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정원(상)

물이 없을 때는 돌다리, 폭우가 내리면 폭포가 된다니

/김종길

 

 


세연정은 부용동 원림 입구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바깥에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이지만, 예전 중심 생활공간이던 낙서재에서 보면 동북쪽에 치우친 별서 정원이다. 그 옛날 윤선도는 황원포에서 배를 내려 부용동으로 향했다. 황원포는 '소나무 숲 속에 가려 고깃배의 돛대만 섬 사이로 은은히 보이던' 한적한 포구였다. 고산 윤선도는 보길도에 오면 포구에 있는 작은 호광루 난간에 기대어 멀리 하늘빛 바닷빛을 바라보았다 한다.

세연정의 회화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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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작은 개울이 정원으로 이어진다. 개울을 따라 세연정 경내에 들어가면 땅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낙서재가 있는 격자봉 낭음계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곳에서 다시 솟아난 것이다. 샘물이 모여 작은 연못을 이룬 상류에서 옛 봉화대 터였던 울창한 동백 숲을 돌아가면 S자 형 개울은 넓어지고 정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구불구불한 개울 양쪽 언덕에는 녹나무, 예덕나무, 동백나무 등 갖은 나무들이 심겨 있고, 개울 한가운데로는 불쑥 돌출된 제방이 놓여 있다. 개울 양쪽 언덕의 S자 모양의 제방과 돌출된 '수제(水制)'는 풍경을 감추었다가 정원을 하나씩 보여주는 긴장감을 주기도 하지만 호우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세연정의 제방과 돌출된 수제 풍경을 위한 인공물이기도 하지만 호우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 세연정의 제방과 돌출된 수제 풍경을 위한 인공물이기도 하지만 호우 때 유속을 떨어뜨리기 위한 과학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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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담의 바위들 600여 평의 꽤 너른 연못인 개울(계담)에선 이름 있는 일곱 바위를 비롯해 집채만 한 기묘한 바위들을 볼 수 있다.
▲ 계담의 바위들 600여 평의 꽤 너른 연못인 개울(계담)에선 이름 있는 일곱 바위를 비롯해 집채만 한 기묘한 바위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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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들어 멀리 보면 개울 여기저기 울멍줄멍 널려 있는 집채만 한 기묘한 바위들을 볼 수 있다. 귀암, 혹약암, 사투암, 유도암(遊跳巖), 무도암(舞跳巖), 용두암, 비홍교, 일곱 바위 '칠암(七巖)'이다. 칠암 중의 하나인 혹약암(或躍巖)은 두꺼비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 이르러 개울은 600여 평의 꽤 너른 연못이 된다. 세연정은 이 개울을 막아서 만든 정원이다. 농부들이 개울을 막아 논에 물을 대던 보를 응용하여 윤선도는 크고 네모난 판석으로 보를 쌓아 개울을 막고 계곡 연못'계담(溪潭)'을 만들었다.

칠암 너머로 정자 하나가 솟아 있다. '세연정'이다.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짐을 말한다. 정자 뒤로는 우람한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봄이면 여기저기 어지러이 핀 영산홍과 대비되어 소나무는 홀로 청정하다. 세연정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라는 편액이다. 칠암이 있는 서쪽에는 칠암헌을 따로 걸었단다. 세연정에 오르기 위해서는 엎드린 거북 모양의 바위 다리인 '비홍교(飛虹橋)'를 건너야 한다.

세연정 세연정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라는 편액이다.
▲ 세연정 세연정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 중앙인 북쪽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서쪽에는 동하각, 동쪽에는 호광루라는 편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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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과 계담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짐을 말한다.
▲ 세연정과 계담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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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 앞은 계담이고 뒤는 '회수담(回水潭)'이다. 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방형에 가까운 회수담에는 네모난 섬 '방도(方島)'와 평평한 바위들이 물 위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고 몇몇은 잠겨 있다. 윤선도는 연못을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둘로 나누어 조성했다. 상지인 계담은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동적인 경관을 살리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하지 회수담은 물의 속도를 최대한 떨어뜨려 정적인 공간으로 연출했다.

