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은 소백산맥 대간 중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 백화산을 일으켰던 소백산맥 줄기가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그 산들 중 하나가 희양산으로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으로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산세가 험해 한말에는 의병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산 정상 일대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난코스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겨울에 등산하기엔 위험한 반면 전문 클라이머들은 즐겨 찾는다.
옛날 사람들은 희양산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 했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은 “병풍같이 사방을 둘러싼 산은 마치 큰 봉황이 구름을 흔들며 날아오르듯 하고, 백 겹으로 굽이도는 물은 뿔 없는 용이 허리를 돌에 걸쳐 누워있는 듯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이에 지증대사가 감탄하고 “만약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아마도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하고 봉암사를 창건하였으니 바로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9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봉암사는 연중 사월초파일날 하루만 일반인에게 문을 열지만 하안거가 끝난 지금 산행이 가능할거라는 기대를 걸고백두대간상의 그 무시무시한(?) 희양산 구간으로 떠나보기로 한다.
주차장 /농산물집하장휴게소 은티마을은 오지중의 오지다. 버스 한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 하지만 마을 입구에 있는 휴게소에 도착하니 어느 관광지 못지않게 주차장은 잘 되어있다 희양산,구왕산, 마분봉, 악휘봉 등을 산행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 마을을 통과해야 한다
은티마을 주차장 옆의 산행 안내도를 지나면 장승과 은티마을 유래비 먼저 반긴다. 주위에 노송이 둘러싸고 있어서 운치가 있고 예전엔 마을구판장 앞 당산나무 옆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남근석에서 다리를 건너 왼쪽길로 들어서면 길은 서서히 언덕으로 오른다. 이어서 과일 나무를 심은 넓은 밭 가운데로 이어지던 길은 서서히 산속으로 들어간다.
갈림길 초입부터 임도를 걷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이정표가 없는 임도 갈림 길 좌측은 성터, 지름티재 희양산코스... 우측의 은티재, 구왕봉 코스로 들어선다
초가을 한낮 더위는 청각적이다. 미동도 없는 숲속.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 속으로 계곡이 이어진다 햇빛이 들지 않는 숲길 비온 뒤라 등산로마다 물이 흐른다
호리골재완만한 경사를 따라 오르는 길 배낭 위에 한가득 땀방울을 채운 뒤에야 잘 다듬어진 안동권씨 묘지가 있는 호리골재 대간길 능선에 오른다 주치봉은 우측, 좌측이 지름티재 이정표 /악휘봉 100분/은티마을 50분/구왕봉 50분
전망바위 이곳이 거의 정상이라 할 정도로 조망이 탁월한 곳 ...우거진 시원한 숲길이 이어진다.
가끔씩 좌측으로 은티마을의 아담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은티마을 건너로는 채석광산이 산허리를 헤쳐 놓았다
길을 가로막은 넓은 바위에서 잠시 쉬고집채만한 바위 틈새를 빠져나가면..
구왕봉(877m) 사방이 막힌 숲속은 수목에 가려 조망은 형편없다. 구왕봉이라는 비닐표지가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곳 하지만 정상부를 내려서면 노송이 자리하고 있는 멋진 바위전망대가 기다린다
지증대사가 봉암사 주춧돌을 세울 때 그 자리의 연못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 용을 신통력으로 내쫓아 보냈고 그 쫓겨난 용들이 멀리 가지 않고 하필이면 봉암사와 희양산이 가장 잘 보이는 봉우리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용들이 맨날 미운 지증대사를 내려다보며 그 연못에 살게 해 달라고 하소연 했다는데 그 봉우리가 바로 구왕봉이고(원래는 구룡봉이라 불렀다고 함) 이곳이 봉암사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용의 머리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봉암사 스님들은 이 봉우리를 날개봉이라고도 부른다. 지도를 놓고 보면 희양산 좌우로 구왕봉과 시루봉이 봉암사를 향해 날아드는 새의 날개와 거의 흡사하다.
급경사 내리막 비가 오려는지 희양산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언뜻언뜻 시야가 열리면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언저리가 참선 삼매에 빠진 고승의 풍모를 보여준다.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남쪽 기슭에 자리한 봉암사..별천지인양 아스라하다.
마당바위 희양산 그리고 마치 봉황이 구름을 헤치며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이라는 봉암용곡. 겹겹이 둘러쳐진 산들에 꼭꼭 숨은 봉암사도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가야할 장성봉과 애기암봉이 보이고.. 암릉을 내려서는 좁은 경사길을 빠져나와 바위에 겨우 붙은 소나무를 발판삼아 몇 개의 위험한 로프구간을 내려서면..
지름티재 연풍과 가은을 넘나들던 가장 최단거리 지름길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지름티재 봉암용곡으로 해서 봉암사로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출입금지 목책 저승사자보다도 냉혈한 스님들의 횡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문밖출입을 삼간 채 정진한다는 봉암사 결사정신으로 이제 생태보전을 위해 능선을 지킨다는데 할말을 잃는다
봉암사가 산문에 빗장을 지른 것은 지난 82년 6월. 전국 각지의 유명사찰들이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 당시 봉암사도 다른 사찰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 40여리 계곡에서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음식찌꺼기로 악취가 진동하고, 심지어 마애보살좌상이 새겨진 백운대에 복날이면 개장국을 끓이는 솥이 걸리기도 했다.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는 마애상 밑 바위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드렸는지 움푹 팬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내의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가 보철에 의지하게 된 것도 남해에서 가져왔다는 점판암으로 된 탑비를 숫돌로 쓰려는 일부 사람들의 만행 때문이라고 한다.
