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가 스페인 마드리드처럼 될 수 없는 이유

[주장] 관료들의 정보 독점과 결재권 행사는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한다

 

/이민철

 

 

'세금도둑 잡아라' 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예산 감시 운동이라는 표현보다 정체성이 선명하고 친근하고 매력적이다. 시민정치, 시민정부, 플랫폼 정부의 정체성을 '세금도둑 잡아라'처럼 표현하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봤다. 일단 '시민이 결재하자'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결재는 사전적으로 '결정 권한이 있는 상관이 부하가 제출한 안건을 허가하거나 승인함'이라고 풀이되는데, 누가 상관이고 누가 부하일까? 누가 결재의 권한을 가져야 할까?

단순히 비교하면 관료정부는 관료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시민정부는 시민이 결정권을 가진다. 최종 결재 서명을 관료나 시장이 아니라 시민이 한다. 광화문 1번가, 행복 1번가, 시민총회 할아버지를 거친다 해도 결정을 관료들이 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세련된 관료통치 체제에 살게 된다. 시민은 여전히 주권자가 아니라 민원인이다. 시민이 선출하지도, 권한을 위임하지도 않은 관료들이 정보를 독점한 채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를 크게 위배한다.

여러 번의 선거를 거치며 선출된 단체장들은 이제 대부분 시민들과 소통하는 여러 장치를 갖게 되었다. 원탁회의류가 한창 유행했고, 광화문 1번가 류가 또 인기를 타고 있다.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 온라인플랫폼 개발이 한창이다. 그러나 아직 스페인 마드리드시의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 Madrid)라는 온라인 플랫폼처럼 의제와 예산의 결정권을 시민이 가지고 있는 경우는 없다. 한국에서는 과감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내놓는 단체장이 아직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불가능하다고만 하지 말고

'시민이 결재하자', '시민이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상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만약 설명해야 한다면 왜 그래서는 안 되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도시가 너무 커서, 국가가 너무 커서, 시민들이 너무 많아서 자주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대표들을 뽑아 결정권을 잠시 위임해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다보니 위임하고 대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위임받은 이들은 시민들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결정권을 남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대의제의 현실이고 폐해다.

지금이라도 권력을 쪼개서 마을마다 결정할 일을 늘리고, 온라인 투표를 잘 활용하면 위임한 범위를 계속 줄여갈 수 있다. 시민들이 직접 결재하는 일의 범위를 계속 늘려갈 수 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대의해야 할 일들은 정확히 시민들의 뜻을 물어 대신 결정권을 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사례나 모델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얼마든지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다.

남은 문제는 누가 이 방향으로 변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이다. 단체장이나 의원들 중 얼마나 동의하고 적극적일지는 알 수 없다. 경험상 관료들은 반대하고 방해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결국 시민운동, 시민정치운동의 몫이다. 뜻 있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판을 만들 수밖에 없다. 

결정권을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질 시민들의 역량을 만들고, 시민이 결정권을 갖는 시스템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한다. '시민이 결재하자'에 동의하는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연대해야 한다. 단체장과 의원들이 더 많이 당선되도록 선거운동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일을 하는 조직부터 회원과 시민이 결재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이 가능해진다.

 

시민이 다 결재하면 시장과 의원들은 뭐해?


지난 번 시민이 결재하자는 글에 반응이 괜찮았다. 많은 분들이 공유하고, 의견을 보내주었다. 시민이 결재하면 시장은 무슨 일을 할까? 좋은 시장, 좋은 의원을 뽑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지는가? 정당과 정치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댓글과 토론이 이어졌다. 지난 번 글에 이어 이번 글도 상상과 토론을 확장하는 불쏘시개로 써보려 한다.

플랫폼 정부 등으로 논의되는 새로운 정부 형태를 그냥 '시민정부'라고 부르고 싶다. 지금까지는 시민이 선출한 공무원과 채용직 공무원들이 정보와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어서 관료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부와 여러 지역 정부에서 온라인 정책 플랫폼을 계획하거나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할 정책 의제를 시민들이 제안하고, 일부지만 시민이 결정하는 영역이 생겼다. 그리고 정부가 독점하던 정보들도 점차 개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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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부는 정보 공개, 시민이 결정하는 정책과 예산, 시민들이 함께 해결하는 사회 문제 등이 계속 확장되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일단 국가 안보와 개인 정보 보호에 문제가 없는 모든 정보를 시민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 정부 전자결재 시스템과 연계해 공무원들이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일의 전 과정을 시민 누구나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시민 몰래 이해관계자들과 공무원이 결탁해 진행하는 일이 사라지고,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관심도 커질 것이다.

두 번째는 시민이 결정하는 정책 의제와 예산규모를 키워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시민들의 숙의 토론과 의사 결정투표를 쉽게 만들고 있다. 여러 지역 정부가 시민이 정책과 예산을 결정하는 온라인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들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도 이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법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지는 못하다. 몇 개 지역 정부가 조례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시민들이 함께 해결하는 사회문제가 늘어나야 한다. 최근 사회혁신으로 불리는 운동은 시민 주도 사회문제 해결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초연결사회가 되면서 많은 사회문제가 지구화, 지역화되었다고 말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늘어나고, 시민들의 욕구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기존 관료 정부의 방식으로는 이제 대응 자체도 불가능해졌다. 시민 참여, 협치, 협업이라는 말이 급속하게 퍼져가는 이유다. 공동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공공영역이라 부른다면, 이제 공공영역의 조직 구성과 노동방식도 바꿔가야 한다. 정부 조직과 운영방식의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시민사회의 공공성을 넓히고, 시민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시민정부를 운영하게 되면 시장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을까? 시 의회와 정당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선거 때마다 머슴,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하고, 당선되면 바로 얼굴을 바꾸는 시장을 생각하면 큰 변화겠지만, 진짜 심부름꾼을 생각한다면 딱 맞는 시절이 될 것이다.

선의든 악의든 자기 생각대로 도시를 주물러보고 싶은 정치인은 힘들겠지만, 시민들에게 묻고 늘 의논해서 결정할 정치인들에게는 딱 맞는 정부가 되지 않을까. 도시의 공공영역에 더 많은 일이 진행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게 될 것인데, 시장과 공무원들의 창의적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시민사회의 공공성이 넓어지려면 시민들의 다양한 결사체가 늘어나야 한다. 정당 또한 모양을 바꿔가면서 진화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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