마다 사람들이 새해 첫날 아침 해돋이를 보겠다고 설악산 정상으로 몰려든다.


일출을 맞이하는 곳은 물론 설악만이 아니다. 그러나 설악이 그 많은 사람들을 부르는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설악이라는 독특한 자연조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산은 많고, 더 높은 산이 있어도 설악만 한 곳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평생 한 번이라도 설악에 오르고 싶어하지 않을까.


설악(雪岳)은 고고(孤高)하다. 그 정상은 대청(大靑)이라고 하는 것도 이름으로서 돋보인다. 설악 정상에 서면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눈앞에 벌어진다. 그 장관은 무엇에 비할 것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멀리 울산암과 끝없는 동해가 바라보이지만,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야말로 장관의 경지를 넘어 준열(峻烈)하고 호쾌(豪快)하다.


그런데 설악의 고고함과 장관 그리고 준열함과 호쾌함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장시간의 등반 끝에 비로소 얻는 달성감이다. 추상적인 말장난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오르는 순간 외치는 “만세!”와 애국가 합창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정상을 밟았다고 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설악 대청봉에서만 있는 일이고, 그것도 자기 발로 긴 시간 고생 끝에 정상을 밟았을 때 이야기다. 설악보다 높은 지리산이나 한라산 정상에서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인성의 산 체험이야말로 값지고 보람찬 일


우리는 누구나 잘 살려고 하고 강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마다 노력하며 거기에서 사는 보람도 느낀다. 국가에 제도 교육이 있고, 사회에 갖가지 훈련 과정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서도 산에 올라 “야호!”나 “만세!”를 외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산에 몰려간다.


항간에는 등산을 사서 고생하는 일로 보기도 하는데, 등산이야말로 사서라도 고생할 만한 것이다. 딴 데서 얻을 수 없는 값진 것을 거기서 배우고 얻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무대가 대자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적인 침윤(浸潤)은 절대 배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산에 케이블카를 놓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산에 안 가던 사람도 산에 갈 것이다. 여기 노약자 이야기는 불문에 부치지만, 일반여론은 우선 환영하고 찬성할 것이다. 이 바쁜 세상에 멋지고 편리한 여가를 누리게 됐으니 말이다. 그들이 편히 기분 좋게 흥겨워하며 잠시 잠깐 뒤에 1,708m 고소에 섰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들은 호기심에서 주위를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정상은 앙상하고 멀리서 보이던 산이 눈앞에 있을 뿐이다. 케이블카 승객으로 “만세!”를 외칠 사람이 있을까. 감격이 없으니 함성도 없다. 당연한 이야기다.


날로 난숙해지고 있는 현대문명사회에서 우리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다. 그곳에 ‘감격’은 어디 속할까 한 번 생각할 문제다. 동시에 ‘감격’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가도 짚어볼 만 하며,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디서 구하고 찾을 것인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에 ‘생활은 낮게 생각은 높게’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어떤가.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갈대가 됐다’는 수필을 읽은 적이 있는데, 파스칼이 무색해지고 사상이 창백해진 지도 오래다. 젊은이들은 온통 스마트폰에 빠지고 책과는 아예 멀어졌으며, 휴가철이 되면 저마다 야외나 해외로 나간다. 물론 산에도 간다. 그만큼 삶이 나아졌다는 이야길 터이니 다행이다.


그러나 무엇이고 신속 정확에 효율만 따지는 이 끝없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있는가 없는가. 나는 굳이 서바이벌 테크닉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옛말을 생각할 말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야말로 인생의 참 모습이며 철리다.


케이블카는 케이블카대로의 장점이 있다. 프랑스 샤모니 에귀 디 미디의 케이블카는 그 좋은 예다. 3,800여 m의 고소까지 오르는 그 현대문명의 이기는 알프스의 세계적인 침봉(針峰)들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은 야산의 케이블카와는 같이 논할 문제가 아니다. 알프스와 같은 고산지대의 케이블카를 생각하면 설악의 것은 눈물겹다. 우리는 역시 1,708m 고소를 힘들다며 걸어 오르는 것이 100번 낫고 우리의 자랑이다.


국내 낮은 산에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발상은 오직 관광객 유치에 있는데, 국가 100년 대계로서는 엄청난 실책이다. 국민을 약체화하기 때문이다. 돈은 그 지역에 떨어지겠지만 거기 모여드는 국민은 감격과 정열과 탐구심을 모른 채 날로 비실비실 해지기 마련이다. 하기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관광객’이 몰려 난데없는 교통 체증이 심각하다는 작금이다. 여기 국내 야산 설악 가지고 갑론을박, 왈가왈부할 것까지도 없을 성싶다. 그러나 평생 한 번 기어코 설악 대청을 밟아보고 싶어하는 선량하고 소박한 무리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지난날 설악에서 등반 중 목이 말라 물 한모금 애원하던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따지고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남달리 설악산이 어떤 곳이며, 산에 오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알았을 터이니까.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지 못했을 인성의 산 체험이야말로 얼마나 값지고 보람찬 일일까.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등반의 정도이자 진수


설악에는 군데군데 산장이 있다. 산의 산장은 원래 숙박소가 아니고 대피소다. 그런데 대피소 아닌 숙박시설이, 그것도 표고 1,000m 안팎인 저지대에 본격적인 숙박시설로 들어서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연성은 온통 뭉개버리고 산을 휴양지로 만든 셈이다. 여기에 케이블카마저 생기면, 그토록 고고하고 준열하던 설악은 어떻게 될까. 이제는 어린애 아니니 어른들의 놀이터로 탈바꿈할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원래 설악의 참모습은 어떤 것이며, 그 매력은 무엇일까. 산은 그리 높지 않아도 내설악이나 외설악 어느 쪽에서 오르나, 등산의 세 가지 요소인 의·식·주의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그것을 모를 때 설악산 행보는 의미가 없다. 산이 아니고 놀이터인 셈이니 여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설악은 가볍지 않은 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재촉하며, 도중 산장에 눈을 돌리지 않고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것이 그 등반의 정도(正道)며 진수(眞髓)다.


나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목이 타서 물 한모금 애원하던 사람들과, 너무 힘들어 울었다는 사람을 안다. 특히 혼자 길을 나섰던 젊은 여성이 도중에 날이 저물고 길을 몰라, 바위 밑에서 울며 밤을 지새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고작 해서 높이 1,700여 m의 설악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곳인가 알려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근자에 1950년 인류 최초로 8,000m급 고봉 안나푸르나(8,091m)를 처음 올라 새 역사의 첫 장을 연 프랑스 원정대의 리오네 테레이(Lionel Terray·1921-1965)의 책을 읽다가 느닷없이 설악에 케이블카가 생긴다는 이야기에 나는 힘없이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지난날 서북릉에서 비박하던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찬 이슬에 우모 침낭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저자 1924년생. 1976~1980년 제7대 대한산악연맹 회장,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 1978년 한국북극탐험대장, 한국등산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을 썼고, <검은 고독 흰 고독>, <제7급>, <8000미터의 위와 아래>, <죽음의 지대>, <내 생애의 산들>, <세로토레-메스너, 수수께끼를 풀다>를 번역했다.

'사는이야기 > 구암동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면 중금속 도 전역 노출  (0) 2014.11.04
이런 청첩장이라면...  (0) 2014.11.03
프랑스 파리시 라 빌레트 공원  (0) 2014.11.02
평창 동계올림픽의 맨얼굴  (1) 2014.10.31
춘천 꼴뚜기(4)  (0) 2014.10.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