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군, 조선시대 선비정신 '곡운영당' 150년만에 복원
강원 화천군이 조선시대 선비정신과 문화를 상징하는 '곡운영당(谷雲影堂)'을 150여 년 만에 복원했다.
화천군은 21일 사내면에서 제12회 김수증 추모제 겸 곡운영당 준공식을 했다.
곡운영당은 학계와 지역사회에서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돼 화천군이 지난 5월부터 본격적인 복원에 나섰다.
복원된 곡운영당은 59.4㎡ 면적의 목조 제실 1동과 화장실 등을 갖췄다.
화천군은 또 오류가 있던 기존 비문을 바로잡아 '곡운 김수증 추모비'를 새로 제작해 설치했다.
곡운영당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김수증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인 1704년(숙종 30년)에 화천지역 선비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에 따라 1868년 훼손됐지만,
화천군의 복원작업 끝에 150여 년 만에 부활하게 됐다.
화천군은 사내면 유도회 주최로 매년 영당 터에서 열리던 곡운 김수증 추모제가
학문적, 역사적 평가에 걸맞은 위상을 갖추게 됐다고 밝혔다.
영당 터 인근 삼일리에는 김수증이 1689년 기사환국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활동하던 화음동 정사지(華陰洞精舍址) 터도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성리학과 조형예술을 엿보는 중요한 유적지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화천군은 이번 복원작업을 계기로 곡운구곡으로 대표되는 사내면 일대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곡운구곡을 답사할 때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은 곡운정사지(谷雲精舍址)이다. 김수증이 화천에서 처음 거주하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왜일까? 나도 몇 번이나 지나치곤했다. 온통 곡운구곡에 정신이 팔려서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설치되지 않은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곡운구곡은 커다란 돌에 각각의 명칭을 써서 길가에 세워 놓았지만 곡운정사지에 대한 것은 없다.
설령 관심을 갖고 정사터로 가보려 해도 진입로를 찾을 수 없다. 번번히 개인 소유의 밭을 통과하곤 했다. 나중에 주민에게 물어보니 곡운구곡 중 7곡인 명월계 표지석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폐철수집하는 곳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어와야 한다고 가르쳐준다.
화음동정사지는 송풍정과 삼일정 등이 복원되고, 터는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지만 관리가 되는 것에 비해 곡운정사지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복잡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조속히 체계적으로 복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답사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 곡운정사지는 문헌자료와 유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곡운정사가 주목받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거주지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빈약한 자료를 중심으로 곡운정사를 재구성해 본다. 먼저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 후, 곡운정사에 딸린 건물들을 찾아 발걸음을 시작한다.
귀운동(歸雲洞)이라 불리게 된 석실(石室)
하나의 바위벼랑을 돌아드니 고여있는 물이 맑고 깊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간에서 용연(龍淵)이라 부르는데, 가물면 마을 사람들이 제사지내며 빈다. 그래서 와룡담(臥龍潭)이라 이름한다. 靑嵐山(청람산)의 중맥(中脈)이 여기에 이르러 다한다. 울창한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와 동북쪽을 베고 서남쪽을 향하며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동서로 수백 보이고 남북으로 백여 보이다. 물의 형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활을 당긴 형세이다. 그 안은 평탄하고 넓으며 온화하고 그윽하여 농사지으며 살만하다. 화악산의 푸른빛이 책상을 마주하는 듯하다. 그 앞에는 용담(龍潭)이 있어 귀운동(歸雲洞)이라 하였다. 뒤늦게 마을사람들은 옛날에 석실(石室)이라 부른다는 것을 들었다. 이곳은 도산석실(陶山石室)과 부합함이 있어 매우 기이하였다. 그래서 신석실(新石室)로 불렀다. (김수증(金壽增), 「곡운기(谷雲記)」, 『곡운집(谷雲集)』)
곡운정사가 있던 곳의 본래 명칭은 석실(石室)이었다. 그런데 김수증이 터를 잡고 살면서 귀운동(歸雲洞)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중에야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석실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신석실(新石室)이라 불렀다. 석실은 김수증이 화천으로 오기 전에 살던 곳의 지명이다.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일대이다. 경기도의 석실(石室)은 김수증의 할아버지인 김상헌(金尙憲;1570∼1652)에 의해 본격적으로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사당을 중건하였으며 인근에 송백당도 마련하였다. 김상헌은 이곳 석실을 매우 사랑하여 중국 심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에도 석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시로 남겨놓는다. 김수증은 할아버지한테 석실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상을 치른 후 묘 아래에 도산정사(陶山精舍)를 세웠다. 현재 김번의 묘와 김상헌, 김상용, 김수증, 김창협 등의 묘가 있으며,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우연의 일치란 표현을 이럴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석실에서 살던 김수증이 은거지를 택해 들어온 곳이 석실이라니! 지금은 곡운영당이 있던 곳이라 해서 ‘영당동’이라고도 부르지만, 행정구역상 ‘용담리’이다.