백두대간을 왜 막느냐며 꼭 가야겠다는 대간꾼과, 수도도량임으로 절대 출입을 할 수 없다는 스님들 사이에서 뜨거운 공방이 계속되는 이곳. 중생이 피해 돌아가야 하는 분노.. 제발 중놈처럼 살지 말고 스님처럼 살아라
옆에 희양산을 두고 구왕봉만 돌아보는 안타까움 어려운 시간을 내서 온 산행길인데..
체념하고 돌아 내려가는 길 다래도 줍고 바람결에 떨어지는 도토리도 만난다
해골바위 백두대간 시그널이 가득한 계곡 갈림길 호젓한 숲길을 갈라내고 임도공사가 한창이다
정자도 세우고 꽃동산도 만들고.. 우측은 성터를 거쳐 백두대간으로 돌아가는 우회길 계곡에서 점심을 채린다 /지름티재1km, 은티마을 0.8km
삼거리 질퍽거리는 공사중인 도로를 내려와 만나는 삼거리에도 정자가 있다
우측은 지름티재 직진은 호리골재를 거쳐 구왕산 가는 길/희양산90분, 구왕산 호리골재 100분
주차장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오면 시작지점인 Y자 갈림길을 다시 만난다
하산길에 만나는 사과밭 익어가는 가을이 가지마다 매달렸다
아쉬움으로 가득한 산행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산행을 접는다
(꽃범의꼬리)<산행후기>지름티~희양산~은티미을 오름길의 끝없이 이어지는 로프구간의 본격적인 희양산 오름길 고인돌을 얹어놓은 듯한 큰 바위군을 지나면서부터 계속 로프구간이 이어지는데 희양산은 그 명성에 걸맞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주지 않는다. 마지막 로프구간을 올라서면 다 부셔져 가는 목책이 막아서는 안부다. 좌측은 시루봉 방향의 북진하는 대간길이며 우측은 희양산 오름길인데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발아래는 굽이굽이 휘어도는 봉암용곡과 봉황이 알을 품 듯 자리잡은 봉암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좌로는 청화산과 조항산이 아른하고 대야산과 악휘봉도 시야에 가득하다. 정상돌탑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희양산에는 정상석대신 돌탑만이 쓸쓸이 산객을 맞이하고 있다. 시루봉이 훤히 보이는 암반을 다시 돌아 나와 산성터로 내려서는데 안부에는 여전히 목책으로 등로를 막아놓았고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이곳에서 은티마을로 하산할 수 있다.
<달맞이꽃> 봉암사1년 중에서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봉암사라는 이름에도 풍수 코드가 숨어 있다. 이름을 보면 “봉황처럼 생긴 바위 또는 바위산에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봉황처럼 생겼다는 것은 어떤 형태인가? 군인들이 쓰는 철모 모양이거나 또는 바가지처럼 둥근 형태, 종처럼 생긴 모습을 풍수가에서는 봉황의 머리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지역 이름에 ‘봉’자가 들어가는 곳은 주변에 철모 모양의 산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산의 크기가 크면 봉황으로 보고 ‘비봉포란(나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음)’을 설정하고, 조금 작으면 닭으로 여겨서 ‘금계포란’이라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봉황이나 닭은 그 주변에 둥그런 산이 있다는 말이다.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는 뒷산은 희양산이다. 희양산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그 모양이 봉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옛날 도인들이 절 이름을 봉암사라 지은 것도 이 희양산의 형상 때문이다. 북한산의 인수봉, 진안의 마이산과 함께 희양산은 우리나라 ‘3대 대머리 산’의 하나다. 철모처럼 생겼다는 말이다. 산 전체가 단단한 바위산이면서 봉황처럼 생겼다면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도 비례해서 강하다. 지기가 강한 곳에서는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고승이 배출되거나 또는 장군이 나오고, 잘못되면 조직폭력배 두목이 나온다. 봉암사는 고대부터 고승과 도인들이 수도하던 곳이다.옛날 도인들은 모두 그 에너지를 감지했기 때문에 봉암사를 좋아했던 것이다. 신라 헌강왕 3년(879) 지증 도헌 국사가 창건한 봉암사. 오늘날 희양산문으로 불리는 9산 선문의 하나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문'에 전하는 창건의 내력은 이렇다. 심충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를 찾아가 ‘봉암용곡’을 희사하며 절 짓기를 간청했다. 이에 지증대사는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가면서 산세를 두루 살폈다. 이 때의 모습을 최치원은 그림을 그리듯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있으니 마치 봉황이 날개로 구름을 헤치며 오르는 듯하고, 백 겹 띠처럼 흐르는 계곡물은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에 (지증국사가) 감탄조로 말하기를 ‘어찌 하늘이 내린 땅이라 하지 않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열린 희양산문은 후삼국 격변기에 폐허가 되었고, 935년에 정진 긍양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조선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