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사람과산_김규순의 풍수이야기<2018년 3월호>

신숭겸 묘역에서 본 전경_ 좌청룡의 안산과 소양강 너머의 봉의산 그리고 대룡산이 멋진 경관을 조성하고 있다. 신숭겸장군이 묻혀 있는 곳은 풍수지형으로서는 옹골찬 기운을 보여주지 못하는 곳이다. 이런 곳은 천년향화지지라 한다. 천년동안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길지이다. 실제로 평산신씨는 고려시대에 현달하지 못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야 가문이 빛난다.

춘천은 6・25격전지로 문화유적이 파괴되었기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땅속에 묻혀 있었던 유적들이 종종 출토되고 있다. 춘천박물관에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의 유물이 풍부하다.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특히 중도의 선사유적지는 철기시대 원삼국시대의 유적지로 춘천의 유구한 역사를 나타내주고 있다. 춘천의 소양강 수변공간은 천혜의 삶의 조건을 제공했던 것이다.

혈거유적지_ 한림대학교 안에 있다. 산을 깎아서 교정을 조성하면서 발견된 동굴이다. 자연동굴이 아니라 신석기시대의 사람이 돌칼이나 돌창을 활용하여 비교적 무른 지층을 깎아내어 만든 인공굴이다. 여기서 인골과 함께 출토된 신석기 유물이 춘천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왜 산인가

춘천의 진산은 봉의산(鳳儀山, 301m)이다. 대룡산(대룡산, 899m)이라면 진산으로 면모가 설 일이지만, 대룡산의 한 줄기가 소양강을 만나면서 머문 구릉이 진산이라니 초라한 느낌이 든다. 어쨌든 봉의산에 의지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관아가 있었고 지금도 강원도청이 자리잡고 있다.

봉의산은 능선이 발달하지 않은 산으로 투구모양의 홀로 서 있는 산이다. 도청 건물을 좌우에서 다정하게 감싸주는 좌청룡・우백호도 없다. 지형적으로 결격사유가 많음에도 이곳에 관아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교통지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곳은 한양과 연결되는 교통통로가 한강이었므로 최적의 입지였다. 둘째 관아는 남향이어야 한다. 춘천은 분지이지만 소양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어서 남향을 하면서 산을 등지는 곳이 봉의산 외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도시의 공간을 만드는데 산은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관아와 향교는 산에 의지하면서 남향을 해야 하는 원칙을 지켜야 했다. 남향은 유교가 신봉하는 정치적인 방향이었다. 우리에게는 천손사상과 함께 산악숭배사상이 있었는데, 산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서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구역, 즉 신과 인간의 공동공간이었다. 산은 정신을 의미했고 산의 정기가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신라의 삼신산(三神山), 고려의 사악신(四嶽神), 조선의 오악산(五嶽山)은 국가적으로 산신제를 지냈던 산이다. 산신제의 근원은 단군이다. 단군은 태백산에 내려왔고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에 근거한다.

 

*청평사 고려선원_ 청평사는 천년고찰로써 고려 광종 때(973년) 창건되었다. 사찰의 공간배치는 궁궐의 양식으로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고려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현(1061-1125)이 청평거사라 칭하며 은거하며 문수원을 세우고 고려정원을 꾸몄다. 청평사 계곡의 고려정원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정원인 보길도원림과 소쇄원의 원형을 보여준다. 나옹화상(1320-1376)이 머물렀으며, 김시습(1435-1493)이 은둔하였다. 보우선사는 1557년에 중창을 하였다. 궁궐건축양식의 회전문(보물제164호)이 있다.

 

청평사 극락보전_ 청평사 극락보전은 1947년 주지 김동수의 처가 정신이상으로 불을 질러 소실되었다. 국보 제115호였으나 지금은 사진으로 전한다. 복원된 극락보전은 모양이 다르지만 위치는 변함이 없으니 풍수지형을 살피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뒤로 뾰족한 산봉우리가 서 있고 앞으로는 안산이 화답하여 서로 음양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산과 안산의 음양조화는 고려풍수의 특징이다.

 

춘천향교_ 향교와 사찰의 대웅전은 성인을 모시는 곳이므로 산의 능성 위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춘천향교는 이와 달리 산기슭에 세웠다는 점이 특이하다. 산 능선은 산의 정기를 전달하는 통로라고 여겼으며, 산의 정기는 사람의 정신을 관장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산기슭에 세운 향교는 산의 정기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곳이다.
 