김수증은 자신이 터를 잡은 귀운동(歸雲洞)에 대하여 시를 한 수 남긴다.
호젓한 집 깊고 고요하며 옆에는 돌아드는 물굽이,
숲 그림자 산 빛에 가려 어슴푸레한 곳에 있네.
한 구비 맑은 물결은 와룡(臥龍)이 있는 곳이라,
구름을 뿜어내며 늘 보호해주고 푸른 소나무는 잠궈주네.
幽居冥密傍廻灣。林影山光掩映間
一曲澄泓龍臥處。噴雲長護碧松關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날카로운 세상의 인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욕망을 김수증은 자신의 집터를 통해 보여준다. 집 앞의 물굽이는 일차적인 보호막 역할을 하며, 숲도 한 몫 한다. 물속의 용은 구름을 뿜어내며 귀운동을 막고 있고, 물가 소나무들은 관문을 잠그듯이 서 있다. 이만하면 맘 놓고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 이곳이 귀운동이고 지금의 용담리이다. 여기서 김수증은 곡운정사를 짓고 이 땅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귀운동 일대> |
청람산, 그리고 백월봉과 신녀봉
평강(平康)의 분수령(分水嶺)으로부터 백 여리를 달려오다 굽어지면서 김화(金化)의 대성산(大聖山)이 된다. 또 20 여리를 달려 수리산(守里山)이 된다. 그리고 한 갈래가 구불구불 남쪽으로 5리 쯤 가다가 큰 시내에 닿아 우뚝하게 멈춘다. 속명(俗名)이 우아하지 않아서 지금 청람산(靑嵐山)으로 고친다. (「곡운기」)
강원도 어디인들 산이 없으랴만 여기도 주변이 온통 산이다. 그 중 먼저 주목할 산이 청람산이다. 김수증이 청람산이라 고치기 전에 이름이 있었으나 바꾸었다. 곡운구곡도 중 농수정도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청람산이다. 지금은 등산로를 개발하여 지역주민들과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청람산 정상에 오르면 곡운구곡 중 3곡부터 9곡까지 조망할 수 있다.
용담리 주변에 있는 산 중에 백월봉(白月峰)이 있다. 문헌에만 등장하는 산이라 주변사람들도 모르는 눈치다. 김수증이 곡운 주변의 경관을 읊은 시 중에 등장한다.
청은대(淸隱臺) 주변에 높이 솟은 산
오르니 경운산(慶雲山) 볼 수 있네.
옛 일 추모하자 생각은 끝 없는데
서리같이 흰 달은 허공 속에 차갑네.
淸隱臺邊聳翠巒。登臨可望慶雲山
幽人弔古無窮意。白月如霜碧落寒
청은대는 3곡인 신녀협 북쪽 언덕에 있다. 김시습이 노닐었던 곳이다. 그 옆에 우뚝 솟은 산이 있으니, 바로 백월봉이다. 김수증은 그곳에 올라 자주 경운산을 바라보곤 했던 것 같다. 경운산은 청평사를 품고 있는 산으로 오봉산 또는 청평산을 말한다. 김시습은 청평사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다. 김수증이 백월봉에 오른 까닭은 청평산을 바라보며 김시습을 떠올리고 자신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시습의 절의 정신은 서리같이 흰 달로 은유되어 김수증의 가슴속에 들어왔고, 산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물안골에서 바라본 백월봉> |
2곡인 청옥협을 지나 사창리쪽으로 가다가 왼쪽을 보면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건너편 마을 이름이 물안골이다.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어 물레방아골이라 불렀었다. 김수증은 ‘물레방아골’이란 시를 남긴다.
신녀봉(神女峯) 앞 물레방아 마을,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신선의 마을 같네.
첩첩 산과 깊은 골짜기라 찾을 수 없고,
보이는 건 맑은 물과 돌에 부딪치는 물소리뿐.
神女峯前水碓村。隔溪遙認有仙源。
重巒邃壑無尋處。惟見淸流觸石喧
3곡인 신녀협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신녀봉이다. 청람산과 조그마한 계곡을 끼고 마주하고 있다. 신녀봉도 주변 사람들에겐 이름 없는 뒷산이다. 신녀봉 앞으로 신녀협이 펼쳐지고, 신녀협 조금 아래 시내를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물안교’를 건너면 ‘큰물안골’이다. ‘작은물안골’은 신녀협 앞쪽에 있다. 큰물안골은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던 곳을 물어보니 이사 온 지 10년 남짓 되었다고 하신다. 큰물안골에서 바라본 백월봉은 김시습의 절개처럼 우뚝 서 있고, 왼쪽으로 신녀봉이 다소곳하게 보인다.
