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며,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 신라의 혜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꿨다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가 없어서 언제 '내소사'로 바뀌었는지 분명치 않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법화경절본사경(보물 제278호),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가 있고
그밖에 설선당·보종각·연래루·3층석탑 등이 있다.
‘내소사’는 이 절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 다시 소생하리라는 의미의
‘내자개소(來者皆蘇)’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나무 숲길을 따라 내소사로 들어섰다.
내소사는 석축에 의해 상·중·하 3단으로 나뉘어 진다.
하단은 천왕문과 봉래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종각을 배치하였다.
중단은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설선당과 무설당을 두어 수도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상단은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관심당이 있어 예불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천왕문
일중 김충현이 쓴 ‘천왕문(天王門)’ 편액 1기와 4기의 주련이 걸려 있다.
천왕문 좌우 돌담도 정겨운 느낌을 준다.

봉래루
아래는 매점, 위는 누각인 이곳을 지나야 비로서 대웅전 안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본래 실상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일정하지 않은 주춧돌위에 지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봉래루 마루 밑을 빠져나가니
경사면을 따라 낮은 축대와 층계가 있는 아름다운 가람이다
근래에 손을 많이 보았다고 하나 번잡하거나 요란하지가 않아
여행자가 최고로 꼽는 절 중의 하나다.

보종각 /제3경 소사모종(蘇寺募鐘)
왼쪽으로 고려동종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보종각이 있다.
고려 때 주조한 것으로 본래 내변산의 청림사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절이 폐사된 뒤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수백 년 뒤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조선 철종 때 내소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해질 무렵 어둠을 뚫고 고즈넉한 산사에서 울려 펴지는 저녁 종소리에
신비로운 정경을 제3경으로 친다.

당산나무
수령이 약 5백 여년이 되는 느티나무(할아버지 당산) 와
약 천여년 쯤 되는 느티나무(할머니 당산)가 있으며,
하늘을 찌를듯한 수령 300여년으로 추정되는 거목 "보리수"가 자리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 왼쪽에 있는 무설당(無說堂)은 오른쪽 있는 설선당(說禪堂)과 함께
내소사의 대중방으로 알려져 있다. 두 건물은 처마를 마주보고 서 있으면서
‘무설(無說)’과 ‘설선(說禪)’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조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설선당 편액은 조선시대 명필인 이광사가 쓴 것이다.

대웅보전
빛바랜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천년고찰의 기품과 고즈넉함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능가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가운데에 가인봉이 그림 같다.
내소사는 가인봉의 혈에 맺힌 한송이의 꽃이다.
돌층계와 소나무 한 그루 사이로 보이는 대웅전 앞 뜨락에는
고려 때 만든 삼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서 있다.
현판은 조선후기 명필가인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호랑이가 화현한 대호선사가 지었다고 하고,
벽화는관세음 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날아와서
그렸다고 하는 데 그때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지스님이 대웅전 중건을 위해 도편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도편수는 몇 달이 지나도록 법당은 짓지 않고 온종일 목침만 깍더란다.
시자승이 화가 나서 목침 하나를 몰래 감췄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 도편수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대웅전을 짓는데
목침 하나 크기의 목재가 부족했다고 한다.
시자승이 뒤늦게 감춰뒀던 목침을 내놓았으나
화가 난 도편수가 그 목침을 빼고 법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웅전은 어느 구석엔가 목재 하나가 빠져 있는 미완성의 건물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대웅전을 다 짓자 주지스님은 화공을 불러 법당 안을 단청하도록 했더란다.
그런데 화공이 말하길 앞으로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도록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99일 째 되던 날, 호기심 많았던 시자승이
그만 문틈으로 법당 안을 몰래 들여다봤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화공은 보이지 않고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단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시자승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니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집채만 한 호랑이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웅전 안에 좌우 한 쌍으로 그려져야 할 그림이
좌측 창방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고 내용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새를 사찰에서는 관음조라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에 새 울음소리가 나는데 그 새가 관음조라고 한다.
목수나 관음조나 모두 관음보살께서 현신 하신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백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서정주 시인이 읊었듯이 대웅전은 말 그대로 미완성의 멋이 느껴진다.

대웅전의 꽃살문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는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꽃살창에 초화문을 투각하여 붙인 것으로
문짝은 연꽃과 국화꽃으로 가득 수놓인 화사한 꽃밭이며 정교하고 아름답다.
꽃잎이 한잎 한잎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고, 여섯잎 보상화를 조각하여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 문양솜씨가 신비롭다.




백의 관음보살좌상
삼존불을 모신 후불 벽면의 좌상이 국내에서 가장 크며
소원을 빌면서 눈을 마주치면 소원을 이룰수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조선 태종 때 어느 이씨부인이 사별한 남편의 명복을 빌며
묘법연화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 만들었다는 법화경절본사본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걸게 그림 이라는 영산회괘불탱화가 있다.
내소사만큼 볼거리가 많은 사찰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사찰 내의 주요 건물 앞 처마마다
기도불사를 알리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던 것이었다.



해안스님 부도비
우측 연못옆으로 언덕을 바라보면 보도전이 보인다
두 개의 돌이 등을 맞대고 있는 돌다리를 건너면 된다
왼쪽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의 부도와 탑비가 줄을 서 있다


사연 없는 부도와 탑비가 어디 있을까마는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 가 단연 눈에 들어온다.
스님들의 부도밭인데 ‘범부’의 비가 있는 사실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자들의 간곡한 청에 따라 세운 것으로,
당신 스스로 ‘범부’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던 해안(海眼,1901~1974)스님의
수행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비문은 흘림체로 호쾌하게 쓴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뒷면에 음각된 내용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是無生死)’는 선사의 열반송이다.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니, 이곳에는 더이상 생사가 없다.”
얼마나 멋진 오도송인가.


전나무길
길 양 옆에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전나무 향이 속세에서의 찌든 때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 했다.

일주문
일중 김충현이 쓴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일주문이 정면으로 향하지 않고 옆으로 비껴서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능가산의 능가는 석가모니가 능가경을 설한 곳인 랑카(Lanka)의 음역으로
'그곳에 이르기 어렵다'는 뜻을 가진 인도말 이라고 한다.
내소사는 크고 번쩍거리는 절은 아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절이다
상가를 지나면 이어서 주차장
가득 메운 차량으로 주차장은 만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