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곳 청평사에는 상사뱀과 공주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당나라에 공주를 사모하던 한 평민 청년이 있었다.

신분상의 차이로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청년이 상사병으로 죽자

홀연히 한 마리 뱀이 나나나 공주의 몸을 감아버린다. 공주를 사랑했던 청년의 혼이 상사뱀으로 변한 것이었다.

놀란 당태종은 의원들을 불러 갖가지 처방을 해보았지만 상사뱀은 꼼작도 하지 않았고 공주는 점점 야위어만 갔다.

신라의 영험있는 사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들여보라는 권유에 공주는 우리나라 사찰을 순례하다

이곳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다. 해가 저물어 계곡의 작은 동굴에서 노숙을 한 다음 날 범종 소리가 들여오자...

"절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밥을 얻어오려고 하니 제 몸에서 내려와 줄실 수 있는지요,

너무 피로하고 걷기가 힘겨워 드리는 말씀이오니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다녀오겠습니다." 하니

한번도 말을 들어주지 않던 상사뱀이 왠일인지 순순히 몸에서 내려와 주었다.

공주는 계곡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법당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였다.

한편 상사뱀은 공주가 늦어지자 혹시 도망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공주를 찾아 나선다.

절에 도착하여 절문(회전문)을 들어서는 순간 맑은 하늘에서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며

벼락이 상사뱀에게 내리쳐 죽은 뱀은 빗물에 떠내려 갔다.

공주가 밥을 얻어 가지고 와 보니 상사뱀이 죽어 폭포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공주는 깜짝 놀랐다. 시원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사모하다 죽은 상사뱀이 불쌍하여

정성껏 묻어주고 청평사에 머무르다 구성폭포 위에 석탑을 세우고 귀국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상사뱀이 돌아나간 문을 회전문, 공주가 노숙했던 작은 동굴을 공주굴,

그가 목욕한 웅덩이를 공주탕, 삼층석탑이 공주탑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청평사를 오르다보면 우측으로 높이 9m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고 해서 구성(九聲)폭포이다.

당나라 공주와 뱀과의 사랑이 담긴 공주굴과 공주탑의 전설이 찾는 이를 흥미롭게 하며,

이 폭포의 줄기에는 크고 작은 3개의 폭포와 공주가 목욕했다는 공주탕(폭포 밑에 형성되는 폭호에 해당)이 있다.






진락공 이자현 부도(眞樂公 李資玄浮屠)

부도는 고승이 죽으면 화장하여 나온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석조구조물이다.

이 부도는 청평사에 들어와 도를 닦았던 고려시대의 뛰어난 학자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것으로

전해지는것이다.

이자현의 호는 식암(息庵) 또는 희이자(希夷子)였는데, 인품이 뛰어났던 그를 흠모한 고려의 인종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진락(眞樂)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부도의 양식은 팔각원당형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가 180cm이다.



청평사 영지(淸平寺 影池)

이 못은 오봉산의 옛 이름인 경운산이 물 위에 그림자처럼 떠오른다고 해서 영지라 불리운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 전통적인 정원은 최소한의 인공만을 가하여

자연의 멋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주위의 경관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꾸미는 것이 특징이다.

이 못은 청평사에 은거하면서 평생을 보낸 이자현이 만든 정원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못 안에는 3개의 큰 돌을 배치하여 단순하면서도 입체적인 변화감을 더하여 주고 있다.

이곳의 정원은 청평사 입구의 구성폭포 아래의 거북바위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절 뒷편인 청평선동 계곡까지 약 1km에 이어지며, 영지는그 중심에 위치한다.

고려시대 정원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며, 그가 바위에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



청평사는 고려시대의 절로, 고려 광종 24년(973)에 영현선사가 창건하여 백암선원이라 이름하였다가

문종 22년(1068) 이의가 춘주도 감찰사가 되어 이절을 중건하고 보현원이라하였고

후에 이자현이 중수하여 문수원이라 했다. 이후 문수원으로 불려오다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크게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랜 세월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문수원기비와 국보였던 극락전 등이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극락전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남아 있는 유물로는 회전문(보물 제164호),

삼층석탑, 진락공 부도, 환숙당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관직에 있던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내던 문수원과 영지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의 정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청평사에는 우리나라 서예사를 빛낸 2개의 명품이 있었다.

하나는 스님 탄연의 진락공 이자현비 글씨가 그것이고

또 하나는 이암의 청평사 문수원장경비이다. 우리나라 서예사의 명품으로 전해진다.


973년 백암선원(白岩禪院)으로 창건된 천년사찰 청평상의 회전문은 조선 명종(1546-1567)대에

세워진 목조 건축물이다.


회전문은 청평상의 사천왕문에 해당되는 대표적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중앙은 넓게 잡아 통로로 사용하고 좌우에는 칸을 좁혀

마루를 깔아 천왕상 등을 배치했던 것으로보인다.


이 건물은 기둥위에 가구를 배치한 주심포 계통이나 이곳에 새날개 모양의 부재를 사용하는

익공(翼工)을 설치하여 주심포에서 익공계로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문이 움직이거나 회전하는 장치가 없는데도 회전문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이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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