<신녀협 뒤의 신녀봉>
<왼쪽부터 청람산, 신녀봉, 백월봉 >
매월당의 시구절을 취한 채미곡
또 동서(東西)에 매월공(梅月公)의 옛 자취가 몇 리가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 근처에 있는 하나의 언덕과 계곡도 당시에 매월공의 지팡이와 짚신이 이르는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사라져버리고 수백 년이 흘러서 나를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공(公)의 시어(詩語)를 취해서, 그 뒤의 작은 골짜기를 채미곡(採薇谷)이라 이름 붙이고 머물러 살 곳으로 삼았다.(「곡운기)」)
채미곡은 곡운정사로 들어가는 통로인 고철 수집하는 곳을 끼고 돈 후, 곧바로 산으로 향하면 된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좁은 농로길은 이내 경사가 급해지더니 바로 포장이 끝난다. 비포장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묵정밭이 오른쪽으로 펼쳐지고, 밭 옆에 조그만 도랑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조그만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이 채미곡이다.
고사리를 캔다는 ‘채미’는 백이(伯夷) 숙제(叔齊) 때문에 유명해졌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은(殷)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를 보고 백이 숙제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막았으나, 무왕은 대군을 끌고 나가 은나라를 무찔렀다. 그러자 백이, 숙제는 주(周)나라에 살면서 곡식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어먹고 연명하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노래가 유명한 「채미가(采薇歌)」이다.
저 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을 폭력으로 갚고도,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우임금 때의 좋은 시절, 홀연히 사라졌도다.
나 어디로 가야하나, 목숨도 이제 다해버렸구나.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 忽焉沒兮
我安適歸矣, 命之衰矣
백이 숙제는 신하의 도리로 그가 섬기는 임금에게 반기를 드는 것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왕이 은나라를 치는 것을 극력 반대한 것이다.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우자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절의를 지킨다. 주나라의 곡식을 먹는 것조차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산에서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연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사리를 캔다는 것은 자신의 절의를 지키는 최소한의 행위이다.
김시습에게 세조는 주나라의 무왕과 같은 인물로 인식된다. 자연스럽게 백이 숙제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그들의 상징적인 행위인 고사리 캐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백이 숙제가 채미가를 불렀듯이, 김시습은 「채미곡(采薇曲)」을 읊조렸다.
산천에서 태평하게 늙어감이 왜 해롭겠는가.
임금 시절에도 허유(許由) 같은 백성 있었네.
수양산의 고사리 맛 달기가 꿀 같으니,
천종(千鍾)으로 이 몸 속박함이 어찌 부럽겠는가.
山澤何妨老大平。放勳時有許由氓。
北山薇蕨甜如蜜。何羨千鍾縛此生
<채미곡>
현실에서 무서운 흡인력을 가진 물질적인 힘은 모든 가치를 초라하게 만들며 빨아들인다. 물질의 노예가 되었으나 알지 못하고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싸우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현실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물질적으로는 빈한하지만 그것을 즐긴다. 그 함은 자신의 의(義)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시습을 평소 존경한 김수증은 용담리 뒷산의 조그마한 골짜기에 ‘채미곡’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곡운구곡
제1곡 방화계
제2곡 청옥협
제4곡 백운담
제3곡 신녀협
제5곡 명옥뢰
제6곡 와룡담
제7곡 명월계
제8곡 용의연
제9곡 첩석대
벽운계와 명옥뢰, 그리고 조운기(釣雲磯)와 설운계
골짜기의 물중에 큰 것은 대여섯 갈래이다. 모두 서북쪽 수 십리 안에서 발원하여 청람산 서쪽 치우친 곳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또 하나의 시내는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다가 그 아래로 흘러 들어간다. 이 시내는 화악산에서 나온 것이다. 골짜기 물이 흐르다가 합쳐져 큰 시내가 된다. (「곡운기」)
곡운구곡의 고장인 사창리는 산의 형세에 따라 흐르는 물들이 합쳐져서 큰 물줄기를 만들며 구불구불 흘러간다. 사창리 일대를 흐르는 물의 공식 명칭은 ‘지촌천’이다. 큰물줄기는 공식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에서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김구(金構;1649~1704)는 그의 문집인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에 남긴 「동행일기(東行日記)」 에서 곡운정사를 끼고 도는 시내를 ‘보살피천(菩薩陂川)’이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은 『산수심원기』에서 ‘저오수(齟齬水)’라 적고 있고, ‘사탄천(史呑川)’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밝힌다. 곡운정사 주변의 시내는 두 곳에서 합쳐진다. 먼저 9곡 첩석대 위쪽 고삽교 부근에서 합쳐져 흐르다가, 7곡인 명월계 아래인 영당교를 자나자마자 화악산에서 출발한 물과 만나면서 큰 흐름을 만든다. 김수증은 시내 곳곳의 특징을 세심하게 관찰한 후 각각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먼저 벽운계(擘雲溪)가 있다. 1673년에 지은 「산중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걸어 나가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백여 보 갔다. 소나무 숲 사이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는데 물이 그 가운데에서 쏟아지니 매우 맑아서 벽운계(擘雲溪)라 하였다. 그 위에 또 뛰어난 곳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융의연(隆義淵)이라 한다.”