특히 계담에서 들어가는 물구멍은 다섯인데 회수담으로 나오는 물구멍은 셋이고(오입삼출五入三出), 물이 들어가는 쪽은 높고 나오는 쪽은 낮게 만들어(고입저출高入低出) 수압 차이를 활용했다. 그럼으로써 물소리는 잦아들고 수면은 잠잠하여 회수담은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곳이 된다. 윤선도의 탁월한 공간 감각과 과학적인 사고, 예술적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세연정은 이 빼어난 물의 공간인 두 연못 가운데 섬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계담과 회수담을 합하여 '세연지(洗然池)'라 한다.

세연정과 회수담 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 세연정과 회수담 자연 연못인 계담의 물이 세연정 옆 물구멍을 통해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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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와 서대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 동대와 서대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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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에서 물길을 건너면 돌로 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가 있다.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이다. 정원 안에 음악과 더불어 무희들이 춤을 추는 무대를 조성한 이 공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회수담의 물은 서대와 동대 뒤의 작은 개울을 거쳐 하류로 흘러간다. 이 낮은 개울가에는 토성처럼 둑을 쌓고 대나무와 상록수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동대를 돌아가면 개울을 막은 '판석보(板石洑)'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마을 사람들은 굴뚝다리라고 부른다. 물이 없을 때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되고, 폭우가 내리면 물이 넘쳐 폭포가 된다.

세연정 개울가 언덕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 세연정 개울가 언덕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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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보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마을 사람들은 굴뚝다리라고 부른다.
▲ 판석보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마을 사람들은 굴뚝다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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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은 대개 세연정에 올라 일대를 둘러보고 돌아가거나 조금 세심한 사람이라면 판석보를 건너 계담을 한 바퀴 돌며 세연정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그러나 '옥소대(玉簫臺)'를 오르지 않고서는 세연정을 보았다 할 수 없다. 판석보를 건너면 산 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느닷없이 거대한 석문이 나타나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내는데 이내 옥소대에 다다른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정도로 널찍한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하고 발 아래로 세연정이 내려다보인다. 그제야 옥소대에서 춤을 추면 연못에 그림자가 거꾸로 보였다는 것이 사실임을 믿게 된다.

옥소대를 내려와 축대를 쌓은 둔덕에 서면 건너편 세연정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세연정 풍경은 압권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도 그러하거니와 물속에 펼쳐지는 똑같은 진경에 놀라게 된다. 바닥이 암반이라 맑디맑은 물속에 비친 세연정은 그 자체로 선경이다.

옥소대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사진 오른쪽 바다)와 세연정(사진 왼쪽 아래)이 한눈에 보인다.
▲ 옥소대 옥소대에 오르면 황원포(사진 오른쪽 바다)와 세연정(사진 왼쪽 아래)이 한눈에 보인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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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 세연정 창으로 들어온 계담 풍경
▲ 세연정 세연정 창으로 들어온 계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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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세연정 일대의 풍경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 정원은 눈으로만 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흔히 정원 하면 일본을 꼽으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정원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자신 있게 부용동 정원과 소쇄원을 들곤 한다. 그러나 우리 정원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시경(視景)'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론 우리 정원을 충분히 알 수 없다면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 부용동 정원은 내면을 중시한 우리 정원의 특성에다 이곳만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정원(중)

 

'어부사시사' 윤선도가 지은 정원,  자체로 예술

 

무대가 있는 정원, 예술로 승화된 정원

1748년,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의 유적을 기록한 <보길도지>에는 고산 윤선도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뱃놀이를 했다고 적혀 있다.

고산은 "하루라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며 당 위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고, 동대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건너편 산 옥소대에서 긴 소매 차림으로 춤추게 했다.

세연정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하고, 세연정에서 풍류를 즐겼다.
▲ 세연정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하고, 세연정에서 풍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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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의 이러한 무대 장면의 연출로 세연정 일대는 단지 회화적 풍경에 머물지 않고 음악적 요소가 어우러진 예술의 세계가 된다. 고산은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는 한 이런 풍류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음악이 없는 정원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에선 노래가 곧 풍경이 되었고, 그 풍경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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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가 조영한 정원은 세속에 물든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가 무대에서 펼친 예술 세계는 세속을 벗어나려는 정서를 더욱 심화시킨다. 사방에서 음악이 울리고 너울너울 춤사위가 펼쳐지는 가운데 뱃놀이에서 감정은 최고조에 달한다.

회화와 음악이 어우러져 풍경의 아름다움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못 중앙에 배를 띄우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한다. 노를 저어 뱃놀이를 하면서 <어부사시사>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정원 가득 울리고 못 속에 비친 그림자는 이미 세상 밖의 풍경이다. 세상사는 자연 잊고 만다.

