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수상한 '이장'의세계

이장 제도의 개혁이 곧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

 

/오마이뉴스

 

주간신문에 막 기고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학생들이 등하교하는 길에 가로등이 없거나 어두운 구간이 있어

위험하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한 적이 있다.

 

군청 담당 공무원은 "이장에게 말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모든 민원은 이장이 검토한 다음 읍·면 단위 행정에서 처리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장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답변이었다. 이상했다.


매월 2회 각 읍·면 단위로 '이장 회의'가 열린다. 이장 회의에 참관해 봤다.

행정부서별로 이장에게 지원사업 현황, 정부 정책이나 계획 등을 보고하고

의견을 묻거나 해당 마을에 홍보를 당부한다.

 

가구별로 지급되는 비료나 퇴비조차도 다 이장의 손을 거치고 있었다.

공무원이 동석한 이장 회의가 끝나고 이장들만 따로 남아

별도로 회의를 계속하길래 눈치를 보며 앉아 있었다. 

이장이 농협에서 이장 수당을 받는다고? 금액이 12만 원에서 15만 원이라고?

이장 해외여행? 복잡한 마음을 안고 며칠 후 부면장과 통화를 했다.

 

부면장은 나에게 "무례하다"고 했다. 이장들만의 회의에

기자가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참관했다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수상했다. 이상하고 수상하다면, 본격적으로 알아봐야겠다. 

이장의 역할과 활동 근거와 임무 

먼저 전라북도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비슷한 내용이 많아 핵심만 요약했다. 

 

이장의 역할과 활동은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81조(이장 및 통장의 임명)'와

기초단체마다 관련 조례나 관련 규칙에 근거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81조(이장 및 통장의 임명)    
① 법 제7조 제5항에 따른 행정동의 통에는 통장을 두고,

법 제7조 제6항에 따른 읍ㆍ면의 행정리에는 이장을 둔다.    


② 제1항에 따른 이장 및 통장은 주민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 중에서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읍장ㆍ면장ㆍ동장이 임명한다.    


③ 읍장ㆍ면장ㆍ동장이 제2항에 따라 이장 및 통장을 임명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해당 시장ㆍ군수나 구청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장은 행정리라는 읍과 면의 하위 행정구역인 리(里, 마을)를 책임지는 사람이고,

주민에 의한 선출이 아니라 임명직, 즉 행정직이다. 

 

주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대부분 대동회(가구당 1인으로 구성된 마을회의)에서 선출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정리해 보면 이장은 마을 대동회에서 선출한 사람을

면장이나 읍장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과 별개로 주민들은 마을에서 '대동회를 통해' 뽑았으니까

'마을주민의 대표'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행정이 이런 이중적인 이장의 지위, 즉 실제로 행정직이지만

표면적으로 주민 대표로 보인다는 것을 핑계 삼기 좋다는 것에 있다.

 

마을주민 간담회나 의견수렴 없이 혹은 형식적인 절차만을 거친다 해도

이장과만 소통해서 결정하고 집행해도 별수 없다. 

확대하여 해석해 보자면 주민 대표인 군의원과

행정의 집행자인 군수가 겸직을 하고 있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장은 어떤 일을 할까? 다음은 전북 진안군에서 받은 답변이다. 
 

「진안군 리의 운영 등에 관한 조례」 제2장 이장 제5조(이장의 임무)    
1. 이장은 해당 행정리의 구역에서 읍면장 업무 중 일부를 담당한다.    
2. 이장은 행정리를 대표하며 다음 각호의 임무를 수행한다.    
① 행정시책의 홍보, 지역주민 의견수렴 및 행정기관에 전달 반영    
② 리의 발전을 위한 자주적·자율적 업무 처리    
③ 지역주민의 화합단결과 이해조정에 관한 사항    
④ 그 밖에 지역주민을 위한 봉사 및 주민편의 증진을 위한 사항     

 

 각 지자체는 조례나 규칙으로 이장의 임무에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내용은 대체로 비슷한데 군산시의 조례를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군산시 이·통반 설치 조례 제5조(이·통장의 임무)     


이·통장은 읍·면·동장의 지도감독을 받아 다음 각호의 임무를 수행한다.     
1. 리·통·반원의 지도     
2. 행정시책의 홍보와 주민여론 요망사항의 수렴 보고     
3. 주민의 거주 이동 상황 파악     
4. 각종 사실의 확인     
5. 지역개발사업 추진 협조 지원     
6. 리·통·반원의 비상연락, 훈련     
7. 전시 홍보 및 계도(전시에 한함)    
8. 전시 자원의 동원과 생필품 보급    
9. 마을공동체 형성을 위한 보건ㆍ복지도우미 역할 수행    
10. 기타 법령에 의하여 부여된 업무 및 읍·면·동 행정수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  

 

이장 제도는 일제가 식민 통치 수단으로 기존의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주민들을 감시·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문제는 아직도 이장 회의자료에 버젓이 '주민 동향 파악' 임무가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회의자료를 보며 '주민 사찰'을 떠올리는 것은 과한 생각일까?

