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壇), 하늘을 향한 성소(聖所)

고대부터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기도해 왔다. 신앙의 대상을 만나거나 기리기 위해 높은 곳에 단을 쌓거나 절이나 교회, 사원을 지었다. 단(壇)은 믿음의 대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장소를 말한다. 우리나라 단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봤다.


태백산 천제단 중 천왕단 [사진/조보희 기자]
태백산 천제단 중 천왕단 [사진/조보희 기자]

 

 

하늘에 제(祭)를 지내는 장소로는 높은 곳이 제격이다. 강화도 마니산, 강원도 태백산, 황해도 구월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제(天祭) 장소다. 세 곳 모두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하늘을 우러르고 기도하기 좋다.

이곳들의 공통점은 우리나라 시조(始祖)인 단군(檀君)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신화에 따르면 천제(天帝)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정상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고, 이후 웅녀와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 아사달(황해도 구월산) 또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단군은 강화도 마니산과 강원도 태백산에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 태백산 천제단, 민족의 천제 장소

 

태백산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은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1천300리를 흐르고, 북쪽 검룡소에서는 한강이 발원해 서해까지 흘러간다. 태백산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국토의 근간을 이루며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태백산은 이름부터 제천의식과 관련이 있다. 하늘에 제를 올리는 산을 '밝은산'(白山)이라고 한다는데 태백산(太白山)은 '크고 밝은 산'이란 뜻이다. 이름으로 유추해 볼 때 태백산은 예로부터 최고의 천제 장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백산 천제단의 축조 시기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천제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7대 왕 일성 이사금(재위 134∼154년)이 139년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하고서 태백산에 친히 제사 지냈다"고 나오고, 15대 기림 이사금은 300년 "3월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때 태백산은 중사(中祀, 나라에서 지내던 대사(大祀) 다음가는 제사) 5악(五岳, 국가 제사를 지내던 다섯 산악) 중 하나로 이용할 정도로 신령스럽게 여겼다.

이곳 제의의 대상은 시대마다 달랐다. 신라 때는 단군과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지만 고려 때는 산신을, 조선 전기에는 천왕(天王)을, 임진왜란 이후에는 다시 단군을 모셨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기원의 대상이 달라졌던 탓이다. 제관도 시대에 따라 달랐다. 신라 때는 왕이, 고려 때는 국가의 관리가, 조선 시대에는 지방 수령이나 백성이 천제를 지냈다.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이 백마를 제단에 올려 제사를 지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이 천제를 올리기도 했다. 오늘날 천제단은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민간신앙의 성지로 이용되고 있다. 매년 개천절에는 천제가 봉행된다.

 

 

태백산 장군단 [사진/조보희 기자]
태백산 장군단 [사진/조보희 기자]

 

 

태백산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자료 제228호)은 영봉(1,562m)의 천왕단(天王壇)을 중심으로 북쪽 장군봉(1,567m)의 장군단(將軍壇), 남쪽 문수봉 가는 길에 있는 하단(下壇)으로 구성돼 있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자연)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중심 제단은 천왕단이다. 사각형 기단 위에 하늘이 뚫린 타원형으로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다. 이런 형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는 동아시아 전통 우주론에 따른 것이다. 천왕단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5m, 앞뒤 폭 8.26m로, 산 정상에 있는 제단 중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남쪽에 마련된 돌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북쪽을 향해 둥그렇게 쌓은 단 위에 다시 사각형으로 쌓은 단이 있다. 단 위에는 붉은색 한글로 '한배검'이라 새긴 비가 서 있다.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때마침 이곳을 찾은 이들이 천왕단에 제수를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명태포, 과일, 떡, 술 등을 제단에 올리고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려 기도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많은 무속인이 태백산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군단은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둘레 20m, 높이 2m 정도

의 사각 모양 제단으로 천왕단보다 규모가 조금 작다. 역시 남쪽에 돌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기원의 대상은 장군 혹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누구를 기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단은 천왕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가파른 내리막길로 300m 정도를 가면 나타난다. 어른 키 높이로 쌓은 사각형 제단으로 북쪽을 제외한 3면에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땅에 제사를 지내는 이곳은 현재 그 기능을 잃었다고 한다.

