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산행기
0 산명 : 경주 토함산(745 m)
0 위치 : 경주시 진현동, 황룡동
0 코스 : 불국사~석굴암~토함산~석굴암~불국사
0 일자 : 2006. 2. 19(일)
0 시간 : 3시간
(산행시간)
10:30 주차장
10:35 불국사
10:55 약수터 갈림길
11:10 종각/석굴암 입구
11:20 샘터 갈림길
11:25 성화채화지 갈림길
11:35 토함산
11:45 헬기장
11:55 성화채화지
12:20 석굴암 주차장 /13:15 식출발
13:40 불국사 /14:30 불국사 주차장
15:05 불국사 출발
15:40 감은사터 /15:55 감은사 출발
16:00 감포 /16:30 감포 출발
(산행기)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경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경주 5악의 하나로 신라인들의 숭상을 받은 산이었다.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가 굽어 보이는 이 산은,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인 석굴암을 품은 신라의 파수꾼이기도하다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자리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으며
토함산의 한 봉우리인 만호봉은 화산폭발로 인해 생긴 봉우리로
지금도 봉우리 주위에서화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불국사 주차장
불국사에서 토함산 정상에 이르는 잘 다듬어진 관광로로서
주차장에서 불국사 일주문을 지나 오르는 오붓한 길
단풍나무가 가득한 숲길을 오른다
넓은 잘 다듬어진 길이 끝나는 지점에 등산로 안내판이 보인다.
토함산 갈림길
왼쪽은 입산통제구간.
안내판 뒤쪽의 능선길을 택하면
성화채화지 약간 못 미친 지점에서 등산로와 합쳐진다.
약수터 갈림길
오른쪽으로 난 계곡옆길을 택하면
중간에 약수터가 있다
왼쪽 계단을 따라 석굴암 주차장으로 오른다
석굴암 입구
석굴암주차장에서부터 토함산 정상까지는 약 1.7km 정도
매표소 옆에 토함산 정상으로 가는 길
그리고 석굴암 입구 일주문이 있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어디서 왔는지 등산객이 가득하다
석굴암 주차장에서부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낙동정맥인 백운산에서 갈라져 나온 형남기맥(토함기맥)에 해당된다.
이 맥은 추령재, 함월산, 성황재를 거쳐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호미곶 대보박물관으로 이어진다.
추령재 갈림길
추령가는 표지판이 잘못 표기된 것이지만 1시간정도 거리
사방이 숲으로 가려진 등산로 바닥은
얼음이 녹아 질퍽하고 미끄럽다
성화채화지 갈림길
안내표지판에서 길이 두개로 갈라진다.
왼쪽으로 난 능선 길은 성화채화지를 지나서 올라가는 길이며
오른쪽으로 약간 돌아가는 길은 성화채화지를 우회하는 길로
두 길은 얼마가지 않아 다시 만난다.
하산 길에 들리기로 하고 통과
헬기장
능선으로 갈대가 가득한 평평한 벌판
갈대사이로 난길을 오르면 헬기장이다
시산제를 지내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토함산
동해의 잔잔한 수평선 위로 해가 가득 떠오르고
붉은 태양이 토함산을 넘어갈 때
'토함'의 진의를 깨닫는다는데...
안무로 가려진 형남기맥(토함기맥)의 추령이 길게 이어지고
시야는 흐리지만 사방이 트인 시원한 곳
북으로 함월산,동대봉,대왕암이 있는 감포
남으로 치술령, 낙동정맥을 따라 백운산,고헌산,가지산등 영남알프스 산군들
서쪽으로 경주시가 그리고 남산,단석산의 하늘금
토함산 유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토함산과 인연이 깊은 석탈해왕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견해이다.
토함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석탈해의 탄생과 죽음에 얽힌 이야기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탈해는 "한편 토해(吐解)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특히 『삼국유사』에서 토해라고 많이 쓰고 있다.
토해와 토함은 유사음이니 토함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토함산의 경관에서 연유한 것이다.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 토함산이다.
정말로 동해의 습기와 바람은 변화무쌍하여 지척을 분별 못할 안개가
눈앞을 가리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여
잇달은 봉우리와 소나무 숲이 한 폭의 동양화를 이룬다.
