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탑선원해인사의 말사 중 하나.3.1운동때 33인중 한 분인 용성스님의 사리를 보존하기위해 1945년에 지어졌으며 용탑원이라고도 한다.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고암대종사 탑비와 고암당조선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석종형 부도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중 가장 먼저 건립되었고, 비문에 사명대사의 석장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부도와 석장비는 본래 세트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으로 가면 홍제암이다
외나무다리계곡을 건너는 커다란 통나무다리저승가면 건너봤느냐고 묻는다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면화장실 그리고 해인사로 가는 길이다
학사대 지팡이 나무.한림학사 최치원선생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할 때제자들 앞에서 이곳에 지팡이를 꽂으며내가 살아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있을 것이니학문에 열중하거라는 유언을 남기고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들어갔다는 나무가 살아서 잎이나 지금까지 1200년을 살고 있다는데...
장경각 법당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장경각을 마주할 수 있다. 빙 둘러 ㅁ자 구조로 지어진 장경각 안에는 긴 세월을 지내온 목판 대장경이 마치 서고에 진열된 장서처럼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숯과 소금을 이용하여 오랜 세월 동안 별다른 손상 없이 대장경을 보관해 냈던 장경판전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다.
건물의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窓이나,下창과 上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돼 있다.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이것은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그 공기가 골고루 퍼진 후에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건물의 바닥은 숯,횟가루,소금,찰흙 등으로 되어있어 습도와 온도 조절이 잘된다고 한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으로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거제도, 완도 등지에서 실어온 자작나무나 후박나무로 만든 대장경판은 오늘날까지도 상하거나 뒤틀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먼저, 원목을 3년 동안 바닷물 속에 담가둔다. 이 원목을 꺼내서 판을 짜고, 이 판을 소금물에 삶는다. 삶은 판을 또다시 3년 동안 그늘에서 말리고, 그 판에 글자를 한자한자 새긴다. 다 새긴 판에 옻칠을 하면 끝난다. 6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고려팔만대장경이다. 이 장경각과 고려대장경판은 1995년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해인사고려각판고려시대의 불교경전과 유명한 승려들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해인사 고려각판은 대장경판과는 달리 사찰이나 지방관청에서 새긴 것이며 동·서 사간판전에 모두 54종 2,835판이 보관되어 있다.
구광루일반 대중을 위한 예불장소였으나 현재는 기념품점과 영상실이 있다
앞 마당에 노란 벽돌로 그어진 특이한 도안이 있는데 이것이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해인도'이며 누구든 합장을 하고 한바퀴 돌면 공덕을 얻는단다. 불자들이 노란 금을 따라 돌고 있다.
대적광전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 법당본래 성주군 금당사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897년 범운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지장보살·보현보살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해탈문을 내려오면
고사목1,200년전 신라의 애장왕이 왕후의 병치료를 해 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해인사를 창건할 당시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가 지금은 죽어 덧없는 세월을 회상하듯 검게 홀로 서 있다
성보 박불관예전에 해인 초등학교 자리에 학교가 없어지고 어느새 현대판 박물관으로 변신했다그래서 사진을 남기지 않고 일주문으로 대신한다
영지가야산의 칠불봉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가야국의 김수로왕 아들 일곱이 가야산에 성불하러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자식을 보러 왔다가 못 만나고 영지에 비친 아들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원경왕사 비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해인사 길상탑진성여왕대 해인사부근의 전란속에서 사망한 승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본래 탑내에 탑지가 있었는데 도굴 당한 것을 1966년에 되찾음으로써 건탑과 관련된 여러 사실이 알려졌다.
성철대종사 부도탑디자인이 아주 특이해서 살펴보았더니 환경대상인가 뭣인가 하는 상을 받은 작품이란다.아마도 살아생전 이곳을 성철 스님이 보셨다면가야산이 떠나도록 쩌렁쩌렁한 큰소리로 이놈들아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넓은 장소를 그리고 이렇게 치장을 했냐고 할 것 같다
성철 스님의 누더기 법복이 생각난다.살아생전 그렇게 검소하게 사셨는데 스님과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조경과 환경이다.바로 아래 자운율사 사리탑이 있다
주차장올라가는 길이 많이 변했다.아스팔트가 깔려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기고 보행자용 도로가 새로 생겼다.길옆으로 보이는 계곡이 이제는 온갖 고생은 혼자 다한 듯 더러워지고 훼손되어 있어 측은한 마음뿐.그때는 해인사가 이렇지 않았는데...차량으로 가득한 비좁은 주차장에서 버스에 오른다
홍류동천년 노송과 활엽수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홍류동 계곡십리나 이어지는 구불구불 포장도로 곁으로 물소리가 넘쳐날 듯 힘차다. 오랫만에 찾은 해인사무척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아쉬움과 허전함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