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산명 : 보은 속리산(1,057.7m) 0 위치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경북 상주시 화북면0 코스 : 시어동~화북분소~문장대~문수봉~신선대~입석대~비로봉~석문갈림길          ~천왕봉~석문~상고암~상환암~세심정~법주사0일자 : 2008. 12. 14(일)0시간 : 7시간 /맑음

백두대간이 남서진하며 태백산과 소백산, 그리고 죽령과 이화령 사이에 월악산군을 품어내고 이내 방향을 남으로 돌리는 한반도 남쪽 한가운데에 위치한 속리산 천왕봉은 한강,금강,낙동강 즉 3대 강 발원지라 이를 삼파수라 부르며, 안성 칠장산으로 이어가는 한남금북정맥 줄기가 나누어지는 분지점이기도 하다. 한남금북정맥이 대간에서 솔가하는 기점도 천왕봉이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말티고개를 지나 선도산과 보현산을 거쳐 안성의 칠현산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갈래친다. 종착지인 칠장산에서는 다시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으로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태안반도에서 안흥까지의 금북정맥으로 이어진다속리산은 일반인들에게 산 자체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 대사찰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법주사와 조선조 임금 태종에게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정이품송이 산자락 내에 자리 잡고 있어 더 잘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구병산에서 형제봉을 거쳐 속리산에 이르는 산군은 산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북 알프스’로 통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산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봄철 산벚꽃, 여름에는 청송, 가을의 단풍, 겨울철 설경으로 바꿔가며 사시사철 장관을 이루는 속리산은 우리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속리산의 진수는 역시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도봉산 등과 더불어 산 전체가 바위로 넘쳐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속리산은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예로부터 소금강, 또는 제2금강이라고도 불러왔다. 또, 구봉산, 지명산, 미지산, 형제산, 자하산, 광명산, 이지메 등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법주사가 창건된 지 233년만인 784년(신라 선덕왕 5년)에 진표율사)가 김제 고을의 금산사로부터 이곳에 이르자, 들판에서 밭갈이하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회심이 저리 존엄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하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이 산으로 입산수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속세를 떠난다’는 뜻에서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문헌이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속리산의 이름 유래다. 속리산은 그 산이름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산의 여러 봉우리 이름에서도 신앙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이 그러하고, 비로봉, 관음봉등이 그러하다.

속리산에는 8개의 이름(속리산,구봉산,소금강산,광명산,지명산,미지산,형제산,자하산)과 8개의 봉우리(천황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 그리고 8대(문장대.입석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신선대.봉황대.산호대)가 있으며 8석문(내석문.외석문.상고내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상황석문.추래석문)이 있고 물줄기는 속리산 아홉 구비 돌고 돌아 흐르는데 여기에 놓여진 다리가 8개라고 한다. 유난히 8자가 많은 산, 불교에서 열반에 들기 위한 여덟 가지 바른길 즉 8정도를 일컫는데 불교색채가 짙은 그 8자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신랑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에 와서 남긴 시가 유명하다."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은폭동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양양하게 흐르는 것이 물인데/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 사람들이 때 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태백가든거리는 어둠으로 가득하고추위는 밀려온다

시어동숲이 자신의 속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겨울, 가을을 보낸 숲에 찬바람이 분다. 겨울 숲에서 나무는 그렇게 맨몸으로 겨울을 맞이하는가보다.그 고운 빛깔 자랑도 못해본 안타까운 단풍잎들이누런 낙엽이 되어 딱딱한 등로를 수놓았다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화북분소손이 곱아오고 장갑이 그리워진다멀리 산그리메가 사방으로 좋지만 연무에 흐리게 보인다계단을 따라 오르는길

그냥 하늘을 향한다도중에 만나는 암릉에서잠시 쉬고

사거리주능선에 오른다계곡을 울리는 헬기소리여름내 버려진 쓰레기 하산작업 중

문장대(1028m)문장대는 속리산의 얼굴이다.철 계단을 따라 오르면 문장대. 항상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어 운장대로도 불린다.훨씬 운치 있는 이름이다.

세조가 몹쓸 병을 고치고 올라 신하들과 삼강오륜을 강론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천황봉까지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묘봉과 관음봉, 도명산과 낙영산이 옅은 구름을 두른 채, 바라보는 신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저 아래 법주사까지 눈에 들어오고멀리 첩첩이 산그리메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산정을 점점이 수놓은 모습들하염없이 바라보고 가슴에 담는다

문수봉파란하늘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무엇을 닮긴 닮은것 같은데..암봉이 아름다운 속리산 주능선오르락 내리락 산행의 맛 또한 제맛이다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면손끝은 시렵기까지 하는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이미 산정은 겨울이다

신선대문장대에서부터 신선대는 걸음걸음마다 확연한 원근감을 보여주며 마중이라도 나오듯 가깝게 다가선다

입석대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이 독보대사를 스승 삼아 7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고 일으켜 세웠다는 입석대제대로 보려면 좁은 바위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무등산, 치악산, 대둔산… 이름난 바위산마다 하늘로 몸을 곧추 세운 거대한 바위기둥들은 모두 입석대란 이름으로 사랑을 받는다.속리산 입석대도 마찬가지.