세연지 고산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 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 세연지 고산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 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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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곱게 일렁이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지국청 지국청 어기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다가온다

어부가 없는 <어부사시사>는 시로 그려진 그림이다. <어부사시사>에서는 세연정 일대의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풍경을 노래한다. 동대에 가까운 계담이 동호이고, 서대에 가까운 회수담이 서호임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는 풍경을 시로 지어 그림처럼 묘사하고 노래를 불러 합일된 세계를 창조한다. 걸음마다 시상을 떠올리며 노래하고, 걸음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한다.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여기가 어디메뇨"라는 대목에서는 세연정과 낙선재를 넘어 자연 속에 살고자 하는 호방한 기개마저 보인다.

어부사시사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어촌의 사계절을 노래한 단가(연시조)로 <고산유고>에 실려 있다.
▲ 어부사시사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어촌의 사계절을 노래한 단가(연시조)로 <고산유고>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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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처럼 뱃놀이를 할 수 없더라도 세연정 일대를 느릿느릿 산보하며 <어부사시사>를 노래해 보자. 그럼, 윤선도 원림은 눈으로만 보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눈으로만 보는 '시경視景'이 아닌 시로 읽는'시경詩景', 고산이 꿈꿨던 세계가 당신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였다. 그가 언제부터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 부용동 등 오십 대부터 평생에 걸쳐 정원을 조성했으며 그가 조성한 정원들은 하나같이 빼어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개인이 조성한 정원의 수나 아름다움에서 고산을 넘어서는 사람은 없다. 고산은 머무는 곳마다 아름다운 산수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자연과 교감하는 생활을 즐겼다.

쌍도정도 쌍도정도는 성주 관아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원을 그린 그림으로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정원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성주 목사 재임 시절에 이 쌍도정 정원을  건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쌍도정도 쌍도정도는 성주 관아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원을 그린 그림으로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정원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성주 목사 재임 시절에 이 쌍도정 정원을 건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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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원을 조성한 시기를 보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였다. 고산은 쉰한 살이던 1637년(인조 15)부터 여든다섯 살인 16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곱 번 부용동을 드나들며 십삼 년 동안 머물렀다. 그동안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그리고 빼어난 안목으로 길이 남을 정원을 만들었다.

고산이 정원 조성에 뜻을 둔 건 이이첨의 전횡을 공박한 <병진소>로 인한 첫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 연동으로 이주했던 1627년으로,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정원을 조성하기보다는 대둔산, 두륜산 등 해남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며 자연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였다.

녹우당 입향조 윤효정 이래 오백여 년간을 이어왔다.
▲ 녹우당 입향조 윤효정 이래 오백여 년간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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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산이 쉰한 살이던 1637년부터 바다 가운데 섬 보길도에 본격적으로 부용동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쉰세 살이던 1639년에 해남의 집 가까운 산속에 문소동을, 산속 계곡에 수정동을, 산 정상부에 금쇄동을 조성했다(고산은 문소동, 수정동, 금쇄동을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했다). 이 모두 세상을 벗어난 탈속의 공간이었다.

그중 부용동은 가장 규모가 크고 고산이 최후까지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주요 생활공간이었던 낙서재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동천석실을 매일같이 오가며 그는 자신만의 정원 생활을 즐겼다.

당대 최고의 풍수가

고산이 죽은 후 정조는 <홍제전서>에서 그를 조선조에서 무학 대사 이후 가장 뛰어난 풍수가로 높이 칭송했다. 고산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여러 곳을 답사하고 길지吉地로 추천한 곳은 수원 땅이었는데, 정적이었던 송시열, 송준길 등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뒷날 정조가 고산이 추천한 곳을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화성 융릉이다.

사도세자의 융릉 지금의 화성 융릉은 원래 윤선도가 효종이 승하했을 때 길지로 추천한 곳이었다.
▲ 사도세자의 융릉 지금의 화성 융릉은 원래 윤선도가 효종이 승하했을 때 길지로 추천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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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가 풍수지리에 능했던 건 가풍의 영향으로 보인다. 해남과 강진 일대에는 해남윤씨의 시조 윤존부와 중시조 윤광전을 모신 한천동, '해남'이라는 본관을 정한 득관조得貫祖 어초은 윤효정이 태어난 덕정동, 윤효정 이래 오백여 년간 이어온 녹우당이 있는 백연동(연동마을)이 있다.