강원도청_ 춘천도호부의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옛 관아 건물은 6・25동란으로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도청이 도정을 이끌고 있으니 공간의 기능은 변함이 없다.

 

강원의 명당

 

곡성출신이면서 평산을 본관으로 하고 춘천에 묻혀 있는 신숭겸은 춘천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왕건의 부하 장군으로 견훤과의 공산전투에서 패색이 짙자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주군을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왕건은 그를 위해 길지인 이곳에 그를 묻어주었다. 신숭겸의 신도비는 순종의 장인이었던 김조순(1765-1832)이 글을 지었고, 평산신씨의 후예이면서 명필가였던 신위(1765-1832)가 글씨를 썼다.

 

장절공 신숭겸(?~927)의 무덤이 만들어진지 700년이 지나서야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후기에 신숭겸이 조명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평산신씨는 고려 때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시대에 신개(1374-1446), 신흠(1566-1628), 신경진(1575-1643), 신만(1703-1765), 신회(1706-?) 등등 정승 5명을 배출하였다. 평산신씨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신사임당인 것은 전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신숭겸 동상_ 신숭겸 묘역 앞에 세워진 신숭겸 동산이 북배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산과 비슷하다. 신숨겸 장군은 칼이 아니라 활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는 날아가는 기러기도 떨어뜨리는 활솜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한 인문학적 내용의 반영이 아쉬운 대목이다.
 
 

김 정의 묘_ 광산김씨 출신으로 고려말 신돈과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인물. 신돈이 축출되면서 같은 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묘지는 실전되었다가 1768년 후손이 춘천부사(김화택)로 부임하여 김정(金鼎)이라는 글자가 적힌 묘지석을 찾아내었다. 묘지 뒤로는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무덤 뒤의 능선을 잘라 옹벽을 만들어 흉측하게 보인다. 후손의 잘못인지 불가피한 상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의 보존과 개발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의 흔적이다. 서로가 양보하고 이해하는 접점을 찾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의 전경_ 한강을 통하여 뗏목으로 영구하였는데 뗏목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아서 이곳에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런 풍수 설화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숙종이 하사한 사패지가 풍수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패지를 거부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낸 작전이었다. 무덤은 방향은 의도적으로 멀리 뾰족한 조산을 바라보고 있다. 안산이 조산과 일직선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신도비가 세워진 18세기 이전부터 춘천은 이미 한양사대부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구 증가로 인한 토지압력으로 경기도를 넘어 강원도로 묘지 확보 경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청주한씨가 정착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옥포와 합포 해전에 참전하였고 미조항 전투에서 전사한 한백록(1555-1592)의 묘가 서면 금산리에 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좌의정 구인후(1578-1658)의 묘가 남면 추곡리에 있다. 서면 안보리에는 현종의 장인이었던 청풍부원군 김우명(1619-1675)의 묘가 있으며 외할아버지를 위해 숙종이 하사한 상여는 춘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그의 5대 손녀가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이다. 선조대왕의 5세손으로 우의정을 지낸 이서구(1754-1825)는 남면 박암리에 묘지가 있다. 신북읍 지내리에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장인이었고 세도정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양부원군 조만영(1776-1846)과 동생 영의정 조인영(1782-1850)의 묘지가 있다.


왕의 장인인 부원군 2명, 정승 3명의 무덤이 춘천에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조선 후기에 경기도 일원에 묘역으로 사용할 땅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므로 한강으로 이동하기가 편리한 춘천까지 사대부의 묘역 장소로 확대된 것이다. 김우명을 제외한 조만영과 구인후, 이서구의 묘는 모계와 관련이 깊다. 구인후의 할머니와 이서구의 어머니는 평산신씨였다. 풍양조씨 회양공파 조신의 부인은 고성이씨로 고려의 문인 행촌 이암의 딸이었다.


