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부여, 공주 여행
0 기간 : 15. 2. 19(목) ~ 2. 21(일)
0 코스 : 서천 국립생태원~부여 부소산성~공주 무령왕릉
공주 여행
봄비가 내리고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비는 반가운 일이지만 여행객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공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공산성과 마곡사 이외에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전시한 석장리박물관과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그리고 국립공주박물관이 그 옛날 백제의 도읍지였음을 알리고 있다
1971년 여름, 이미 공주 송산리 6호분으로 알려진 무덤의 배수로를 파던 중
한 인부의 삽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1400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유지된
무령왕릉의 벽돌이었다. 그 안에는 신라 못지않은 금관을 비롯해
단 한 차례의 도굴도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총 108종 2906점의 백제 유물이 있었다.
6세기 찬란한 백제의 아름다움이 긴 잠에서 깨어난 순간이다.
송산리고분군 모형 전시관
주차장에서 돔 모양의 건물을 돌아 오르면 전시관 입구가 보인다
표를 사서 들어가면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이 무령왕릉 전시관이다.
다른 곳을 보기 전에 이곳부터 볼 것을 추천한다.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에 대한 발굴 과정부터 백제 역사, 발굴품 등
다양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실질적으로 고분군은 개방되지 않아 이곳이 무령왕릉에서 유일한 볼거리이기 때문이다.
전시관 내부에는 실제 고분군에 들어가는 것처럼 고분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실제 고분군을 보는 듯 생생한 모습이다.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을 나오면 고분군과 무령왕릉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짧은 코스로 걷기에도 편하고 안내 표지판이 있다
원래는 총 17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현재는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1971년 뒤늦게 발견된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제시대 때 발굴되었는데
당시 봉분이 훼손되었고 또한 도굴로 인해 수많은 부장품들이 손실되었다고 한다.
웅진백제역사관
주차장 옆으로 돔 모양의 건물이며 엘리베이터를 타면 아래층에 역사관이 있다
그냥 가볍게 들려보는 곳이다
국립공주박물관
화려한 백제 문화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 과정에서 발견된 보물과 충남 지역의 백제 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있다.
보물 일부는 일본 규슈박물관에 특별전시로 이동했다고 한다.
무령왕릉석수(국보 제162호)가 무덤의 주인을 지키고
왕의 시신을 모신 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기록이 새겨진 ‘지석(誌石)’이 있는데
여기에 ‘백제 사마왕이 돌아가시고 이 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낯선 이름의 ‘사마왕’이 바로 백제 25대 왕이자 웅진 시기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령왕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무령왕을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왕은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 같았으며 매우 용맹하고
기묘한 전략을 잘 세웠다고 한다.
심지어 무령왕은 몸을 사리지 않고 기병 3000명을 직접 거느리고 나아가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또한 중국 양쯔강 이남의 양나라로부터 문물을 수용했으며 일본과도 교류해 백제의 위상을 높였다.
무령왕릉은 기본적으로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무덤이다.
연꽃 문양을 중심으로 수천 점의 터널식 벽돌을 쌓았는데 이 구조는 중국 남조 양식으로
당시 백제가 중국 양쯔강 이남의 양나라와 교류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관 입구에는 쇠뿔을 달고 돌로 만든 동물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진묘수’라고도 불리는데, 외부의 침입자를 막고 죽은 왕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가는 역할을 한다.
왕과 왕비의 머리맡에는 금관모 장식 한 쌍이 발견됐다.
무령왕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백제가 일본과 교류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통사 석조
박물관 입구 왼쪽에 있다. 사찰안에서 물을 담거나 그릇을 씻을때 사용했던 돌대야.
둥근 몸체에 연꽃무늬의 장식은 후기신라와는 다른 백제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왼편은 반죽동석조(보물 제149호), 오른편은 중동석조(보물 제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