해남윤씨가 거주했던 이 세 곳은 풍수지리의 원리를 잘 반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산은 이러한 해남윤씨 집안의 가풍으로 전해온 자연 친화적인 풍수 사상과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잘 계승하여 문학적, 사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정원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련지 연동마을 녹우당 입구에 조성된 백련지에 핀 연꽃
▲ 백련지 연동마을 녹우당 입구에 조성된 백련지에 핀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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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윤선도가 부용동 등의 정원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국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재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녹우당의 입향조 윤효정은 해남 지역의 가장 큰 세력가이자 부호인 해남정씨 정귀영의 딸과 혼인하여 막대한 재산을 분배받아 당시 남녀 균분 상속제의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게다가 윤선도는 생부인 윤유심과 양부인 윤유기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크게 불리게 된다. 노비만 해도 육백 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당시 해남윤씨 집안은 서남해의 바다를 적극적으로 경영했는데, 윤선도는 진도 굴포에 약 이백 정보, 보길도 바로 옆 노화도에 약 일백삼십 정보를 간척하기도 했다. 부富에 대해 등한시하지 않은 그의 실용적인 경세치용사상을 엿볼 수 있다.

녹우당 사랑채 녹우당 사랑채는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효종이 하사한 건물이다.
▲ 녹우당 사랑채 녹우당 사랑채는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효종이 하사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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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스스로 <금쇄동기>에서 "천석泉石은 역시 마음속의 일일뿐만 아니라 재정이 있어야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물론 그의 엄청난 재력이 뒷받침을 했지만 그의 남다른 자연관이 없었다면 원림을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금쇄동기>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산수를 사랑하는 버릇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반드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나 또한 스스로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음악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고 하였으니, 비유컨대 재산은 고기이고, 천석은 음악과 같다. 나의 취하고 버림이 진실로 이러한 뜻에 있으니, 후세의 군자들이 반드시 이를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금쇄동기 윤선도가 시문집인 <산중신곡>과 함께 금쇄동에 지내면서 금쇄동의 경관을 상세히 서술한 수필집
▲ 금쇄동기 윤선도가 시문집인 <산중신곡>과 함께 금쇄동에 지내면서 금쇄동의 경관을 상세히 서술한 수필집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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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산이 정원을 조성한 것은 그가 겪은 시대의 시련과 개인적 아픔, 잦은 유배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네 번의 전쟁이 준 성장기의 정서적 혼란, 세 번에 걸친 십오 년에 가까운 긴 유배 생활에서 겪은 좌절감, 생모, 양모, 생부를 잃은 개인적 슬픔,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스승이었지만 파란만장했던 벼슬의 허망함 등을 겪으면서 고산은 산수간을 찾아 긴 은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정원(하)

 

 

 

보길도 풍경 보길도는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 보길도 풍경 보길도는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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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보길도 부용동 정원은 한 시대의 안목 높은 시인이자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조영했다. 부용동이라는 이름은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1748년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의 유적을 기록한 <보길도지>에 나온다.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했다."

<보길도지>에는 "동방의 명승지는 삼일포와 보길도가 최고인데, 그윽한 정취는 삼일포가 보길도에 미치지 못한다"며 "바다 가운데에 있어도 부용동에 들면 산 밖에 바다가 있는 줄 모르고, 비구름이 한 달 내내 덮고 있어도 습한 기운이 없고, 산속에는 범이나 뱀에 상처 입을 걱정이 없고, 온 산이 늘 푸르고 산해진수山海珍羞를 갖춘 섬"이라고 했다.

 



보길도 풍경 보길도 송시열의 글씐바위 풍경
▲ 보길도 풍경 보길도 송시열의 글씐바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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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동 전경 동천석실에서 본 부용동은 말 그대로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다.
▲ 부용동 전경 동천석실에서 본 부용동은 말 그대로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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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처음 보길도에 발을 디뎠을 때 수려한 경관과 완벽한 풍수 조건에 탄복했다. 곧장 배에서 내려 섬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을 올라서는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하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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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정북향으로 혈전穴田이 떨어졌는데, 이곳이 낙서재의 양지 바른 터가 되는 곳이다"라며 터를 잡았다. 처음 낙서재에 집터를 잡을 때 수목이 울창하여 산맥을 볼 수 없자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매달아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여 터의 고저와 향배를 헤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장 명당인 혈전에 낙서재를 지었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했다. 사륜거를 타고 매일 낙서재에서 세연지과 동천석실을 다녔다. 그에게 세연정과 동천석실은 개별적이고 고립된 정원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부용동 일대가 모두 하나의 대정원이었다.