풍양조씨의 회양공파에게 있어서 춘천은 650년의 뿌리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회양공파 파조 조신(趙愼)은 행촌 이암(1297-1364)의 사위였다. 행촌 이암이 1353년 청평사에 은거할 때 같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368년 친형 조사공이 공민왕 때 신돈을 살해하려다 실패를 하고 죽임을 당하자 조신은 부여로, 부인 고성이씨는 장남 조안평을 데리고 친정인 춘천으로 피신하였다. 지금도 조신의 무덤은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에, 고성이씨의 무덤은 춘천시 석사동 애막골에 있다. 풍양조씨 회양공파의 후손 중에서만 정승5명을 배출하였으므로 조신과 부인 고성이씨의 무덤은 길지로 여겨지고 있다.

좌의정 이서구의 묘가 있는 언덕_ 사진 좌측 수풀 속에 이서구와 그의 부친 이원(李遠)의 묘가 있다. 능선 앞에 보이는 것은 얼어붙은 홍천강이다. 강을 건너면 가평군 설악면이다. 이곳도 한강변에서 수십미터 떨어지지 않은 한강 명당이다.

시쳇말로 버스명당이다.

 

풍양부원군 조만영의 묘_ 풍수술에 형세론과 이기론이 있다. 이기론 중에 조선 초기에 도입된 호순신의 지리신법이 있고 조선 후기에 도입된 조정동의 지리오결이 있다. 조만영의 묘는 전형적인 삼합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산의 능선이 인(寅)방에서 들어오고 물은 술(戌)방으로 빠지며 무덤의 방향은 오(午)방을 향하고 있다. 인은 북동쪽, 오는 정남쪽, 술은 남서쪽을 말한다.

 

인오술은 지지의 삼합인데 각기 120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삼합풍수라고도 한다. 사진에서 무덤 우측에 보이는 뾰족한 지붕은 비각이다. 비각이 서 있는 자리가 전순이다. 전순이란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경사를 이루며 불룩해진 부분이다. 형세론적 입장에서는 전순 방향으로 묘의 방향을 놓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삼합원리를 적용하여 좌측으로 묘의 방향을 틀었다. 19세기 풍수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서면박사마을 선양탑_ 서면출신 박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춘천에서 유명한 곳이 서면 박사마을이다. 박사마을이라고 해서 자그마한 동네가 아니고, 10개리에 1999가구(인구 4048명, 2017년10월31일 현재)가 사는 면단위 행정구역이다. 서면은 뒤로 가덕산・북배산・계관산을 병풍처럼 세워 놓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형이다. 서면 박사마을은 박사마을 현황(2017년 10월31일자)에 의하면 157명의 박사를 배출하였다. 한 해에 5명 이상의 박사가 나온 적도 16번이나 되는데 1997년에는 9명의 박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풍수사들은 1967년 의암댐이 완공되고 의암호가 차오르면서 땅의 기운이 바뀌었으며 이 때부터 박사마을의 기운이 융성해졌다고 한다. 물이 땅의 기운을 결집시킨 결과라고 하겠다. 실제로 1967년 이전에는 박사가 1명 밖에 없었다. 의암호가 생긴지 20년이 지난 1987년부터 박사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의암호 영역의 수변지역인 금산리(30명)와 신매리(27명), 현암리(17명), 서상리(19명)에서 배출된 박사가 93명(59.2%)으로 다른 6개리보다 월등하게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풍수사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풍수경전에서도 ‘기가 오르면 구름이 되고 기가 내리면 비가 된다. 기는 물의 모체이므로 기가 있는 곳에 물이 있다’고 하였다.

 

근화동 당간지주_ 소양강변에 있는 근화동에 당간지주가 있다는 것은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심산유곡보다 교통이 좋은 강변에 사찰이 있었다면 고려시대이다. 조운체제를 구축하여 활용한 것은 왕건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대립의 근저에는 경제적인 충돌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관아와 향교에 들어가는 물자와 인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사찰로 들어가는 물자를 줄여야했을 것이다. 당간지주 뒤로 봉의산이 보인다. 봉의산을 주산으로 남쪽 사면에 사찰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운동모현비_ 서면 현암리 감와리골은 백운동이라고 하는데 김창협과 김창흡이 이곳에 은거하며 유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박사마을 선양탑 옆에 있다.
 

청평사 구송폭포_7262 계곡물은 흘러야 제 맛이지만, 얼어붙은 폭포는 흰 비단을 드리운 양 흐르지를 않는다. 고려정원의 또 계절적인 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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