위 기록에 의하면 벽운계는 융의연 아래에 위치한 곳이 틀림없다. 김수증은 「곡운기」에서 “북쪽 모퉁이로 수백 보를 가면 너럭바위가 있어 이리저리 거닐만하다.”고 말하며 그곳을 명월계(明月溪)라 부르고 있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동일한 곳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을 처음에는 벽운계라고 하다가 나중에 명월계로 바꾼 것 같다.
곡운구곡 중 5곡인 명옥뢰(鳴玉瀨)는 원래 곡운정사 주변에 있었다. 김수증은 「산중일기」에서 명옥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냇가로 걸어 나갔다. 수석(水石)이 아름답고 뛰어나다. 이곳은 앞서 아직 찾지 않았던 곳이다. 바로 곡운정사 앞에 있다. 와룡담은 아래에 있다. 위아래의 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눈 앞으로 들어온다. 새로 명옥뢰(鳴玉瀨)라고 하였다."
1673년 4월 14일의 기록이다, 3일 후 4월 17일 오후에 김수증은 명옥뢰(鳴玉瀨)로 나가서 농수정의 형세를 두루 보고, 물가의 버드나무와 잡풀을 베어내니 넓고 조용하며 깨끗하게 탁 트였다고 하였다. 「산중일기」에 의하면 명옥뢰는 와룡담 위에 있는 여울을 가리킨다. 그러나 곡운구곡이 확정될 때 현재의 5곡에게 명옥뢰란 이름을 넘겨주었고, 지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원조(?) 명옥뢰는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외룡담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곡운정사 인근 시내에 낚시터인 ‘조운기(釣雲磯)’가 있다. 지금은 어디인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김수증의 곡운제영 중 「조운기」란 제목으로 한 곳을 차지하고 있다.
늙은이 날마다 일 없어
차가운 곡운의 시내에 낚시 드리우네.
낚시질 스스로 멋 있으니
푸성귀 밥상 싫어해서가 아니네.
山翁日無事。垂釣雲溪寒
此間自有趣。非關嫌菜盤
답사 때문에 용담리를 여러 번 방문하였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쳐지나간 적이 더 많았다. 주차할 곳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6곡인 와룡담을 보기 위해서 군부대 입구 조그만 공터에 세워놓아야 했다. 곡운구곡 대부분이 이렇다.
와룡담을 볼 때마다 그 주변에서 늘 낚시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여름에는 그늘막을 설치하고 앉아 있곤 했다. 「조운기」를 읽을 때 불현 듯 그 광경이 생각났다. 김수증이 말한 낚시터는 와룡담 주변이 아닐까?
<벽운계>
<원조 명옥뢰>
곡운정사(谷雲精舍)와 비석
내가 골짜기 가운데로 가서 집을 지었다. 경술년(庚戌年;1670년) 가을에 시작하여 몇 년 사이에 겨우 일곱 칸의 띠집을 지었다. 을묘년(乙卯年;1675년) 겨울에 온 집안이 와서 살았다. 띠집을 지은 후에 또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편액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했다. 또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좌우에 아이들의 방을 짓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의 부속 건물을 간략하게 구비했다. (「곡운기)」)
김수증은 1670년에 곡운에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여 몇 년 걸려 일곱 칸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1675년에 온 집안이 이사를 온다. 일곱 칸의 띠집을 지은 후,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곡운정사(谷雲精舍)라고 편액을 걸었다. 그런데 김수증을 소개하는 몇몇 자료들에서 1차 거주지를 농수정사(籠水精舍)라고 일컫는 것은 왜일까? 농수정사라고 표현된 기록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곡운정사를 나중에 농수정사라고 바꾸었다고 소개하는 글도 있지만, 이것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김수증은 송시열에게 편지를 써서 곡운정사에 대한 기문(記文)을 요청하였고, 송시열은 1671년 6월에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짓는다. 송시열의 「곡운정사기」 중 일부분을 살펴보도록 한다.
《 매월당의 시가 매우 많은데 미궐(薇蕨)이란 글자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그 골짜기 이름을 채미곡(採薇谷)로 고쳤다. 그리고 한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서 이름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하고는 매월당의 화상을 봉안한 뒤에 마을 사람들과 맑은 샘물을 떠서 제향(祭享)할 계획이었으나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몇 칸 띠집을 짓고 조만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휴식할 곳으로 삼았으니, 이는 장차 차례로 실현될 일이다.