 

겨울 태백산은 눈꽃 산행의 최고 명소다. 천제단을 돌아보면서 새하얀 태백산을 만끽하는 것도 좋겠다. 장군봉 부근에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버틴다'는 주목의 국내 최대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특히 겨울철 주목 군락지의 상고대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

천왕단 바로 아래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전 한성부윤 추익한이 꿈에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가는 단종을 만났는데 그날 단종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단종이 이렇게 태백산 산신령이 됐다고 해서 매년 음력 9월 3일 제를 지내고 있다. 비각은 1955년 건립됐다. 단종비각 아래 망경사 입구에는 용정(龍井)이 있다. 예부터 이곳 물로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해발 1천470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이다. 당골광장 인근에는 단군을 모시는 단군성전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단군제례를 지내고 있다.

태백산 정상까지는 유일사 매표소나 당골광장에서 1시간 30분∼2시간 걸린다. 유일사 등산로는 시간이 적게 걸리는 반면 가팔라 힘이 많이 들고, 당골광장 등산로는 힘은 덜 들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무속인이 마니산 참성단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무속인이 마니산 참성단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조보희 기자]

 

◇ 마니산 참성단, 단군이 세운 성지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부근에 자리한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는 마니산을 마리산(摩利山)으로 부르는데 마리는 머리를 뜻한다. 한반도 서쪽 끝자락에 있는 작은 산을 왜 머리산으로 불렀을까. 그만큼 이곳이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해발 469m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참성단(塹星壇, 사적 제136호)이 있다. 참성단은 '마니산 제천단'이라고 부른다. 참성단은 지름 8.7m의 둥근 기단 위에 자연석을 이용해 한 변의 길이 6.6m, 높이 6m로 쌓은 사각형 제단이다. 이곳에도 천원지방 사상이 투영돼 있다.

실제 단군이 이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에 임금이나 제관이 천제를 지냈고, 조선 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 조선 인조 17년(1639년), 숙종 26년(1700)과 43년(1717)에 보수하거나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에서 오래도록 관리하며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참성단을 신성하게 여겼던 곳으로 보인다. 현재 참성단에서는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열리고, 칠선녀가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펼쳐진다.

참성단에 왔다면 주변 풍광도 감상하도록 한다. 정상에서는 강화도의 사면을 두른 바다와 김포의 너른 뜰, 영종도가 발아래 펼쳐진다. 참성단 축대 위에는 커다란 소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50년 이상 비바람 속에서 참성단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무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502호로 지정돼 있다.

참성단에서 함허동천 등산로 방향에는 참성단 중수비가 있다. 커다란 바위 면에 새긴 중수비에는 조선 숙종 43년 5월에 강화유수 최석항이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선두포 별장과 전등사 총섭승에게 명해 공사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마니산에서 북동쪽 5㎞ 지점의 정족산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 사적 제130호)이 있다.

마니산은 새해 해돋이 명소로도 인기가 높다. 산행은 상방리 매표소와 함허동천 매표소에서 출발하는데 참성단까지 왕복 3시간 내외가 걸린다. 함허동천 등산로는 바위 능선을 지나야 하므로 겨울에는 상방리 매표소를 이용해 오르는 것이 좋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사직단의 안쪽 공간 [사진/조보희 기자]
남서쪽에서 바라본 사직단의 안쪽 공간 [사진/조보희 기자]

 

◇ 사직단, 백성을 위한 제단

한양도성을 보면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宗廟)가,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 사적 제121호)이 들어서 있다. 이는 고대 중국 주나라의 기술서인 '고공기'(考工記)의 도성과 궁궐에 관한 규정 중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른 것이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있는 법궁과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신인 직(稷)에 제사를 지낸 사직단은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졌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이 세 가지는 바로 국가 자체였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라고 하는 대사가 그냥 나온 말은 아닌 듯하다.