성화채화지
성화채화지와 마애석불 그리고 제단이 있는곳
좁은 능선에서 시산제를 지내는 산악회가 있어
사진촬영 포기
비켜줄 생각은 없고
부처님 마애석불 앞에서 돼지고기를 썰고 마시고
12:20 석굴암 주차장
그사이 석굴암 주차장은 만원이다
구석에서 점심을 준비한다 /13:15 출발
13:40 불국사 /14:30 불국사 주차장
산행을 마치고 경내를 관람하기로 한다
==경주 불국사 여행기==
<석굴암>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토함산의 동쪽 봉우리 아래에 동남향하여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데
석벽의 석재를 짜맞추어 인공 석굴을 만든 것으로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본뜬 것이다.
주실은 구릉형으로 그 위에 봉토로 덮었으며
전실에는 원래의 지붕이 없어져 1963년 목조건물을 새로 덮었다.
불국사에서 동북쪽으로 3킬로미터쯤 떨어져 토함산 마루 가까이에 자리잡은 석굴암은
월성군 감포읍 쪽의 동해를 향해 열려 있다.
들어가는 문의 양쪽에는 금강신의 상이, 벽에는 팔부신들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의 손 모양은 악마의 꾐을 물리치며 땅을 짚어 부터의 깨달음을 증명하던
바로 그 순간을 나타내는 손 모양이라고 한다.
오른판을 무릎 아래로 내려 검지손가락이 땅에 닿을 듯 손을 펴고 있다.
동해에서 솟은 행의 첫 빛줄기가 본존불의 얼굴에 혈색을 돋아나게 하고,
그 반사된 빛이 사방의 여러조각과 공간을 비추게 되는 석굴암의 구조는
바로 '진리의 빛'이 천지만물을 밝힘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불국사>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이 탑은 ‘무영탑’ 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은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석가탑은1966년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감은사탑>
0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0 시대 : 통일신라
아. 감은사 , 감은사 탑이여!
석양을 등진 감은사지의 석탑,
달빛 아래 빛나던 문무왕의 수중릉,
기림사에서 바라본 너무나 파랗던 하늘,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와 청동제사각감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감은사 쌍탑은 통일신라시대 탑중 가장 큰 탑이다.
감은사 탑을 가까이서 보면 탑 꼭대기에 3.9m 높이의 찰주가 솟아있다.
찰주란 탑의 상륜부를 장식하던 기둥인데
감은사 탑 찰주는 천 수백년 세월을 바닷가 해풍을 견디며
지금까지 녹하나 쓸지않고 썩지도 않고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옛날 신라의 장인들이 쇠를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앞섰는가를 짐작케 한다.
지금 동탑을 해체하여 복원작업을 하고있다.
<대왕암과 감은사>
감은사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경주에서는 34km, 포항에서는 32km이다.
절터의 동쪽 동해바다 가운데 있는 대왕암이 바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30대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며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문무왕은 재위한 지 21년 만인 681년 세상을 떠났는데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간(世間)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신라의 강토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던
문무왕은 동해에 가람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왕이 돌아 가셨으므로,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하였던 것이다.
일국의 군왕으로서 사치와 영화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죽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고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화장하여 산골할 것을 당부한 유조(遺詔)는
그 탁월한 인품을 짐작케 해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신문왕을 거쳐 이후 경덕왕 대에 이르는 동안
신라는융성과 번영을 누리고 찬란한 민족문화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왕은 등극하면서 곧 부왕의 뜻을 받들어 선조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역사를 진행시켜
즉위하던 해(681) 절을 이룩하여 감은사라고 했다.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이 된 부왕이 조수(潮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감은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쌍탑이 배치된
전형적인 통일신라기의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다.
절을 낙성한 후 신문왕은 이곳에서 신비스러운 피리를 얻었다고 한다.
해관(海官)이 아뢰기를 "동해안에 작은 섬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점을 치게 했더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문무대왕과 김유신공의 두 성인께서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실 징조입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견대(利見台)에 가서 바다를 살폈다.
이튿날 산 위에 있던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컴컴해 지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자 용이 대나무로 된 피리를 바쳤다.
그 피리를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며, 홍수 질 때는 비가 개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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