연지(延之;김수증의 자)가 크게 탄식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수는 봉래산(蓬萊山) 만폭동(萬瀑洞)을 첫째로 친다. 그러나 수석(水石)이 평평하고 골이 넓어서 노닐며 서성거리고, 살면서 농사지을 만하기로는 저 만폭동이 이 곳보다 못하다. 더구나 매월당의 유적이 여기에 있으니, 내가 터를 잡아서 의지할 곳으로 삼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하고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記)를 청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것은 이치이고, 늦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는 것은 시세(時勢)이다. 지금 이 사탄(史呑, 사창리)은 산이 우뚝하고 물이 흐른 지 몇 천만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매월당의 유람하던 곳이 되었다. 또 매월당과 함께 파묻혀 버린지 다시 몇 해 만에 연지(延之)에게 발견되었다. 지금부터 장차 나타남은 있어도 영원히 숨겨짐은 없을 것을 나는 기대한다. 대개 발견이 더딘 것은 항상 오래 전하게 된다.
나는 이어서 연지에게 고할 것이 있다. 연지가 이미 못 이름을 ‘와룡담(臥龍潭)’이라 했으니, 주희가 여산(廬山) 와룡담에 암자를 지어 제갈무후(諸葛武侯)를 봉안하던 고사를 모방하지 않을 참인가? 나는 연지의 서원(西原)의 자허(子虛)가 되고 싶지만 이미 늙어서 그럴 수 없다. 주희의 와룡암시(臥龍庵詩)를 적어서 보내니, 이후에라도 완성하게 되거든 이것을 벽에 걸어 두기 바란다.”》
곡운정사가 자리 잡은 귀운동에 대해 김수증은 금강산의 만폭동보다 더 낫다고 송시열에게 말한다. 소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사지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한다면 매월당의 자취가 있는 것이다. 매월당에 대한 그의 숭모를 엿볼 수 있다.
송시열은 곡운정사 뿐만 아니라 주희의 고사처럼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사당도 지을 것을 부탁한다. 중국 여산(廬山)의 와룡담(臥龍潭) 곁에 와룡암(臥龍庵)이란 암자가 있었으나, 무너져 버리고 터만 남게 되었다. 이에 주희는 사재를 들여 서원(西原)에 살고 있는 은자(隱者)인 최가언(崔嘉彦)을 시켜 중수하게 한 후, 제갈량의 화상(畫像)을 안치하게 했다. 주희의 이러한 일을 상기한 것이다.
송시열이 「곡운정사기」를 지을 당시 농수정도에 그려진 것처럼 곡운정사가 완비된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일곱 칸의 띠집을 지은 후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방을 만들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도 지었다. 조세걸이 1682년에 그린 농수정도(籠水亭圖)에 건물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곡운정사에는 이밖에도 비석이 있었다. 이하곤은 1714년에 뜰 가운데 조그만 돌 비석이 서있는데, 송시열의 기문과 주자의 와룡담(卧龍潭) 시를 새겼는데,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유봉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기록하였다. 뜰 옆에 조그만 비석이 있는데 우암의 기문을 새겨놓았으나 글자가 마모되어 흐릿해져 읽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남유용도 비에 새긴 우암이 지은 글을 읽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곡운정사가 있던 자리는 현재 개인 소유의 집과 밭, 그리고 비닐하우스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대체적인 추정일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 조사되지 않았다.