 

'社稷壇' 현판이 걸린 대문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담장이 사각형으로 두른 공간이 나타난다. 담장의 사면(四面) 가운데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안쪽에는 다시 사각형 담장의 사면에 홍살문이 있는 구조다. 홍살문 8개는 이곳이 그만큼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직단의 정문은 북측 바깥쪽에 삼문(三門)으로 조성한 북신문(北神門). 바로 토지신과 곡식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서쪽 문으로는 임금이, 남쪽 문으로는 악공과 일무(佾舞)를 추는 이들이 드나들었다. 북신문에 들어서면 왕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도(三道)가 제단을 향해 뻗어 있다. 삼도 중간에는 돌을 깐 사각형 공간이 있는데, 제사를 지낼 때 임금이 절을 하는 판위(板位)다. 하지만 위치가 잘못됐다. 신이 이동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복원이 잘못된 탓이다. 사직단 대문도 1962년과 1973년에 도로를 확장하며 뒤로 24m가량 옮겨진 상태다. 사직단은 이전에도 일본에 의해 두 번이나 훼손됐다. 임진왜란 때는 불에 탔고, 일제강점기에는 시설이 훼손되고 공원으로 변질됐다.

 

안쪽에 있는 홍살문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제단이 나타난다. 북신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인 토지신을 모신 사단, 왼쪽이 곡식신을 모신 직단이다. 두 제단은 돌을 3층으로 쌓아 올렸는데 천지인을 상징한다. 사단 위에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는 둥그런 돌이 박혀 있다. 전국에 있는 350여 곳 사직단 중 유일하게 이곳에만 돌이 박혀 있다고 한다. 이 돌의 이름은 '석주'(石主). 사직의 주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단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인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동쪽에 청토, 서쪽에 백토, 남쪽에 적토, 북쪽에 현토, 중앙에 황토 등 다섯 색깔의 흙을 깐 후 황토로 덮었다고 한다. 직단에서는 오곡의 우두머리로 취급되던 기장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에서는 봄·여름·가을·겨울 네 번의 정기 제사와 기우제, 공제, 위안제 등 다양한 비정기적인 제사를 지냈다. 제사 때는 소, 양, 돼지의 피와 가죽을 제수로 사용했다. 두 제단의 북쪽 바닥에는 제물을 바치며 신을 부르는 사각형 구덩이가 있다.

 

사직단은 현재 대문, 제단, 안향청 등을 제외한 공간이 사라지고 없다. 문화재청은 오는 2027년까지 전사청, 중문, 월랑 등을 복원할 예정이다.

 


 

삼문을 통해 바라본 환구단 황궁우 [사진/조보희 기자]
삼문을 통해 바라본 환구단 황궁우 [사진/조보희 기자]

 

 

◇ 환구단, 고종의 의지 담긴 건축물

서울광장 남동쪽 소공동 프레지던트호텔 뒤편에는 환구단(사적 제157호)이 있다. 이곳은 고종황제가 1897년 10월 12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한 장소다. 고종은 이때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다.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1910년 8월 29일까지 이어졌다.

 

고종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2월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환구단 공사를 명했다. 고종은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고 일본과 대등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새롭고 튼튼한 나라를 다시 만들기 위한 의지를 담으려 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3층 제단인 환구단은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 둥글게 지어 원단(圓壇)이라고도 불렀다. 환구단 조성 2년 후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축하고, 1902년에는 석고(石鼓)를 세웠다. 대한제국 시절 환구단 영역은 지금의 웨스틴조선 호텔 부지를 포함했다. 일제는 1913년 철도호텔을 짓기 위해 황궁우만 남기고 주요 시설물을 없애버렸다. 현재 이곳에는 황궁우와 석고만 남아 있다. 환구단은 바로 웨스틴조선 호텔 자리에 있었다.

 

환구단의 부속건물인 황궁우는 천신과 지신,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안치한, 석조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 건물이다. 고종은 태조 이성계를 추존해 태조고황제로 삼고 이곳에 위패를 봉안했다. 황궁우 남쪽 환구단으로 이어지던 자리에는 석조 삼문(三門)이 서 있다. 삼문 계단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쌍룡과 법과 정의를 뜻하는 해치가 놓여 있다. 두 동물에는 전제 황권과 법치주의를 향한 고종의 바람이 담겨 있다.

 

황궁우 남쪽에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세운 돌로 만든 북 3개가 놓여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는 용 무늬가 정교하게 양각돼 있다. 석고 뒤편 계단을 내려가면 환구단 정문이 나타난다. 이 문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다가 2007년 서울 우이동에서 발견돼 2009년 제자리로 이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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