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권 형성부터 중 민항기 불시착까지,
반세기 춘천사 관통한 캠프페이지
[사라지는 것들, 기억은 역사로 남는다]
/강원도민일보
5-1. 6·25 전쟁으로 시작된 춘천 캠프페이지
인천상륙작전 다음해 1951년
군수품 공급 활주로 춘천 건립
유도탄 미사일·아파치 헬기 상주
한중수교 물꼬 민항기 불시착도
소양로·근화동·명동 상권 형성
철수까지 반세기 시민 삶 영향
춘천 유일 외국과 소통창구
한국·동아시아 격동시절 집약
▲ 지난 2013년 춘천시 옛 미군기지인 캠프페이지에서 62년간 닫혀 있던 부지를 전면 개방하는 축하행사가 열렸다. 이날 개방행사는 춘천시민 500여명이 참가해 담장을 허무는 퍼포먼스로 진행됐다. 본사DB
[강원도민일보 오세현·김민정 기자] 강원도민일보는 강원도의 과거와 현재를 회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가늠하는 ‘사라지는 것들,기억은 역사로 남는다 시리즈’를 연중 연재한다.‘사라지는 것들’ 시리즈는 강원도의 과거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이를 역사로 기억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다섯번째 순서는 춘천 캠프페이지다.
▲ 춘천 캠프페이지에서 근무하던 직원들 모습. 사진제공=형백우씨
UN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춘천이 수복됐다.
그 다음해 3월,미8군이 군수품을 공급하는 비행장 활주로를 근화동 일원에 만들기 시작했다.미군은 6·25전쟁 때 공을 세운 페이지 중령을 추모하는 뜻으로 캠프페이지 부대에 병력을 집중했다.최전방 중동부 전선의 요충지로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다는 의도도 깔려있었다.춘천 한복판에 들어선 캠프페이지 조성 배경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춘천역 앞 근화동 54만4000㎡(약 16만4560평) 규모의 광활한 대지에 들어선 미군부대 캠프페이지는 남과 북을 갈라놓은 역사적인 사건에서 시작됐다.지역사회 차원에서 당시 미군이 어떤 전략적 판단에 의해 근화동을 비행장으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내용은 없다.다만 1951년 3월 이후 캠프페이지 부지는 69년이 지난 현재까지 온전히 시민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당시 캠프페이지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은 춘천이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회고했다.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강원도지부장을 지냈던 이은상(77)씨는 “캠프페이지는 유도탄 미사일 기지,아파치 헬기 부대가 거쳐간 곳”이라며 “아파치 헬기가 춘천에 20대가 있었는데 최대 320대의 탱크를 무력화 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춘 셈”이라고 말했다.이어 “아파치 헬기 중 정보수집이 가능한 헬기가 춘천에서 뜨면 휴전선 근방 정보까지 수집이 가능했다”고 했다.
▲ 춘천 캠프페이지에서 근무하던 직원들 모습. 사진제공=형백우씨
춘천 중심지에 들어선 미군부대는 2005년 철수까지 반세기 동안 춘천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소양로와 근화동,명동 일원은 미군들을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됐다.외국인 전용 술집,양복점은 물론이고 난초촌,장미촌,백합촌 등 기지촌까지 들어섰다.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외국계 은행도 설치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가 이들 지역의 전성기였다.부친이 운영하던 양복점을 71년부터 88년까지 이끌어 온 박모(67)씨는 “미군들이 양복점에 오면 많이 사는 사람은 한 번에 1000불,2000불씩 샀는데 당시로는 굉장히 큰 금액”이라며 “양복을 한 번에 20벌씩 맞춰서 군사우편으로 미국에 보내는 군인도 있었을 만큼 그때는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돈이 들어와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한때는 미군과 한국인 직원이 1200여 명에 달했지만 1990년대 들어 주한미군이 일부 철수하면서 소양로와 근화동,명동 초입 상권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고 외국 물품을 쉽게 접할 수 없던 시절 캠프페이지는 춘천에서 유일하게 외국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다.캠프페이지에서는 정례적으로 지역 기관단체장들과 캠프페이지 관계자들이 만나는 한미친선의 날을 개최했다.이 업무는 주로 MWR(Morale Welfare Recreation)에서 담당했다.이곳 총괄매니저를 지냈던 이모(78)씨는 “지역 저명인사나 기관장들이 많이 왔었다”며 “외국문물을 접할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였고 캠프페이지에서 알게 모르게 외부로 반출된 술,담배,음식들도 있었다”고 했다.
