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禿盡千毫

 

자가 토끼를 잡는 법(搏兎亦全力)

 

모름지기 동파(소식)와 산곡(황정견) 두 시집이

익숙하게 될 때까지 보고 읽기를 천 번 만 번에 이르면

저절로 신명(神明)이 있어 사람에게 계시하여 주게 된다.

 

제일 경계할 점은 마음이 거칠어도 안 되며 또 빨리하려 해도 안 된다.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는 식은 가장 주의해야 한다.

 

으르렁거리는 사자가 코끼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며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最是此事. 別有神解. 然後可以說到. 又不可以口喩筆傳. 須就東坡山谷兩集.

熟看爛讀. 千周萬遍. 自有神明告人. 最忌心麤. 又忌欲速. 又忌赤手捕龍.

獅子頻申. 捉象亦全力. 搏兎亦全力.

 

도진천호(禿盡千毫)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연습과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출전] 완당집(阮堂集) 3권 서독(書牘) 여권이재與權彝齋)

 

[내용] 추사가 절친한 친우인 권이재(權彝齋= 이름 敦仁)에게 보낸

서른세 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나의 글씨는 비록 말 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에 걸쳐 10개의 벼루를 갈아 닳게 했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

 

古人作書別無簡札一體如淳化所刻多晉人書未甞專主簡札是吾東之惡習也吾書雖不足言

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未甞一習簡札法實不知簡札另有一體式

來要者輒以簡札爲言謝不敢而僧輩尤甚於簡札莫曉其義諦也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退筆成塚不足珍 쓰다버린 붓이 무덤같이 수북이 쌓여도 하나도 진기한 일이 아니며

讀破萬卷始通神 만 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신과 통할 수 있다.

 

완당은 이당(怡堂) 조면호(趙冕鎬)에게 주는 편지에서

팔뚝 밑에 309개의 예서 비문이 들어있지 않으면

예서를 하루아침 사이에 아주 쉽게 써내기 어렵다

[不有腕底有三百九碑, 亦難一朝之間出之易易耳]

 

서예가란 모름지기 팔뚝 아래에 삼백 아홉 개의 옛 비문 글씨를

완전히 익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즉 옛 사람들이 남긴 훌륭한 글씨체

삼백 아홉 가지를 임서하여 익히고 배워야만, 마침내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다

스스로 한례자원(漢隷字源)에 들어있는

~위 시대의 예서 비문 309개에 통달하였음을 내비치고 있다.

 

수련과 연찬(與吳生慶錫)

완당에게 서예든 그림이든 작품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은 수련과 연찬이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주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뜻을 알지 못하니 모두 망작(妄作)인 것이다.

 

석파는 난에 깊이가 있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분의 공력이다.

 

[雖到得九千九百九十九分 其餘一分最難圓 就九千九百九十九分 庶皆可能

此一分非人力可能 亦不出於人力之外 今東人所作 不知此義 皆妄作耳 石坡深於蘭

盖其天機淸妙 有所近在耳 所可進者 惟此一分之工也]”

(석파의 난 그림에 쓰다[題石坡蘭卷])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擴充)하여 모질게 정채(精彩)를 쏟아나가면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도달할 수 있네.

나머지 일분의 공부는 원만히 이루기가 극히 어려우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되는 거라네.

[天與聰明 不在貴賤上下南北 惟擴而充之 猛着精彩 雖到得九千九百九十九分

其一分之工極難圓 努力加餐可耳]”

(오경석에게 주는 편지[與吳生慶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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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田耕作

 

 

옛사람들은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명필 한석봉의 일화는 유명하다.

"어머니는 가래떡을 준비하고 아들은 벼루에 먹을 갈았다. 준비되자 어머니가 촛불을 껐다.

'너는 글씨를 써라. 나는 떡을 썰겠다.' 불을 밝히자 석봉의 글씨는 삐뚤삐뚤했으나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했다."

수련이 부족함을 깨달은 한석봉은 더욱 피나는 노력 끝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남겼다.

 

추사(秋史) 김정희도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리 빛나는 훌륭한 작품은 예술가가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내공(內功)을 쌓아가며 부단히 노력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음악에 악보가 있듯이 서예에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필법(筆法)이 있다.

이것을 중국 사람들은 서법(書法)이라 했고, 일본은 서도(書道), 우리는 서예(書藝)라고 부른다.

필법을 모르고 쓰는 글씨는 '붓장난'에 불과하다.

 

서예는 선과 점의 예술이다.

선의 움직임으로 기세와 율동미를 표현하고

붓이 움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점과 선은 먹물의 진하고 엷음,

빠름과 느림, 멈춤 등을 통해 생동감으로 나타난다.

 

서예는 회화와 달리 소위 개칠(고치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붓을 종이에 대고 순간적으로 날아가듯 일필휘지(一筆揮之)해야

기운생동(氣韻生動) 하는 예술적 가치가 살아난다.

 

빠르고 능숙한 운필(運筆)은 수많은 연습 끝에 손에 익는 것이다.

옛날 서당 훈장들은 한 글자를 수백에서 수천 번씩 되풀이해 쓰도록 가르쳤다.

 

서체는 크게 종류별로 볼 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가 서예의 기본 5(五體)인데,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아 수없이 모방하여 쓴다.

이러한 수련 과정을 임서(臨書)라 한다.

 

임서를 하면서 주의 깊게 글씨의 형태, 필획의 간격과 필선의 변화,

무게중심 등을 익히고, 수많은 서예 이론도 공부하게 된다.

 

그렇게 한 서체를 익히는 데도 대략 1만 장 정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본 5체를 모두 익히려면 5만 장을 써야 한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나온다.

수천수만 필의 연습 끝에 조건반사적 필력을 숙달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검도나 학문을 하는데 '수파리(守破離)' 방법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

'수파리'는 선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서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먼저 첫 번째 단계인 '()''가르침을 지킨다'는 뜻으로

모범이 되는 명필들의 글씨를 임서하는 단계다.

 

두 번째 '()'는 기존의 틀을 깨고 독창적인 것을 수련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단계인 '()'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서예가들은 무엇보다 반복된 연습을 중시한다.

연습량에 따라 행필, 능필, 달필, 명필의 글씨 등급이 가려진다.

 

연습은 수양의 과정이기도 했다.

기술만 갖고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 글씨다.

 

예로부터 서예는 쓴 사람의 정신과 사상, 인격과 인품이 다 드러나는 예술이라고 불렀다.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心正則筆正).",

"글씨를 보고 사람을 안다(觀書知人)."라며

사람 됨됨이를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의재필선(意在筆先)이라는 말이 있다. 붓질보다 뜻이 먼저라는 의미다.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왕희지가 한 말이다.

 

서예가는 글씨를 쓰기 전에 반드시 곰곰이 헤아려 보고

어떻게 뜻을 세워서 작품을 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고상한 뜻이 우러나려면 그 바탕에 깊은 학문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사 김정희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라 했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아야 글씨에 문자의 향기가 나고 책의 기운이 풍긴다는 뜻이다.

 

서예는 독창적인 점 하나, 선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백련천마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주 쓰는 말에 심전경작(心田耕作)이란 구절이 있다. 마음의 밭을 간다는 뜻이다.

 

묵향을 맡으며 하얀 종이 위에 좋은 글귀를 쓰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즐겁고 흐뭇해진다.

숲을 지나는 바람은 세파에 거칠어진 내 마음과 생각을 성찰하고,

지저귀는 새소리는 세파에 무뎌지고 때 묻은 내 귀를 씻어주는 듯하다.

그런 생각과 느낌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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