비로봉(1,025m)다가가 쓰다듬고 싶은 기암을 두고 휑하니 지날 수는 없는 일이다.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고 능선을 따라 이름모를 기암이 도처에 늘려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하나 글이 모자라고멋진 풍광 보여주고자 하나솜씨가 미천함이 안타깝기만...

석문갈림길아무리 눈앞의 풍경이 마음을 어지럽히더라도 정신없이 앞사람만 쫓아가다 보면 우거진 조릿대 사이로 휭 하니 뚫린 길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헬기장산정의 나목들은 이미 겨울을 준비하는가 보다앙상히 뼈대만 드러내놓고 거세바람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간간히 걸려있는 잎새들 조차도 위태 위태그렇게 속리산정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천왕봉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천왕봉 역시 우거진 수풀 사이에 핀 바위 꽃이다.하늘의 왕이란 이름의 바위 꽃송이에서 백두대간 굵은 줄기는 한남금북정맥이란 푸른 가지를 뻗어 내린다.‘상황봉~묘봉~문장대~천황봉~형제봉~장고개~구병산’ 구간은 통상 ‘충북알프스’로 불린다.

속리산은 제1봉의 지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산이다. 천왕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약 3,8km의 등성마루 전체가, 그 기기묘묘한 암릉 전체가 하나의 봉우리다.

옛사람들도 제1봉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예 천왕봉을 언급하지 않고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안타깝게도 정상 표지석은 천황봉(天皇峯)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왕(王)을 황(皇)으로 둔갑시킨 일제의 잔재 그대로다.

언제부터 천황봉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분명히 ‘천왕봉(天王峯)’이라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천왕봉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속리산 마루에 대자재천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의 천황을 염두에 두고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석문지나온 천왕봉도 바라보고 주능선이 암릉과 어울어져 그림같이 펼쳐진다암봉에 피어오른 소나무 한그루한폭의 동양화다

상고암세심정으로 내려가는 하산로에서 갈라지는 상고암 가는 길조릿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오솔길을 따라가면길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너른 터가 열린다.

상고암은 법주사보다 먼저 속리산에 둥지를 튼 절이다.상고암 대웅전 뒤로 걸어 올라가면 문장대부터 천왕봉까지 병풍처럼 펼쳐진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는데.

상환암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계곡도 가뭄에 물이 마르고 나무들은 앙상하지만겨울을 느끼게 하는 바람으로계곡을 벗어난다

세심정세속을 떠난 산에서 마음을 씻는 정자(터)란 뜻으로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속세의 복잡하고 힘든 문제들은 저산 밖에 내려놓고 이곳에서는 내 앞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을 즐기라는 뜻일게다. 지금은 개인이 이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목욕소 조선조 7대왕 세조가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인근 법주사에서 대법회를 연후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약사여래의 명을 받고 온 월광태자라는 미소년이 나타나 세조의 피부병이 곧 완쾌 될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보니 신기하게도 몸의 종기가 깨끗이 없어 졌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8세기 초엽 신라 성덕왕 때 중창하였다. 지행록에 의하면, 이때 왕이 법주사라는 절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법주사의 중창 시기에 있어서 흔히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진표율사 사적기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결과에서 초래한 잘못이다. 766년~770년 시기에 진표율사가 속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갈 때 속리산에서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길상사 창립지지로서 표시해 둔 곳에 제자인 영심이 776년에 길상사를 창건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라는 이름은 의신대사가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 또는 그 나귀들이 이곳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의신대사가 새로 세울 절터를 찾기 위해 보은 땅으로 들어서서 오늘의 말티고개를 넘어 속리산으로 들어섰는데, 그때 대사는 눈앞에 펼쳐진 기막힌 전경에 감탄하여 자신도 모르게 합장 배례했다고 한다. 법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인조 때 벽암스님이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의 재건·중수·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법주사의 상징과 같은 거대한 청동미륵대불은 본래 진표의 제자 영심이 중창할 당시 용화보전 자리에 세웠던 150m 높이의 거대한 입상이었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 주조를 위해 파괴했다고 한다.1989년에 조성한 현재의 미륵불은 높이 25m, 둘레 17m의 거대한 규모로 표면에 입힌 순금만 해도 80kg이나 들었다고 한다.

주차장짧은 겨울해가 어느새 찬바람을 부른다. 부채 살 같은 햇살이 앙상한 가지사이를 비추고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을 뒤돌아보며속리산과 안녕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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