<곡운정사터>
농수정에서 시비를 잊고 싶구나
곡운정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농수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수증 스스로도 밝혔듯이 그가 곡운에 온 이유가 농수정에 오롯이 담겨있다. 「농수정소서(籠水亭小序)」에서 그는 속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 "거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사람들이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하여/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 이 시는 최치원의 시로 가야산 홍류동에 새겨져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시를 애송하였다. 어쩌다 물이 돌에 부딪쳐 솟구치는 곳을 만나면 높은 풍모를 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뜰에 난 풀을 보면서 풀을 뽑지 않은 주렴계의 뜻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경술년(庚戌年) 봄에 강원도의 곡운을 차지해 이미 정사(精舍)를 짓고 시내 구비치는 곳으로 나가 농수정을 지었다. 아! 고운(孤雲)이 이 시를 지은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 뜻을 취한 것은 시비를 가리는 천성을 없애려는데 가깝지 않겠는가? 아아! 혼돈(混沌)이 죽자 온갖 거짓이 날로 번성하여, 사람이 처음에 받은 것이 녹아 없어져 얻을 수 없다. 세상은 뜨겁고 말 많으니 참된 것을 얻기 어렵다. 불행히도 말세에 태어나 잘잘못이 빈번하니 말썽이 많은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고운(孤雲)이 일찍이 “속세의 요로와 교통하는 데는 눈길을 준 일이 없고(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물외의 청산과 녹수에 돌아갈 때만 꿈꾸었다(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라고 했다. 높이 날아 멀리 갈 수 있으나 오히려 알려질까 두려워했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을 잊는 것에 과감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높은 산 우러르고자 하나 그 사람 멀리 갔구나. 세상 밖의 구름 산, 살고 있는 이곳이네. 수많은 갈래 맑은 물, 산을 두르고 계곡을 떨치니, 시끄러움 이르지 못해, 시비(是非)를 다 잊는구나. 편안하고 한가롭게 노님이여, 내 장차 그 사이에서 늙으리.》
농수정은 겸재 정선이 그린 해악전신첩 30점 그림 중에 곡운농수정(谷雲籠水亭)이란 화제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김창흡은 ‘시끄러움으로 시끄러움을 보내려고 했으니 각각 묘한 이치가 있다’고 그림에 적었다. 정선의 그림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세걸의 곡운구곡도 중 6곡 와룡담도와 농수정도에 남아 있어 농수정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농수정은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673년 4월 이전에는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수증은 계축년(癸丑年;1673년) 4월 17일의 일을 「산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673년 4월 17일 오후. 명옥뢰(鳴玉瀨)로 나가서 농수정의 형세를 두루 보고, 물가의 버드나무와 잡풀을 베어내니 넓고 조용하며 깨끗하게 탁 트였다.”
1673년 4월 이전에 세워진 농수정은 어유봉이 1721년에 찾았을 때, 편액(扁額)과 제판(題板)은 예전처럼 완연하였으나, 처마와 서까래는 많이 퇴락하였다. 100여년 뒤 1820년에 정약용이 찾았을 때는 정자터만 남아 있었다.
조세걸의 그림은 농수정의 모습과 주변의 풍광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문헌으로 전하는 농수정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수증이 ‘남쪽 물가의 소나무 숲이 푸르고 울창하여 정자를 둘만하였다. 그래서 최고운(崔孤雲)의 시어(詩語)를 취하여 농수정(籠水亭)이라고 이름하였다.’고 묘사를 시작했다.
오원(吳瑗:1700~1740)은 “계곡 옆에 산을 기대고 있는데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유달리 그윽하면서도 훤하다.” 고 적고 있다. 이하곤은 “2리 쯤 앞으로 가면 정자가 날개를 편 듯 있다. 바로 곡운의 농수정(籠水亭)이다. 바로 화악산을 마주하고 있다. 아래로 와룡담을 내려다보고 있다. 매우 맑고 그윽하다. 정자 앞에 노송 수십 그루가 푸르고 울창하니 더욱 좋다.”라고 기록한다. 정약용은 “(와룡담) 서쪽으로 농수정을 바라보면 은연히 소나무 숲 사이에 비친다.”, “와룡담은 정자 터의 남쪽 아래에 있다.”고 전해준다. 농수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김창흡의 「농수정기」이다.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 시내 가에 정자를 짓고 농수정이라 하였다. 농수(籠水)는 물로 산을 에워싸는 것이다. 물로 에워싸는 것은 시비가 귀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도 한두 번 그 곳에 가서 보는 것을 다였다. 대체로 깊은 골짜기로 사방이 막혀있고 뒤에 청람산이 있는데, 남쪽의 화악산과 마주하며 서로 묶여있다. 물은 그 사이로 흐르며 한번은 구비쳤다가 한번은 곧게 흐른다. 큰 돌과 흰 돌이 물가에 있다. 물이 부딪치곤 세차게 흐르며 산의 안과 밖을 돌아가니 끝이 없다. 동쪽으로 보아도 물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없고, 서쪽을 보아도 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다."
<농수정도>
농수정 주변은 소나무 수십 그루가 에워싸고 있고, 물가에 있어서 와룡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정확한 위치는 김창흡의 묘사와 ‘물소리로 에워싸다’는 정자의 이름에 걸맞는 곳이리라. 그렇다면 김수증이 처음 명옥뢰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서 직선거리에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농수정에 대한 기록은 풍성하다. 송시열이 「농수정기」를 지었고, 이민서가 뒤를 이어 글을 지었다. 동생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농수정상량문」을 지어 농수정의 의미를 되짚었다.
농수정에 대한 시는 산문보다 더 많다. 그 중 송시열의 시는 농수정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대 세상 피해 숲 속에 있으면서,
이름을 천지 사이에 없애려 하네.
손님도 자못 주인의 뜻 알고,
세상 일 이야기 않고 청산만 대하누나.
夫君逃世在林巒 名姓將無天地間
客至頗知主人意 不談時事對靑山
<와룡담도>
도연명을 꿈꾸던 와운암(臥雲菴)
곡운정사의 여러 건물 중에 와운암(臥雲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와운암에 대한 자료는 단지 시 한 수밖에 없다. 곡운제영(谷雲諸詠) 가운데 와운암을 소재로 한 시는 다음과 같다.