그러면서도 개별 정원은 각기 그 특성을 잃지 않고, 부용동이라는 큰 정원 안에 독립적인 정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부용동은 닫힌 개별 정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린 정원이었다.

낙서재  낙서재 소은병에서 본 동천석실(맞은편 산 중턱)
▲ 낙서재 낙서재 소은병에서 본 동천석실(맞은편 산 중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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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 낙서재 소은병에서 본 동천석실(확대 사진)
▲ 동천석실 낙서재 소은병에서 본 동천석실(확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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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을 넘어 합일의 세계로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을 단순히 은둔처나 풍류처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윤선도는 머무는 곳마다 연蓮이 있는 연못을 조성했으며 연과 인연이 깊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연화방이고, 녹우당 종택이 있는 곳은 연동, 그가 말년을 보냈던 곳은 부용동이다. 연꽃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를 상징한다. 고산은 성리학적 실천의 방편으로 연을 심은 것이다.

그에게 부용동 낙서재는 학문을 강론하고 거처했던 생활공간이었고, 세연지는 자족을 얻는 일상의 소요와 풍류공간이었으며, 동천석실은 선계에 머물고자 했던 신선공간이었다. 보길도 섬 전체가 인간 세상을 떠난 신선의 섬이라면 낙서재는 유학자의 이상적 생활공간으로, 세연지는 세상사를 잊고 풍류와 예술을 즐기는 곳으로, 동천석실은 천상의 세계로 우화등선하는 곳이었다. 그에게 부용동 원림은 단지 음풍농월의 공간을 넘어 학문을 도야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인간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도학적 완성의 공간이었다.

곡수당 곡수당은 낙서재 아래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지었다.
▲ 곡수당 곡수당은 낙서재 아래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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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당에서 본 낙서재 곡수당과 낙서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 곡수당에서 본 낙서재 곡수당과 낙서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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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에게 있어 부용동은 은둔의 공간을 넘어 재도약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세연지의 계담 칠암 중 혹약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역경>의 "혹약재연或躍在淵"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도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고산은 이 바위를 '와룡암'이라고도 했는데 와룡선생이라 불리던 촉한의 제갈공명이 때를 기다린 것처럼 언젠가 자신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며 때가 되면 힘차게 뛰어나갈 것임을 암시했다.

고산이 주로 생활했던 낙서재 뒤에는 소은병과 미산, 혁희대 등 인문적 경관으로 바뀐 자연물들이 있다. 이것들을 보면 당시 선비들에게 학문과 사상의 이상향이었던 주자의 무이구곡을 이곳에 실현하고자 했던 유학자로서의 고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유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행적뿐만 아니라 그가 조영한 원림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그가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한 동천석실이다.

석폭 동천석실에는 석담, 석천, 석폭, 석계, 희황교, 석문 등 인문 경관화된 다양한 자연물이 있다.
▲ 석폭 동천석실에는 석담, 석천, 석폭, 석계, 희황교, 석문 등 인문 경관화된 다양한 자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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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암 동천석실의 용두암은 두 바위의 홈에 도르래(용두)를 설치하여 건너편 낙서재에서 음식을 넣은 통을 줄에 매달아 날랐던 시설물이다. 산을 오르는 수고를 들 수 있는 시설물이다.
▲ 용두암 동천석실의 용두암은 두 바위의 홈에 도르래(용두)를 설치하여 건너편 낙서재에서 음식을 넣은 통을 줄에 매달아 날랐던 시설물이다. 산을 오르는 수고를 들 수 있는 시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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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은 산 중턱에 석담, 석천, 석폭, 석계, 희황교, 석문 등이 있는 신선이 사는 동천복지의 땅으로 천계로 가는 신선의 공간이다. 도교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고산이 남긴 시문이나 작품에도 도가적 표현이나 도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 더러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원을 조성한 여러 기술들에서 그의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면도 볼 수 있다. 고산은 유학을 바탕으로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수용하고 도교적 세계까지 넘나들면서 자연 속 원림 생활을 즐긴 것이다.

