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보우국사와 일연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던 유서 깊은 사찰이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유적지로,
표충사 경내에는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이 있으며
이후 절의 이름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층석탑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보물 제465호로 높이 7.7m의 탑.
특히 삼층석탑에서는 1995년에 이루어진 해체 보수 때에 나온
많은 유물들은 표충사의 유래와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표충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우화루와 범종각
우화루와 범종각 뒤로 보이는 산이 재약산이다
대광전
표충사의 주법당으로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대광전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본래는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하나 소실되고
숙종 때 표충사가 불에 탄 이후 다시 지어진 것이다. 단층 팔작지붕 목조 건물
관음전
관음전은 새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
관세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 보살로 현실의 구세주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
표충사 관세음보살은 다른 사찰에 있는 관음보살보다 특이하게 손이 참 많다.
관음보살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피고
중생이 괴로울 때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를 해준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으며,
정병이나 연꽃 등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아미타불의 협시불인 경우가 많고 독립상으로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이곳 표충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독립상으로 세워진 경우로
손이 많은 것은 중생들에게 여러 다양한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닐까
표충사 명부전의 시왕들
불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심판을 담당한 지옥의 왕들을 시왕이라고 한다.
7번에 걸쳐 심판을 받으며, 심판이 끝나는 날이 49일 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후손들이 조상이 죽은 지 49일 째 되는 날
조상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제를 정성스럽게 드리는 것이다.
나머지 세 명의 대왕은 49일 이후 백일간, 100일 이후 일년간, 일년
이후에는 전륜대왕이 최종적으로 지옥의 형량을 가리게 된다고 한다.
*명부시왕*
처음 7일 간은 진광대왕에게 눈이 지은 죄를 심판받고
두번 째 7일 간은 초강대왕에게 귀가 지은 죄를
세번 째 7일 간은 송제대왕에게 코가 지은 죄를
네번 째 7일 간은 오관대왕에게 혀가 지은 죄를
다섯 번째 7일 간은 염라대왕에게 몸이 지은 죄를
여섯 번째 7일 간은 변성대왕에게 듯이 지은 죄를
일곱번 째 7일 간은 태산대왕에게 속마음으로 지은 죄를
49일 이후 백일까지는 평등대왕이, 100일 이후 일년 간은 도시대왕이,
1년 이후 최종적인 형량은 전륜대왕이 심판을 한다고 한다.
팔상전
대광전 왼쪽에 있는 전각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탱화를 봉안한 법당으로 석가모니불과 탱화를 볼 수 있다.
만일루
표충사 경내에 있는 H자형의 이 건물은 철종 11년(1860)에 당시
방장이었던 월암상인이 조성한 건물이다.
48칸의 선실을 108평의 대지에 짓고 동림고사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혜원법사의 유풍을 받드는 뜻을 담고,
불교의 48월과 108번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대중들의 정진 장소로 쓰였으며,
무량수각 혹은 서래각으로 편액되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신 곳으로
속세의 잡귀가 신성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감시하고 막는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들이 양 쪽에 2명씩 큰 눈을 부릅뜨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손에는 삼지창이나 칼 같은 무기를 들고 잡귀를 쫓기 위해 서있다.
수충루
표충사의 정문인 수충문은 2층 누각으로 1층은 장초석 위에 기둥이 놓인
삼문의 형태이고 2층은 누마루가 깔린 형태로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다른 절집의 경우에는 절 입구에 이런 2층 누각은
대부분 범종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충루 2층 누각에는 범종 등의 사물은 보이지 않았다
<천황산과 재약산의 지명>
1189m봉은 천황산, 천왕산, 아니면 사자봉
영남 알프스의 여러 산봉 가운데 지명과 관련된 논란이 가장 큰 것이 광대한 억새밭 사자평을 가진 재약산이다.
이 산릉의 북쪽에 1189m봉이, 남쪽에는 1108m봉이 솟아 있으며, 현재 북쪽 봉에 ‘천황산’, 남쪽 봉에
‘재약산’이라 한자로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원래는 이 산 전체가 재약산이고, 천황산은 따로 없으며, 1189m봉은 사자봉,
1108m봉은 수미봉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
이 산이름 시비에 대해 <영남 알프스>에서 저자 황계복씨는 여러 근거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재약산이란 이름은 영정사 창건 연기(緣起)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24대 흥덕왕의 세째 아들이 이 산의 약수를 마시고 고질병이 나은 뒤 ‘약수를 갖고 있는 산’이라 하여
재약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의 고지도 동람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을 보면 재악산으로 표기돼 있다.
물론 신라 때 재약산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재악산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천황산이란 이름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그들의 천황을 받들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18세기 중기의 좌해분도, 18세기 말의 해동도 등 여러 지도를 살펴보면 천왕산이라 표기돼 있다.
그러므로 일제에 의해 천황으로 지명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속리산 천황봉 같은 경우는 일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지명이다.
일제 때의 조선국세견전도에도 재악산이라 표기돼 있다.
그러므로 여러 고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마친 뒤 이 1189m봉의 지명을 확정지어야 할 것이다.
천황산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 사실일까.
그래서 재약산으로 다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타당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천황산은 수백년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고유의 산이름인 것이다.
때문에 일제가 붙였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는 낭설인 셈이다.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는 지난 98년 울산에서 발행된 울산향토사연구회 향토사보 제9집에서
'천황산일식명설의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천황산이 우리 고유의 산명인 천왕산에서 유래되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들어 규명했다.
그에 따르면 천왕산은 조선조 영조 36년(1760년)에 만들어진 전통지리화인 여지도에
석남사 석골사 등과 함께 분명히 그 이름이 올라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 성균관에서 복사한 여지도 밀양부 사본을 논문에 첨부했다. 다만 그 천왕산이 천황산으로 바뀐 것은
1887년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왕의 칭호를 황으로 고쳐 부른 것과 같은 논리라고 설명한다.
이는 속리산의 천왕봉이 천황봉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밀양시에서도 지난 2002년 6월 일부 산악인들이 세워놓은 재약산 사자봉 정상석을 철거하고
새로이 만든 천황산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이렇듯 천황산의 명칭문제가 이유수씨 노력으로 일단락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심지어 전문 산악지조차도 천황산이라는 산명을 빼버린 채 여전히 재약산 사자봉으로 취급하고 있다.
잃어버린 우리 것을 되찾는 것도 중요하고 그에 따른 열정도 존중받아야겠지만 냉철한 분석없이 접근한다면
이 같은 우를 다시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걸음에 달려가 천황산을 꼭 껴안아 보고 싶은 이유다.
-진용성-
추론:
1. 신라 때 재약산이라 부름
2. 16세기 후반의 고지도 동람도(東覽圖),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을 보면 재악산(載岳山)으로 표기
3. 조선조 영조 36년(1760년)에 만들어진 전통지리화인 여지도- 천왕산으로 표기
4. 1887년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왕의 칭호를 ‘황’으로 고쳐 부른 것과 같은 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