마음이 외물에 흔들리지 않아,
몸은 소나무와 구름 속에 있네.
창문에 바람 불어오니 도연명 같아,
은자처럼 안석에 기대어 있네.
心無外物侵。身在松雲裡
陶然北窓風。聊憑南郭几
중국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이 자기 아들들에게 보낸 글에 “오뉴월 북창 아래 누워 있을 때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내 자신이 곧 복희씨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잡념이 사라졌다.” 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장자(莊子)』에 자유(子游)가 안석에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남곽자기(南郭子綦)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지상의 크고 작은 온갖 바람소리를 예로 든다. 그러면서 그 다양한 소리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각기 지니고는 있지만 조물주의 시각으로 보면 다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생활 속에 일어나는 시시비비의 논쟁도 큰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대답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온갖 잡념을 잊거나, 시비 논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김수증의 마음이 반영된 당호(堂號)가 와운암인 셈이다.
영당터로 가기 위해 직선거리로 가다보니 밭이 나타나면서 길이 없어진다. 바로 옆집 앞에서 겨울 햇볕을 쬐는 할머니가 계신다. 밭을 통과해서 가도 괜찮냐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시며 소리없이 머리만 끄떡이신다. 그리고 이내 햇볕을 쬐시며 조용히 앉아 계신다.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듯 편안한 얼굴의 할머니에게서 도연명의 얼굴이 겹쳐진다.
곡운선생을 기리는 곡운영당
<곡운영당터 원경>
현재 곡운정사가 있던 곳에 남아있는 것은 곡운영당터이다. 근래에 세워진 김수증선생 추모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주춧돌은 풀 사이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몇 개 박혀있다. 그리고 그 앞에 흥학비가 세워져있다. 하나의 돌로 비갓과 비신을 만들었는데 앞면에 ‘부사이공용은흥○비(府使李公容殷興△碑)’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은 판독이 불가능하다. 이용은은 철종 1년(1850)에 증광시 을과에 합격하여 춘천부사, 대사정, 이조참판 등을 지냈는데 1856~1957년에 춘천부사로 재직하였다.
영정을 모셔 둔 사당이 영당이다. 그러므로 곡운영당은 곡운 사후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오원(吳瑗:1700~1740)은 「행곡운기(行谷雲記)」속에서 오후에 곡운선생의 영당에 가서 배알하였다고 적고 있다. 어유봉은 「동유기(東遊記)」에서 숲 있는 기슭에 얌전하게 붉은 칠한 곳을 돌아보니 곡운선생의 영당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남용익은 「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에서 곡운 선생의 사당을 찾아 초상에 배알했다고 적어놓았다. 곡운선생의 영당과 곡운선생의 사당은 동일한 건물을 말하며, 곡운선생의 초상이 걸려있음을 보여준다. 조인영(1782~1850)은 이곳에 들려 제갈공명과 김시습, 김수증, 김창흡에 대한 시를 남겼으니, 네 사람의 영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기록들은 곡운영당이나 사당이라 적고 있는데, 정약용은 곡운서원(谷雲書院)이라 적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당 주변에 서원을 세웠던 것 같다. 영당터에 세워진 흥학비가 이를 말해준다. 정약용의 기록은 사진을 찍듯 자세하다.
" 22일. 약간 흐렸다가 오정이 지나서야 개었다. 일찍 출발하여 서원에 도착하여 여러분들의 화상을 본 다음 차례로 구곡을 보았다. 제1곡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저녁 때 두 고개를 넘어 외창(外倉)으로 돌아와 잤다. 서원은 사액(賜額)되지 않은 곳으로, 곡운이 가운데에, 삼연이 왼쪽에, 명탄(明灘)이 오른쪽에 앉았다. 또 그 왼편 재실에 두 분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곡운과 삼연 두 분의 진영(眞影)이다. 오른편 재실에 또 두 본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곧 제갈무후와 매월당의 진영이다. 또 궤 속에 두 분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우암(尤菴)과 곡운의 아들 성천공(成川公)의 진영이다. 서루(書樓)에 또 공자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으로서 마치 어린아이들의 붓장난 같아 머리를 말[斗]보다 크게 그렸으니 이는 곧 현인의 모양을 형상한 것이나,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된다. 그 나머지의 모든 화상을 약암(約菴)이 배알할 때 같이 따라 들어가 상세히 보았다. 매월당은 머리는 깎고 수염만 있으며 쓴 것은 조그마한 삿갓으로서 겨우 이마를 가릴 정도였고 갓끈은 염주 같았다. 곡운은 우아하고 진중한 체구에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어 조정 대신의 기상이 있었다. 우암(尤菴)은 74세 때의 진영으로서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고 아랫입술은 선명하게 붉었으며 치아가 없으므로 턱은 짧았고 눈빛은 광채가 나서 1천 명을 제압할 만한 기상이 있었다. 삼연은 맑고 부드러우며 정숙한데다가 복건에 검은 띠를 띠고 있어 산림처사(山林處士)의 기상이 있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는 삼각 수염에 이마는 뾰족하고 빰은 활등같이 그려 마치 불화(佛畫)의 명부상(冥府像) 과 같았다. 이것은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 된다. 이곳에 와룡담이 있다 해서 무후의 진영을 걸어 놓았으나 아무런 의의도 없다. 이는 모두가 비천한 습속으로서 과감히 없애야 한다. "
곡운서원이 언제 폐허가 됐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사라진 것 같다. 대원군은 1868년 서원에 나누어준 토지도 세금을 내고, 서원의 장은 지방 수령이 맡아 서원을 주관하는 조처를 시행했다. 1870년에는 1868년의 명령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없애라 하고, 1871년에 "사액서원이라도 한 사람은 한 서원에 배향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거듭 설치한 것은 모두 철폐하라"고 하면서 서원철폐를 단행했다. 이 조처로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사묘(祠廟) 등이 모두 철폐되었다.
