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의산(鳳儀山)
0 일시 : 2013.3 12
0 코스 : 봉의산순의비~봉의산성~정상~소양정~비석군~오층탑
봉의산 순의비(鳳儀山殉義碑)
몽고군과 대치하여 줄기찬 항전을 벌였던 곳,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기로 굽힐 줄 모르는 항거를 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참전하였던 관민이 함께 이 산에 피를 뿌리고 전사를 했으며
끝까지 생존하였던 관민들은 적에게 굴하여 욕되게 사느니 보다 깨끗한 대의에 순(殉)하겠다고
가족과 함께 자결을 결행했던 곳이 바로 이 봉의산이다.
나라를 지키려다 뿌린 선열의 숭고한 피가 스며있는 산성은 허물어진채 오늘까지 그 잔영이 전하고 있으나
대의에 순한 이름 모를 수많은 선열들의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1983년 6월 2일 춘 천 시
전망대
춘천시 중심부와 춘천역과 의암호 춘천역앞의 공터는 미군기지가 있던 자리 지금은 개발 중.
봉의산성(鳳儀山城)
허물어진 자취만 남아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 26호
언제 쌓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7세기 이후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217년(고려 고종 4) 거란족 일파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魯周翰)이 전사하였다고 하며,
1253년(고종 40)몽고병이 침입하자 춘천 주민이 이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는데,
몽고병의 포위가 장기화 되면서 성안의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여
소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등 비참한 광경이 있어났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가 진을 쳤던 곳이라고 하며,
6·25전쟁 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산성의 둘레는 약 1,280m에 달하며, 높이는 5~6m 내외이나 지형에 따라 다르고,
성벽은 대체로 붕괴되었으나 일부 구간에는 석축이 남이 있으며, 일부 구간은 지난 1991~1994년에 복원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봉의산(鳳儀山 301.5m)
정상에 오르니 춘천시가지가 잘 조망된다.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다고 하는데 군시설과 통신 중계탑이 있다.
체육시설
정상 바로 밑에 운동시설이 시민들의 휴식공간
소양정(昭陽亭)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호
처음 창건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말 문인들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존재한 것이 확실하다.
운곡 원천석의 시에 ‘소양정’이라는 명칭이 보이나, 15세기경에는 이요루(二樂樓)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래 현재 위치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쪽 강변에 있었다.
1605년(선조 38) 홍수로 유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 부사 유희담(柳希聃)이 다시 지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춘천부사 엄황(嚴滉)이 크게 수리하면서 정자 동쪽에 선몽당(仙夢堂)이라는 부속 건물을 세웠으며,
이때 다시 ‘소양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777년(정조 1) 홍수로 또 유실되었으며, 1780년(정조 4) 부사 이동형(李東馨)이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어,
1966년 옛터보다 위쪽이 되는 봉의산 기슭의 현 위치에 중층 누각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의 소양정은 정면 4칸, 축면 2칸의 누정 형식으로 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소양8경
鳳儀朝雲(봉의조운)
虎岩松風(호암송풍)
月谷朝霧(월곡조무)
牛野暮煙(우야모연)
孤山落潮(고산낙조)
梅江漁笛(매강어적)
華岳淸嵐(화악청람)
鷺州歸帆(로주귀범)
공병중대 전적지 표지석
소양교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6·25전쟁 초기 6사단 공병대대 1중대가 배치되어
소양교를 건너 공격해 오는 적과 혈전을 전개했던 장소이다.
중대잔여병력(약 1개 소대 규모)은 소양교 남쪽 입구 봉의산 기슭에 구축된 방어진지에 배치되었다.
…중략…
6월 27일 새벽, 적 정찰병이 소양교에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 진지에서 내려다보고 쏘는 공병중대의 정확한 사격에 모두 쓰러졌다.
07:00시경부터 적은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했고, 적 포탄은 봉의산과 도청 부근의 시내 중심부에 마구 떨어졌다.
봉의산 뒤편에 위치한 16포병대대도 소양교 북쪽의 동방제사공장 부근 보리밭 속에 숨어있는 적에 대하여 포격을 개시했고
아군의 포탄이 터질 때마다 적군이 이리저리 피해 다녀 보리밭이 파도치듯 했다.
08:00시경, 드디어 적 보병들이 도로위에 출현하였고, 소양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소양교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공병중대가 소총과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자 적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또다시 적이 공격해오고 공병중대가 사격으로 격퇴하는 것이 몇 차례 반복되자 소양교 위에는 적의 시체가 가득히 쌓였다.
