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주인공 고영근 지사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누가 호랑이 허리를 끊었나' 투어를 제안하며...
영화 속 지사들, 현충원에 잠들지 못해
/오마이뉴스
한반도 모양을 형상화 한 <파묘> 포스터
영화 <파묘>가 24일을 기해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지난 2018년 12월 이래 현충원에 안장된 국가공인 친일파의 '파묘'를 주장하고
행동해 온 1인으로서 참으로 고마운 마음입니다.
영화에서지만 단 한 번도 온전히 해내지 못했던 친일파에 대한 '파묘'를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 지사의 이름을 차용한
배우 최민식씨가 말입니다. 감개무량했습니다.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이 잠든 현충원 곳곳엔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인한 국가공인 친일파가 안장돼 있습니다.
백선엽을 비롯해 김백일, 신태영,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홍준,
송석하, 신현준, 백홍석, 김석범 등 총 12명입니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2005년 5월 31일
대통령 소속으로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선정된 국가공인 친일파입니다.
해당 위원회는 노무현 정권 때 출범했지만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 11월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이 말은 이들에 대한 친일 공인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위원회는 4년 6개월의 활동을 끝내면서 4부·25권, 총 2만1000여 쪽에 달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고, 해당 보고서에는 1기·2기·3기에 따라
국가공인 친일인사 총 1005명의 명단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앞서 언급한 12인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분산돼 안장돼 있습니다.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 "내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
▲신태영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대한민국 4대 국방부장관 신태영과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입니다.
일제강점기 히라야마 호에이라는 이름으로 산 신태영은 1943년 11월 17일 <경성일보>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긴 인물입니다.
당시 그는 청년·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해
조선인 병력 동원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신태영 옆쪽에 안장된 이응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현충원 장군 2묘역 첫 번째 무덤에 잠든 이응준은 조신 출신임에도 이례적으로
일본군 육군 대좌(대령)까지 승진한 인물입니다.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이 무르익자 1941년 공개적으로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발언했습니다.
1943년에는 일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생사를 초월하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원수 하의 고굉(손과 발)으로 황군의 일원으로 한번 죽음으로써
그 책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완수하는 길이다"라는 말했습니다.
광복 후 그는 일본군 경력을 인정받아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위촉됐습니다.
그리고 김백일, 백선엽, 김홍준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 운영 군사영어학교에 보낸 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이력으로 그는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신태영과 이응준의 무덤 바로 아래쪽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파묘 주인공들, 어디 잠들었나?
영화 <파묘>에는 여러 명의 독립투사 이름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4인의 이름에 차용된 김상덕, 고영근, 이화림, 윤봉길을 비롯해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 광복군이었던 오광심,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자
국내 항일 공작을 지원했던 박자혜도 등장합니다.
다만 주인공 4인에 대해서만 언급하면 영화에서 지관 역을 맡았던
최민식씨의 극중 이름이 김상덕입니다.
1948년 제헌의회에서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위원장을 맡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하고 맙니다.
김상덕 지사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납북된 뒤 1956년 별세했고
이후 평양 재북인사릉에 안장됐습니다.
우리 정부는 1990년에야 김 지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그사이 김 선생의 아들은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시달리며 오랜 시간 고통을 겪었습니다.
배우 이도현씨가 연기한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바꾼 인물입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제의 군신이라 불리던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물통형 폭탄을 던져 격살했습니다. 일제는 윤 의사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했고,
그의 유해는 14년간 방치됐다가 해방 후 백범과 재일 조선 청년들의 노력으로
1946년 고국에 돌아왔고 효창원에 안장됐습니다.
영화에서 배우 김고은씨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이화림입니다.
이화림 지사는 한인애국단과 의열단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윤 의사가 훙커오의거 전 사전 답사를 할 때 이화림 지사와 부부로 위장해 함께 다녔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의용대 여자의용단에서 부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의사로서 중국공산당으로 가입해 활동한 이유 등으로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1922년 12월 13일 동아일보에 실린 고영근 지사 관련 기사와 고영근 지사 사진.
영화에서 '의열' 장의사를 운영하는 유해진씨의 이름은 고영근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가담하고 앞장섰던 대한제국 군인 출신
우범선을 일본까지 찾아가 격살한 인물입니다. 1903년 11월 24일의 일입니다.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은 바로 자수합니다.
자신의 살인이 국모를 시해한 일에 대한 복수였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일본에서 잡힌 고영근에 대해 고종은 하야시 곤스케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선처를 요청합니다.