고산은 정원을 예술로 승화했다. 그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문학적 감성, 남다른 안목과 탁월한 자연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아름다운 산수에 정원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시, 음악, 무용, 그림 등 자신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펼쳐 정원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심미적 감흥을 심화시켰다. 또한 당시 선비들처럼 몸은 현실에 머물면서 관념 속에서만 이상을 꿈꾼 것도 아니었다. 나아가 산수에 파묻혀 은둔만 하거나 자연을 노래하고 풍류만 즐긴 것도 아니었다.

동천석실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은 신선이 사는 동천복지의 땅으로 천계로 가는 신선의 공간이다.
▲ 동천석실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은 신선이 사는 동천복지의 땅으로 천계로 가는 신선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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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직접 터를 잡고 축대를 쌓고 집을 짓는 등 적극적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단지 세상을 잊고자 자연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원을 조성함으로써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정신적 세계를 자연 속에서 새롭게 완성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고산은 도학자연한 선비들의 태도와는 다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산은 보길도 낙서재에서 85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출사와 유배, 은둔으로 점철된 생애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었다. <고산연보>에는 1671년(현종12)에 고산을 문소동 옛터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의 뜻에 따라 정원이 있던 문소동이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세연지 동백 해마다 이맘때면 세연지는 온통 동백꽃이다.

▲ 세연지 동백 해마다 이맘때면 세연지는 온통 동백꽃이다.

 

 

국가명승 제34호 윤선도 원림 관람법

 

 

고산 윤선도 당시의 주요 생활공간은 낙서재였다. 지금처럼 세연정이 부용동 풍경의 중심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부용동을 오면 대개의 사람들은 볼거리가 있고 잘 정돈된 세연정을 얼핏 본 후 곡수당과 낙서재까지 와서 휑하니 둘러본다. 건너편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 보이지만 왠지 오르기에는 귀찮다. 멀리 눈동냥으로 대신하고 그냥 발길을 돌린다.

잠시 고산이 살던 시대를 상상해 보자. 부용동 정원을 제대로 즐기려면 고산이 그랬던 것처럼 낙서재를 제일 먼저 찾아야 한다. 이곳에서 하릴없이 한참을 소요한 후 지루해지면 세연정을 찾아 풍류를 즐기며 세상사를 잠시 잊는다. 그러다 밀려드는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을 피하고 산책도 할 겸 동천석실로 오른다. 동천석실에 올라 탈속의 경지를 맛보니 그제야 부용동 정원이 몸으로 들어온다. 그러려면 아침 일찍 낙서재에서 소요하다 낮에는 세연정으로 자리를 옮겨 보내고 해질 무렵에 동천석실을 찾는 것이 좋다. 부용동 정원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전모를 알 수 없다. 오로지 내가 곧 윤선도가 되어 정서의 환기와 심화를 통한 내면의 일체감을 느낄 때만이 나의 정원으로 다가온다.

세연정에 올라 뱃놀이와 당시의 풍류를 상상하거나 어부사시사를 나지막이 불러보는 건 어떨까. 상류에서부터 연못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을 즐겨도 좋다. 칠암에 앉아 낚시하는 척해도 좋고,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봐도 좋다. 아 참, 옥소대에 올라 그 옛날 황원포 바다는 꼭 보는 게 좋다. 그도 아니라면 숲 속에 들어가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어도 좋다. 유튜브로 <어부사시사>를 듣는 건 또 어떤가. 송골매의 <어부사시사>도 좋고 임웅균의 <어부사시사>도 좋다. 칸타타 버전도 있으니 입맛대로 들어보자. 그저 빈둥거리며 정원을 소요하는 것, 그것이 최상일 수도 있다.

해질녘에는 반드시 동천석실로 가자. 예전처럼 차를 끓이고 마실 수는 없더라도 바위에 앉아 부용동 일대를 내려다보거나 돌 연못에 비친 하늘에 언뜻언뜻 흘러가는 구름을 보라. 신선경이 멀지 않다. 날이 어둑해지면 낙서재 귀암에서 고산처럼 달이 뜨기를 기다려 달 놀이를 하면 또 어떤가.

부용동은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에 찾으면 더욱 좋다. 부용동 여행은 적어도 꽃 피는 아침에 시작하여 달 뜨는 저녁에야 마치는 게 좋다. 기왕이면 하룻밤을 묵는다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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