…중략…
적은 11:00시경 T-34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적 전차는 소양교 중간 지점에서 공병중대 진지를 향해 전차포 사격을 퍼부은 후
소양교 위에 널려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며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고 그 뒤를 적 보병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공병중대는 기관총 총열이 파열되어 더 이상 사격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전투를 계속하여 적을 저지 했다.
그러나 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고 적 전차 뒤를 따라 소양교를 건너 온 적 보병들이 봉의산으로 공격해 올라오자
더 이상 방어 할 수가 없어 소수의 생존자들은 석사동 방향으로 전투 이탈 하였다.
보병보다도 더 용감히 싸웠고, ‘공격시에는 가장 앞에 나가고 방어시에는 가장 나중에 나온다’는 공병의 정신을 지킨 공병중대 장병들,
그 공병의 혼이 서려있는 이곳에 그들을 영원히 기리고자 표지석을 세운다.
표지석 바로 아래에 소양교가 있다
공병중대 전투 표지석 바로 뒤쪽에 대포처럼 생긴 큰 바위가 북쪽(소양강건너편)을 향해 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바위가 보이지를 않고 그 자리에 소양강변 절벽위 남쪽 도로변에 있던 소양정이 6·25전쟁 때 소실되고 이곳에 복원되었다.
춘본학교설립자비
‘춘본학교’는 1942년에 교육자이자 자선사업가였던 윤용성 씨가 가난한 소년,
제때 배우지 못한 소년, 장애인들을 위해 춘천 소양로 2가에 세웠던 사립학교다.
광복 직후에 윤용성 씨는 중앙로에 있던 일본(미도리) 학교 터에 춘주(春州)학교를 새로 세우면서
춘본학교 학생들을 춘주학교에 편입시켰는데, 그에 따라 자연히 춘본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때 춘본학교의 학부형들이 설립자 윤용성 씨를 기념하여 1945년 10월 봉의산 기슭에 공덕비를 세웠다.
이후 춘주학교는 6.25전쟁 뒤에 춘천 중앙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으니,
오늘날의 춘천 중앙초등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春技桂心旬節之墳
주인공 춘천기생 계심의 묘비이다. 조선 명기중의 한 사람이나
기생으로의 명성보다는 절개를 지킴으로써 조선시대의 가치관에 부합된 삶을 산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는 고작 관청에 소속된 관기에 불과했지만 그의 절개와 일관된 행적에 감동을 받은
춘천의 선비들이 세운 비석이기에 그 가치가 더해진다.
본래 그녀의 묘소는 이곳이 아닌 소양1교에서 현재 후평동 방향의 산기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정된다.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면서 묘가 소실되면서 묘비는 소양사 입구 계단 윗편에 옮겨 놓았었다.
일부 파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때우는 등 묘비가 많이 훼손된 것은 세월의 풍화가 아닌 이건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보인다.
춘천의 문화축제인 소양강 문화제의 시원인 제1회 개나리 호수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고자
춘천의 접객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춘천문화원에서 1997년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고 춘천시에서 안내판을 세운 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해서체로 "節妓全姓桂心名少仍母賤籍敎坊.簡潔之姿幽貞性持身無異盧閨房十七....."
라고 시작되는 계심의 행적이 한자로 음각되어있다.
주인공 전계심은 조선 22대 정조 임금 때 천한 집안 출신인 관노였다.
비록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한 행동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춘천 부사로 부임한 김처인의 소실로 가연을 맺은 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부사는 곧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한 후 떠났으나 소식이 없자
그녀의 어머니는 속인 것이라며 그녀를 서울의 기방으로 팔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기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계심은 이미 부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의 희망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고결한 성품이 소문이 나자 수많은 사내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녀는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정숙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계심은 자신에게 욕망의 눈길을 보내던 한량의 폭력에 의해 정조를 유린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낙태하고 말았다.
낭군을 만날 면목이 없어 상심한 계심은 님에 대한 사랑을 지켜 나가고자 부사에게
사랑의 사연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간직하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하고 말았다.
계심이 자결하던 날.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그녀가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보니
그녀는 꿈속의 모습처럼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부사는 안타까움과 불쌍한 생각에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의 봉의산록에 장사지내 주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순찰사가 사대부가 부인들도 힘든 것을 계심이 해냈다며 그 행적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문(烈女旌門)을 세워주었고
1796년에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사 후대에 귀감이 되도록 묘비를 세워주었다.
묘비의 글은 박종정이 짖고, 글씨는 류상륜이 썼다고 한다.
소양로 비석군(昭陽路碑石群)
관찰사(觀察使)와 부사(府使)등 고을의 수령(首領)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이룩한 공적이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비로서
칭송(稱頌)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永世不忘碑, 愛民善政碑, 頌德碑, 公德碑, 興學碑, 淸白碑 등 다양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
불망비 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