곡운서원은 서원의 기능을 상실한 후, 영당의 기능을 다시 담당하였다.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론자이자 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1842~1915)은 1905년 곡운영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강연을 하였다. 「곡운강회에서 ‘연(筵)’자를 얻어서」란 시에 시를 짓게 된 까닭이 자세하다.
"을사(乙巳)년 3월 7일. (중략) 일찍 금계(錦溪)․항와(恒窩)와 함께 곡운(谷雲)에서 강회를 열기로 약속하였기에, 이 달 15일에 곡운으로 달려갔다. 강회에 온 사람이 백 사오십 명이 되었다. 그 날에 다섯 현인을 단에 모시고 향례를 지냈다. 그 다섯 현인은 제갈무후(諸葛武候), 김매월당(金梅月堂), 김곡운(金谷雲), 삼연(三淵), 성명탄(成明灘)이었다. 원래 영당이 있어 삼구월(三九月) 보름에 제사를 지냈는데, 조정의 명령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최면암(崔勉庵)이 그 자리에다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친 후 강연을 시작했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것은 모두 시국의 재앙이 지극하기에 혹시나 대방을 어렵게 하고 우리는 강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꽃피는 제방뚝에서 강회하나니
달 비친 구름 속의 좌석이어라
나이 따라 줄지어 경서 읽나니
경건하게 오현을 모셨어라
풍류를 흥미로 함이 아니라고심하여 화양지맥 이어가려네
무궁한 의미를 보아서인지
샘물이 콸콸 솟아난다네.
綻花堤上會 滿月雲中筵
列齒誦羣聖 薦毛虔五賢
風流非興尙 陽脉苦心牽
看到無窮意 來來有活泉
1940년에 제작된 『강원도지(江原道誌)』엔 곡운영당을 ‘춘수영당(春睡影堂)’ 이라 적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사내면 용담리에 있다. 숙종 갑신년(1704) 건립되었다. 제갈량(諸葛亮), 김시습(金時習), 김수증(金壽增), 김창흡(金昌翕), 성규헌(成揆憲)을 배향하였다. 중간에 철폐되었는데 기해년에 제단을 설립하였다.”
지금도 매년 곡운선생을 기리는 추모제가 화천군 사내면 유도회 주관으로 용담리 곡운영당에서 열린다.
<김수증추모비와 앞 주춧돌> <곡운정사터 원경>
잊혀진 곡운정사지(谷雲精舍址)를 위하여
남아 있어 볼 수 있는 것은 두 점의 그림과 주춧돌 몇 개, 그리고 흥학비이다. 이 자료들을 통해 곡운정사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정사의 주인인 김수증도 이해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적에 남아 있는 자료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충해 준다.
차를 타고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던 곡운정사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나 진입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곡운정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소한의 표지판 조차 없는 것이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성현들을 추모하는 영당의 기능, 후학들의 면학의 장소, 한말 우국지사들의 강연의 장소로 꾾임없이 변화해 가며 그 시대의 역할에 충실했던 곡운정사.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역할을 해야할 지 곰곰이 생각할 때이다.
'사는이야기 > 구암동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천 열병합발전소 준공 (3) | 2017.11.21 |
---|---|
천아트전 (0) | 2017.11.21 |
도로 위 무덤 로드킬(Road-Kill) (0) | 2017.11.19 |
탄생 50주년 맞는 '호반의 도시' 춘천 (0) | 2017.11.19 |
클래식기타줄의 종류 (0) | 2017.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