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 : 676년 (신라 문무왕16) 의상조사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18) ·조사당(국보19) ·소조여래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취현암·범종루·안양문 ·응향각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이 있다.
이 중에서 국보 제46호인 조사당 벽화는 고려 때 것으로 한국에 남아있는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일제시대 일본놈들이 떼어낸 것을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과거 kbs 역사 스페셜에서도 방송을 했다. 당시 역사스페셜 내용으로는 선묘화룡과,
부석사에는 용이 살고있다는 내용이었다.
08:00 태백가든
비가 올듯 말듯 흐린 날씨 속에 출발
10:40 주차장
10:50 매표소
11:00 일주문
1977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봉황산은 태백산의 한 봉우리이니 부석사는 태백산의 품에 안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문에는 태백산 부석사 뒤에는 해공화엄종찰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Rk지 이어지는 은행나무이 편안하다
11:05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높이는 4.28m이고, 재료는 화강석이다.
당간은 사찰에서 법회 의식이 열릴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으로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2개의 받침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가늘고 긴 편이지만 아래 위의 두께가 차이가 있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단아하고 견실한 조각 수법으로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1:07 천왕문
사천왕은 인도에서 숭상했던 악귀들의 왕이 석가모니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이곳을 통과할 때 다시한번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성이 있다.
11:10 석축과 돌계단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다다르는 마지막 계단이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쌓았다
11:15 석탑
석단의 계단을 올라가면 좌우로 석탑이 서있다.
이 석탑은 본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근의 절터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11:15 문화해설사( Korean Cultuere & Tourism Guide)
훈련을 통해 각지역 관내의 문화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관광객이나 지역주민들이 그 지역의 문화체험 및 문화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사람을
문화유산 해설사 또는 문화자원봉사자라고도 한다.
11:40 안양루
범종루를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괘불지주를 만나고 그 뒤로 안양루가 보인다.
안양.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길은 안양루 마루 아래로 이어지며 누각이면서
절의 삼문 가운데 마지막 문인 불이문(해탈문)의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다.
부석사 가람은 중심축선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그런데안양루는 지금까지 올라온 방향과는 달리 비틀어져 있다.
그 중심축선이 일직선이 아니고 안양루에 오르면서 약 30도 정도로 꺾여있는 것이다.
안양루 반대편에서 보아야 [안양루] 라는 현판이 나타난다.
범종루
중생을 제도하는 법성의 소리를 내는 이른바
사중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설치해 두는 건물이다.
그런데 부석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없다.
따로 만들어진 범종각에 걸려있다.
지난날 범종루의 범종은 흥선대원군 집권시
당백전을 만드느라 떼어가 버렸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후 부석사 범종루에는 범종을 달기 적합하지 않아
따로 1984년 범종각을 세워 그 곳에 범종을 달았다.
11:50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건축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45)
주출입구는 중앙의 어칸이 아니라 동쪽의 협칸이다.
무량수전 안에는 아미타불이 있다. 이를 의역하여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라 한다.
무량수전이라는 전각의 이름도 바로 무량수불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무량수전의 아미타불도 정면 남쪽을 향해 앉아있지 않고,
건물 서쪽 끝에 앉아 동쪽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11:50 팔각석등(국보 17호)
계단과 안양루가 만들어내는 프래임 사이로
무량수전의 벽면이 보이면서 서서히 석등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석등은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잇는 중심축선의 정면에 있지 않고
살짝 서쪽으로 50cm 정도 비켜서 서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으로 전체 높이는 2.97m이다.
12:00 선묘각
무량수전의 동쪽 뒤편으로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는
한 칸짜리 조그마한 전각이 바로 선묘각이다.
이 선묘각은 의상스님을 사모하여 몸바쳐 그를 도운 당나라 아가씨
선묘의 넋을 기려 근래에 세운 것이다.
선묘화룡(善妙化龍)
의상법사가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갔을때 양주의 한 집에 머물러 요양을 하게되었는데
그 집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여 몸을 단장하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이 반석과 같아 의연히 움직이지 않자 그로인해 도심을 일으킨 선묘가
의상을 스승으로 삼아 귀명할것을 맹세하고 다음과 같이 발원하였다.
제자는 반드시 스님의 복전(福田)이 되어 세시로 필요한 생활품을 바쳐 공양하겠나이다.
그후로 10년동안 선묘는 멀리서 의상의 불법수행을 뒷바라지하며 공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눈을 팔지않고 화엄의 요지(要旨)를 논구하고,
강론한지 11년만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할것이라는 변고가 알려지자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뒤늦게 의상의 귀국소식을 들은 선묘가 의상을 위해 준비했던 법복(法服)과
그 밖의 물건들을 함에 가득 넣어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상의 배는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외치며 "나의 진정한 본심은 법사를 공양하는 일이오니.
원컨대 이 옷함이 저 배에 닿게하소서"하고 옷함을 물에 던지니 질풍이 불어와
옷함이 새털 날리듯 의상이 탄 배에 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또 맹세하되 "이 몸이 변해 대룡이 되어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땅에 닿아
스님의 법이 전할 수 있게 하소서."하고 바다 속에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커다란 대룡으로 화한 선묘가 배를 수호하여 인도하니
의상의 배는 단숨에 신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법사는 당나라의 침공소식을 조정에 알려 대비케 하였다.
또 사찰을 창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봉황산에 갔는데 그곳에 먼저 자리잡은 소승잡배들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때에 다시 선묘룡)나타나 사방 십리의 대반석을 공중으로 세차례나 들어올렸다 놓자
잡배들은 모두 그 위신력에 질려 마침내 굴복하고 사죄하였다.
이 자리에 건립된 것이 "부석사"로서, "浮石(뜬 바위)"라는 절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華嚴一乘法界圖
의상은 자신의 名著를 강론하였고, 제자들은 그 秘意를 토론하는 대학습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문답을 정리한 錐洞記등이 그 대표적 실례이다.
의상에게는 뛰어난 제자들이 열명 있어서 그들을 의상 문하의 十大德이라고 하지만,
대략 그를 따르는 이들을 삼천문도라고 부른다.
12:10 부석사 부석
무량수전 좌측에 위치해 있다.
무량수전 앞에서는
겹겹이 쌓여있는 백두대간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12:15 3층석탑(보물)
무량수전 동쪽에는 3층석탑이 있다. 무량수전의 전면에는 석탑이 없고 석등만 있다.
동쪽의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는 무관한 독립체이며,
아미타불과 대비되는 석가모니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12:20 조사당(국보19)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석탑을 뒤로하고 계속 길이 이어진다
산길을 따라 오르니 조사당 가는 길이 우측으로 나타났다.
같은 경내에서 꽤나 가파른 숲길을 오른다.
일단 응진전과 자인전은 나중에 들르기로 하고
조사당 밖은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조사당 내부는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않는다
12:25 선비화
조사당 앞 처마밑에는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자라나 잎이 났다는 선비화가 철창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12:30 지장전
아름다운 사찰 풍경과 사랑의 전설이 깃든 곳,
그곳이 영주 부석사다.
12:55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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