한중 수교의 물꼬를 튼 계기로 평가받는 중국 민항기 불시착은 캠프페이지 50여 년 역사에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1983년 5월 5일 승무원 9명을 포함한 승객 105명이 탄 중국 민항기가 선양을 출발,상하이로 가던 중 납치범들에 의해 공중에서 피랍돼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했다.송환 문제로 한국과 중국 정부는 첫 교류를 시작해 10여년 간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이는 곧 1991년 국교 수립의 성과로 이어졌다.캠프페이지에서 근무하던 직원들도 1983년 그날을 또렷히 기억했다.배중근(66)씨는 “그날 휴일이어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뒷풀이 중이었는데 비상 사이렌 공습 경보가 울리면서 중국 항공기가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했다는 방송이 나왔다”며 “부대에 들어갔더니 잔디밭에 비행기가 쳐박혀 있었고 인근 거북당 빵집에서 비행기 탑승객들에게 빵을 공급했다고 들었다.승객들은 내려서 세종호텔로 특별 후송됐고 비행기 무게가 무거워서 기술자들이 실내 의자를 모두 들어낸 뒤에야 비행기를 띄울 수 있었다”고 했다.춘천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미군이 소유하고 있던 탓에 당시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함부로 출입이 어려웠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춘천 캠프페이지는 한국과 동아시아를 둘러싼 격동의 그 시절이 집약된 곳이었다.
캠프페이지 험난한 귀향…‘토지정화’ 새 과제 직면
[사라지는 것들, 기억은 역사로 남는다]
5-2. 환경오염 논란 직면한 춘천 캠프페이지
2005년 방사능오염 우려부터
‘의혹제기’·‘미검출’ 반복
2011년 고엽제 폐기 증언 파문
2009년 환경정화작업 시작
최근 10년만에 부실정화의혹
옛 직원 핵폐기물 등 오염 추정
일각 “당시 관리감독 철저” 이견
▲ 춘천 캠프페이지 본사DB
[강원도민일보 오세현·김민정 기자] 강원도민일보는 강원도의 과거와 현재를 회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가늠하는 ‘사라지는 것들,기억은 역사로 남는다 시리즈’를 연중 연재한다.‘사라지는 것들’ 시리즈는 강원도의 과거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이를 역사로 기억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다섯번째 순서는 춘천 캠프페이지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국 미군부대 주둔 지역을 중심으로 소음공해·환경오염 논란이 들끓었고 캠프페이지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비행기 이착륙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주변 건물 고도를 45m 이하로 규정한 고도제한 역시 지역 발전의 발목을 잡는 요소로 지적돼 왔다.
▲ 지난 1968년 미군 항공 6소대가 춘천 캠프페이지 내에서 고엽제를 헬기로 싣고 있다. 사진=짐 힐튼 제공
캠프페이지 환경오염 논란은 ‘의혹 제기’와 ‘유해성분 미검출’의 반복이었다.2005년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방사능 오염 조사 필요성이 제기,시에서 조사를 벌였지만 인위적인 방사능 수치는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2011년에는 퇴역 미군들을 중심으로 1970년대 캠프페이지에도 고엽제가 폐기됐다는 증언이 나와 파문이 일었다.퇴역 주한 미군 댈러스 스넬(Dallas Snell)씨는 2011년 강원도민일보와의 온라인 인터뷰를 통해 “1972년 여름과 가을 비행장 주위 전체에 방호복을 입은 한국남자 2명이 이른 아침마다 고엽제와 제초제를 뿌렸고 그들이 몰고온 파란색 트럭은 한 달 이상 기지 주위를 돌아다녔다”고 주장했다.2011년 8월 민관군 공동조사단이 구성됐고 3개월 간의 조사 끝에 그해 11월 민관군 공동조사단은 캠프페이지 부지에서 고엽제와 다이옥신,방사능 물질 등의 오염이 없었다는 결론을 냈다.2009년부터는 유류저장시설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환경정화작업이 시작됐다.당시 오염면적은 6만여㎡ 규모였다.
