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화 방치, 제2의 메르스 자초한다
/남정호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왕왕 큰 착각을 한다.
1979년 10월 26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역사적인 ‘천연두 박멸’을 선언했을 때도 그랬다.
WHO는 “수천 년간 인류를 괴롭혔던 천연두 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발표한다.
공교롭게도 지석영 선생이 종두 접종을 시작한 지 딱 100년 하고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페스트·콜레라와 함께 최악의 전염병으로 꼽히던 천연두. 한국에선 ‘마마’ ‘두창’으로 불렸던
이 지독한 병은 20세기에만 3억~5억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런 역병을 퇴치했기에 인류는 자만에 빠졌다.
온 세상에 “언젠가 모든 전염병을 정복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넘쳤다.
윌리엄 스튜어드 미국 공공보건국(PHSCC) 국장은 “이제 전염병 책을 덮을 때가 됐다”고 큰소리쳤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소아마비·볼거리 등이 줄긴 했지만 신종 전염병들이 꼬리를 물었다.
80년대 초부터 39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에이즈를 시작으로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지난해 에볼라에 이르기까지 치명적인 전염병들이 세계를 휩쓸었다.
지난해 발표된 미 브라운대 조사에 따르면 1980년 이래
전염병 발생 건수는 큰 폭으로 늘어 80~85년 사이 1000건 미만이던 게
2005~2010년 동안 3000건을 넘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구촌이란 말이 식상할 정도로 해외여행이 쉽고 싸진 세상이다.
자연히 한 지역에 국한됐던 풍토병이 삽시간에 세계적 전염병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30~40년간 항공료는 놀랍게 떨어졌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단행됐던 79년 서울~LA 간 왕복항공료는 약 40만원.
당시 30평 아파트가 2800만원 정도였으니 지금 같으면 10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요즘엔 100만원 미만의 표도 흔하니 체감 요금은 10분의 1로 줄었다.
이 덕에 79년 30만 명도 안 됐던 해외여행자는 지난해 3200만 명으로 100배 이상 늘었다.
이런 판에 중동·아프리카에서 터진 전염병이 며칠 내에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전염병 창궐을 논하면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빈번한 여행 외에 또 다른 결정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구온난화다.
70년대 말 출현한 뒤 요즘 들어 또다시 각광받는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이란 게 있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지구를 뜻한다.
영국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에 의해 주창된 이 이론은
지구를 단순한 돌과 흙덩어리로 보지 않는다.
지구는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동식물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생명체 같은 존재라는 게 이론의 핵심이다.
러브록의 주장에 따르면 가이아, 즉 지구는 자신의 변화에 대응해
생명체가 잘 살 수 있도록 균형을 찾아간다고 한다.
다만 온실가스로 온난화가 극심해지면 지구는 회복 능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생태계 균형은 깨지고 대규모 홍수와 극심한 가뭄이 나타난다.
생태계 균형이 망가지면 희한한 전염병들이 번성하기 마련이다.
기온 상승으로 환경이 바뀌면서 희귀했던 생물이 늘기도 하고, 번성했던 동식물이 멸종하기도 한다.
각 생명체가 거들떠보지 않던 먹잇감을 섭취하거나 기후에 맞춰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는 현상도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체내에 새로운 병균과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이게 사람에게 옮으면서 신종 전염병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과 사람 모두에게 옮는 병을 ‘인수공통감염병(zoonosis)’라고 한다.
주목할 사실은 최근에 나타난 신종 전염병의 75% 이상이 인수공통감염병이란 점이다.
에이즈(침팬지), 에볼라(박쥐), 메르스(낙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모기·진드기처럼 병을 전염시키는 매개체까지
기후변화로 늘게 되면 전염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모기가 옮기는 말라리아는 물론이고 최근 국내에도 기승을 부리는
쓰쓰가무시병도 환경 변화 탓에 창궐하고 있다.
털진드기가 옮기는 이 병은 2000년 1700여 명이었던 환자가 2013년 1만300여 명으로 6배 늘었다.
모기·진드기 모두 기온이 오르면 개체수가 급증하고 활동력이 배가되기 마련이다.
지구온난화 방지가 전염병 예방의 지름길인 것이다.
한국 정부는 메르스로 치명상을 입고도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12월 파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 앞서 최근 밝힌
2020년 이후의 온실가스 감축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못 미친 게 그 증거다.
메르스 사태로 확인됐듯이 외래 전염병 창궐은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온실가스 감축을 너무 밀어붙이면 기업의 숨통을 조르게 된다.
그럼에도 기후변화 문제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보건안보 차원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 자연’을 돌보지 않으면 가이아의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멀리 볼 줄 몰라 제2의 메르스를 자초하는 잘못은 결코 범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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