 

 더군다나 이장을 거치지 않고 시행되는 사업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이런저런 정부 정책에 따른 지원 하나라도 더 듣고 신청하려면

이장과 대립할 수 없는 게 농촌 주민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장과의 친밀도나 이장의 성향에 따라

마을살이가 달라진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마을 주민 대표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이장들은 만족스러울까?

자기 농사일도 바쁜데 마을 일까지 챙겨야 한다.

 

그러니 정작 제대로 '이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마을에서는 서로 미루려는 분위기다.

물론 투명하고 공정하게 주어진 직분을 잘 수행하는 이장도 많이 있다.  

 

"지금까지 20년을 했는데 더 하려고 하는 걸 내가 막았죠.

그랬더니 자기 말 잘 듣는 사람, 저기 뭐냐 러시아 푸틴처럼,

바지 대표를 내세운 겁니다. 바지를 내 세우고 마을 방송도 자기가 하고 섭정을 해요.

그러다가 다시 자기가 또 하는 거지."
"한 달에 한 번은 해야 하는 동네 회의도 안 해요." 


"보조사업 신청하려고 했는데, 자기랑 친한 사람들한테는 미리 다 알려주고

신청도 받아주고 내가 하려니까 신청 끝났는데요,

이래. 이장이 행정의 정보를 주민 모두에게 공유해야 하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한테만 정보를 줘요." 


"마을 가꾸기 사업도 동네 사람들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이장이 뽑은 몇 사람이 담합을 해서 해요.

일당 나누어 먹기지 뭐. 그렇게 동네일하고 나서도 회의 한번 안 했어요." 


-전북 진안군 성수면 00리 주민 Y씨 사람들은 이장을 '소통령'이라고 부른다.

나라에 대통령이 있는 것처럼 마을에는 이장이라는 소통령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는 정책들과

그런 정책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우리네 삶이 연상됐다.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주민들의 힘에서 나온다.

또한 제도로 주민들의 참여가 반영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렇다면 마을에 주민들의 힘이 있을까? 이장이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를 때

주민들이 그를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할까?     

 

나라에 국회의원이 있고, 도에 도의원, 시에 시의원, 군에 군의원이 있는 것처럼,

읍·면, 마을에도 법으로 보장되는 신분으로써의 선출직 주민대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보통, 직접, 비밀투표의 원칙에 따라 모든 주민이 참여하는 과정을 거쳐서.

 마을에서부터 무너진 민주주의가 더 큰 곳에서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이미 여러 의견과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크게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이장 제도를 개혁해 존속하자는 의견과 '주민자치회' 제도를 활용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오래된 이장 제도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선

굳어진 제도를 뿌리부터 바꾸지 않으면 그 실효성을 장담할 수 없다. 

 

주민자치회 활용주민자치회는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 체제 개편에 관한

특별법' 제27조에 따라 읍·면·동에 설치된다.

 

특별법에 따르면 주민자치회에 위임·위탁할 수 있는 사무와 위원에 관한 사항은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행정안전부는 지자체의 조례 제·개정에 도움을 주고자

주민자치회 표준조례를 만들었다.

 

기존의 '주민자치위원회'와 '주민자치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안건의 상정부터 마을 자치 계획까지 모두 주민이 직접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주민들의 직접 투표를 통해서. 

 

① 주민총회에서 면 단위 각종 사업과 관련해 심의와 토론이 필요한 안건 결정 

② 주민들 스스로 수립한 자치 계획을 주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 

③ 찾아가는 투표 및 상설투표소를 운영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유도   큰사진보기

 

이미 마련된 주민자치회 표준조례를 참고해 지자체별로 주민자치회 조례를 만들면 된다.

선거를 통해 주민자치회를 구성할 수만 있다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제도는 언제나 형식일 뿐, 내용은 주민이 채워야 한다.

주민자치회를 위한 선거와 총회 등 활동 과정이

주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높일 수 있다. 물론 주민교육도 필요하다.

이제 이장은 마을행정직으로 마을사업의 실무를 담당하면 된다.

권한이 없어지니 그것을 행사하면서 생기는 불미스러운 일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중요한 사업과 민원은 마을자치회가

공론의 장에서 투명하게 결정하면 깔끔하다.

주민들은 할 말이 있으면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마을자치회에 출석해 발언하면 된다.

시민의 권리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민주주의는 시민의 참여 없이 이뤄질 수 없다.

내가 나의 권리를 찾는 것에서부터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 시작된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기능 위주의 배울 거리만 넣지 말고

기초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주민역량 강화 교육을 배치하자.

 

의무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신의 권리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행사하려는

주민이 많을수록 마을은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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