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역병 퇴치법

 

정조 12년인 17885월 나라에 원인 모를 역병(疫病)이 돈다.

정조는 서둘러 책임 있는 관리들을 소집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참석자들이 재미있다.

오늘날 기획재정부 장관쯤 되는 호조판서와 국세청 차장쯤 될 선혜청 당상,

그리고 지방검찰청장 또는 지방경찰청장들로 봐야 할 5부 도사들이 모였다.

거기에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이 함께한다.

 

역학조사와 치료를 담당할 질병관리본부 같은 전문가 그룹은 빠져 있다.

일부러 뺀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도 의사도 없었다.

격리로 창궐을 막고 환자를 보살피는 게 대책의 전부였다.

 

치안과 재정 관계자들이 주요 참석자들이었던 이유다.

도성 안에 역병이 발생하면 성 밖 교외에 병막을 설치하고, 환자들을 격리했다.

이를 출막(出幕)이라 했다.

 

정조는 하교한다.

도성 안에 돌림병이 크게 돌아 5~6일 사이에 출막한 숫자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한성부의 각 부서에 엄하게 일러 환자가 발생하는 대로 즉시 보고하게 하라.

 

빈궁한 백성들은 제 한 몸 덮어 가리기도 어려운데

장마라도 들면 더욱 불쌍하고 근심스러운 일이다.

 

병막에 물자를 넉넉히 지급하고, 사망한 자에게는 특별히 휼전(위로금)을 베풀고

한 사람을 따로 정해 유념해 보살피게 하라.

만일 부지런히 거행하지 않으면 엄벌을 면치 못하리라.

 

보살핌을 제대로 했는지, 현재 앓고 있는 사람과 사망자의 증감에 대해

일에 익숙한 두 사람이 하루씩 번갈아 살펴보고 보고하라.”

 

왕의 국정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이 전하는 내용인데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절절하다.

 

질병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방법도 모르지만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국가 행정력을 최대한 동원하라는 엄명이었다. 지시도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한성부에 환자 규모를 파악해 보고토록 하고, 각 군영에 병막 설치와 물자 제공을 책임지게 하며,

진휼청에는 사망자의 매장비용을 지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국정 총괄기관인 비변사로 하여금 이 과정 전체를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왕의 뜻에 신하들도 부지런히 따랐다.

금위영 관내에서 남부는 출막이 136, 병민이 268명인데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 180,

땀을 내는 사람이 60, 나아지고 있는 사람이 27, 사망한 사람이 1명입니다.”

 

왕은 고삐를 더욱 조인다. “비가 내린 뒤 소생하는 기운이 있어 다행스러우나

천변의 병막이 물에 쓸려 내려갈까 염려스럽다.

내일 다시 낭청을 보내 병막을 고쳐 지은 상황을 두루 살피게 해 보고하라.”

 

진휼청의 62일 보고는 이렇다.

병막이 727, 환자가 1600명인데 병막을 보수하고 새 병막을 짓는 데

가마니 4191, 장대 2103, 그물 309장이 들었습니다.

사망자 454명에게 각각 포 1, 1냥을 지급하고 잘 매장해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같은 구체적 보고는 조선 왕조에서도 유례가 없던 일이다.

그만큼 정부의 적극적 대응과 유관기관들의 유기적 협조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빠른 결실은 당연한 일이다. 719새 환자가 39명으로 현저히 줄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91일 상황이 종료된다.

 

병막은 23, 환자는 29명인데 거의 나은 상황입니다.

비변사 활동을 오늘로 끝내겠습니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역병의 기운이 수그러들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안보 차원에서 왕과 신하들이 혼연일체가 돼 국난을 극복하고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정조는 젊어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의학서 수민묘전(壽民妙詮)도 펴냈다.

 

그 서문에서 정조는 말한다. “사람을 치료하는 이치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가 같다.

폐단의 근원과 실정을 따로 밝혀 처방을 찾는 게 우선이다.”

 

정조가 상상도 못할 의료수준을 갖고도 정조와는 참 다르게 행동한

대통령과 이 정부가 배워야 할 국정철학이다.

 

메르스에게 배워야 할 것들

 

멸균하지 않은 낙타유를 마시면 위험하다는 걸 몰랐다.

기압차를 이용해 외부 감염을 막는 음압(陰壓)병상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기침을 할 땐 팔꿈치로 막아야 민폐가 아니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만 알았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라는 귀에 선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지하철 안에서 재채기를 했다는 이유로 옆자리 아저씨가 나를 째려볼 줄은 상상 못했다.

메르스 쓰나미로 관광객이 절반 이상 줄었다며 울상인 인사동 식당 주인 아주머니나,

사람들이 밖에 안 나오니 차가 뻥 뚫리는 건 좋은데

손님이 30% 떨어져 힘들다며 한숨 쉬는 택시기사님만 하랴.

이 땅에서 자랐는데도 낙타라는 이유만으로 격리당했던 서울대공원 낙타는 또 어떠랴.

 

모두가 모두를 못 믿고, 미워하고, 의심한다. 메르스보다 이게 더 무섭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건 독일 여성과 20세 연하 모로코 청년의 관계를 다룬

1974년작 독일 영화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 전역에서 불안은 나와 내 옆자리 승객,

뒷자리 손님의 영혼까지 좀먹고 있다.

메르스라는 씨앗이 불안을 거름 삼아 적대감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는 듯하다.

 

불안의 철학이라는 게 있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55)는 불안을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인식했다고 한다.

키르케고르 식 불안의 철학엔 희망의 싹이 있다.

그는 인간은 불안의 교화(敎化)를 받아 화해를 이루고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메르스발() 불안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메르스에게 뭘 배웠다고 해야 할까.

서로를 미워하는 법, 째려보는 법만 배우면 왠지 몽골 낙타만큼은 아니어도 억울하지 않은가.

 

 

메르스 사태가 세월호 사고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재난 발생 유형이 다르다보니 주무 부처와 관리 방식은 달라도 위기관리 원칙과 기능은 같아야 했다.

 

공통점은 우선 초기 위기에 대한 정부 인식이 안이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보 공개인데 세월호 때는 틀렸고 메르스는 안 했다는 게 문제다.

셋째는 늑장 대응,

넷째는 지자체, 유관기관과 협력이 제대로 안 됐다는 점,

다섯째는 거버넌스가 민관이 함께 가야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 중심으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