▲ 미군 항공 6소대 헬리콥터가 춘천 북쪽 DMZ 지대에서 고엽제를 뿌리고 있다.사진=짐 힐튼 제공
환경오염 논란이 잦아든 뒤에도 캠프페이지 활용 대책은 확정되지 못했다.춘천시는 2012년부터 1750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국방부 소유였던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2016년 부지 매입을 완료했다.그사이 기존 캠프페이지 부지에 남아있던 격납고 2개동과 조종사 숙소,물탱크는 무상으로 받아 어린이 놀이시설과 체육관 등 시설물을 조성했지만 54만여㎡ 부지 대부분은 공터로 남아있다.캠프페이지는 지금도 시민공원으로 만들겠다는 큰 그림만 그려진 상태다.
최근에는 10여년 만에 오염된 토양이 또 다시 발견되면서 부실정화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기름에 오염된 토양이 발견됐고 춘천시가 강원도보건환경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 2m 지점 시료의 석유계총탄화수소(TPH) 수치가 2618㎎/㎏로 검출,1지역 기준치(500㎎/㎏)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시는 토양이 제대로 정화되지 않았다고 보고 국방부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이지만 국방부는 ‘현 토지 소유자인 춘천시에서 오염원인과 부실정화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답변,양측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 캠프페이지에서 근무하던 미군들이 최소한의 방호복도 없이 고엽제와 제초제 등 유독물질을 묻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댈러스 스넬 제공
정화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춘천시의회에 따르면 당시 국방부는 오염토양을 굴착해 지표면에 깔아 놓고 정기적으로 뒤집어줌으로써 산소를 공급하는 ‘토양경작법’과 오염토양 내의 유기오염물질을 휘발·탈착시키는 기법인 ‘열탈착법’을 병행했다.김은석 시의원은 “토양경작법은 국내에서 적용된 비율이 11%밖에 되지 않고 대기오염 우려가 있어 시민건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며 “해당부지의 조속한 개발이 필요해 저비용,단기간 정화작업이 필요할 때 채택하는 방식으로 해외사례에서도 점차 비중이 줄고 있다”고 주장했다.이어 “캠프페이지 부실정화 의혹은 최대한 빨리 정화작업을 끝내고자 했던 국방부의 졸속행정과 빨리 인수받아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춘천시의 졸속행정이 빚어낸 참사”라고 지적했다.
▲ 캠프페이지에서 근무하던 미군들이 최소한의 방호복도 없이 고엽제와 제초제 등 유독물질을 묻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댈러스 스넬 제공
캠프페이지 부실정화 의혹을 바라보는 옛 직원들의 시각도 엇갈린다.한 직원은 “캠프페이지가 6·25 전쟁 직후 미 제4유도탄사령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환경오염 논란 뿐만 아니라 부대 내 핵폐기물,방사능 문제 이야기는 과거 유도탄 기지였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말했다.또 다른 직원은 “막사나 사무실 난방을 위해 사용했던 기름탱크를 땅 에 묻어서 사용했다”며 “북미관계가 안 좋아지면서 기름탱크를 숨겨야 했는데 탱크를 땅 속에 묻고 모터로 끌어올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파이프가 손상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시설공병대 안에 환경오염 감독반이 있는데 이들 모두 한국인으로 구성됐다”며 “‘기름 한 방울도 흘리지 말라’고 할 정도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했는데 땅 속이 오염됐다고 하니 의아하다”는 반응도 나왔다.캠프페이지 부지가 춘천시민의 품을 떠난지 반세기.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도 지나온 시간처럼 험난하기만 하다. 오세현·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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