결국 고종의 로비가 통해 최초 사형을 언도받았던 고영근은
5년 간의 복역만 하게 되고 1909년께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망국 뒤 고영근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1919년 1월 고종이 생을 마감한 뒤 고영근은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에 임명됩니다.
한마디로 고종과 민비의 유해를 지키는 묘지기라는 뜻.
조선 왕가를 향한 고영근의 충정은 여기서 그치질 않습니다.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홍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에
'고종태황제' 등 글자를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웠습니다.
일제는 고종의 묘비에 '대한'과 '황제'를 쓰지 못하게 했고,
이로 인해 고종 사후 4년이 넘도록 묘비를 세우지 못했던 겁니다.
1922년 12월, 고영근은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이 일을 결국 해냅니다.
일제는 발칵 뒤집혔고 고영근 역시 이 일로 인해 1923년 3월 파직되고 맙니다.
이 일이 일어나고 고영근은 자신의 일을 다 마쳤다는 듯 한 달 뒤 죽습니다.
그가 어디에 매장됐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고종과 민비의 묘 아래 묻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다만 1937년 1월께 동아일보에는 '(고영근이) 최초 서울 불광동에 매장됐으나
일제시대 도시계획으로 인해 수원으로 이장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아까시나무 가득한 고영근의 무덤 앞에 서서
▲ 영화 파묘에서 배우 유해진씨의 극중 이름은 고영근이다 친일파 우범선을 처단한 애국지사다.
그의 묘를 2024년 3월 24일 찾았다. 그의 무덤에는 아카시아 가시나무가 가득했고, 이를 두손으로 뽑아냈다.
2014년 11월 25일 경인일보에는 '을미사변 도운 친일파 척살
관리추정 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옵니다.
무덤 한편에 작은 비석이 세워졌고, 그곳에 '고공영근지묘'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무덤은 경기도 수원시 계명고등학교 뒤쪽에 위치한 야산 중턱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야산을 헤매고 헤맨 끝에 24일 오전 그의 무덤을 어렵게 찾았습니다.
친일파 우범선을 처단했지만 고영근의 활동은 망국 이전에 이뤄졌다는
이유 등으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정부로부터 서훈받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그의 묘는 온전히 후손들에 의해서 관리 돼왔던 겁니다.
현장에서 마주한 무덤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가시가 촘촘히 박힌 아까시나무 수십 개가 무덤에 뿌리내린 상태였습니다.
가장 황망했던 것은 무덤 정수리 부분에 약 1.5m짜리 아까시나무가 박혀있었다는 점입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저렇게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영근 지사에게 술 한잔 가득 부어 올린 뒤 무덤에 올라가
쇠말뚝처럼 박힌 아까시나무를 잡고 뽑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장갑이나 삽, 가위 등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박힌 아까시나무는 두 손으로 아무리 잡고 흔들고 용을 써도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손으로 뿌리 부분의 흙을 하나하나 걷어냈고, 드러난 뿌리를 온힘을 다해 잡아챘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두 손 가득 피멍이 들었고, 가시로 인해 발생한 상처가 온몸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고영근 지사 무덤 정수리에 박힌 아까시나무를 뽑아냈습니다.
무덤 곳곳에 박혀 있던 다른 가시나무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했습니다.
모든 과업을 마친 뒤 고영근 지사의 무덤에 소주 가득 부어 뿌리며 말했습니다.
"지사님 너무나 뒤늦게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음 다했습니다.
부디 해방된 조국에서 편히 잠드세요. 다음에는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오겠습니다."
실은 오는 5월 4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서울현충원에서
'누가 호랑이 허리를 끊었나'라는 제목으로
<파묘> 1000만 관객 특집 38차 현충원투어를 진행합니다.
독립투사 머리 위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를 마주하고 이들과 싸운 독립투사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과정에서 북에 잠든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무덤조차 알 수 없는 의열단원 이화림,
일제의 손에 14년 간 방치됐던 청년 영웅 윤봉길,
그리고 야산 자락 아까시나무 가득했던 고영근의 무덤을 설명할 예정입니다.
친일파 파묘와 독립투사 선양이라는 공익목적의 행사이기에 투어는 무료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함께 걸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5월 4일 현충원에서 만나요. 기다리겠습니다.
현충원투어 신청 : https://forms.gle/QHea3UhtypJ1NkM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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