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 황희

 

황희 영정.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황희 영정.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세종이 황희의 집을 찾았다가 청빈하게 사는 모습에 감동해 새집을 하사했다거나, 종의 아이들이 뛰어놀다 황희의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으며 귀여워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야사이기 때문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인자한 노(老)정승’ ‘청백리’ 등이 우리가 황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관직 생활
하지만 황희의 실제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있다. 그가 따듯하고 관대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황희는 친한 사람을 주로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고 (태종 8년 2월 4일 실록기사),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처벌을 완화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 (세종 10년 6월 25일 실록기사)고 한다. 남원 부사로부터 고가의 선물을 받았다가 자수했고, 1427년(세종 9년) 사위 서달의 살인 사건을 무마해달라고 청탁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관청 소유의 둔전을 달라고 조르다 망신을 당했으며 지인의 죄를 낮춰달라고 사사로이 요청한 적도 있었다.
 
자식들도 사고뭉치였다.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의 재물을 훔치다 발각됐는데,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도 공범이었음이 드러났다. 황보신이 처벌받자 형인 황치신은 죄를 지어 몰수되는 동생의 기름진 토지를 자신의 것과 바꿔치기하다가 걸려 파면됐다. 막내아들 황수신은 한 이랑의 밭과 한 사람의 노비까지 차지하려고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세조 13년 5월 21일)고 한다. 자식이 모두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집안을 다스리지 못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 비판을 받았다(문종 2년 2월 8일)는 황희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그의 어두운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황희가 어떻게 청백리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
 
알다시피 황희는 무려 19년이나 영의정으로 재임했고 세종을 보좌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 시대 내내 황희가 재상의 모범으로 여겨져 오다 보니 사람들이 원하는 재상상이 황희라는 인물에게 계속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황희 자신이 영의정이 되면서 크게 탈바꿈하기도 했다. 영의정이 된 후에는 어떠한 추문에도 얽히지 않았으며 깨끗하고 고결한 자세를 보였다.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이처럼 황희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보다 세종이 준 믿음 때문으로 추측된다. 황희는 양녕대군의 폐위에 끝까지 반대해 ‘임금(세종)의 원수’로 규정된 바 있다(세종 즉위년 12월 14일)는 기록이 있다.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인데 오히려 용서하고 중용해준 것이다.
 
황희가 잡음을 일으켰을 때도 세종은 “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만한 재주와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학문을 가지고 있다. 일을 처리하는 책략은 만 가지 사무를 종합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버님이 신임하셨으며 과인 또한 의지하고 신뢰한다” (세종 10년 6월 25일)라며 격려해주었다. 1431년(세종 13년) 9월 3일 황희가 영의정에 임명되자 부정부패한 자를 영상으로 삼을 수 없다며 반대하는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세종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세종의 전폭적 지지 속 영의정 임무 수행 

왕이 이렇게 신뢰하니 황희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믿고 써준 왕에게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이에 황희는 사사로운 욕심을 끊고 온 힘을 다해 영의정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다. 특히 임금과 신하, 신하와 신하 사이의 서로 다른 의견과 갈등을 조율하는 탁월한 조정자로서 깊은 자취를 남겼다. 우리가 기억하는 황희는 바로 이 시기의 황희다.
 
무릇 지울 수 없는 자취는 마지막에 남는 법이다. 황희에게는 분명 과오가 있었다. 하지만 세종의 격려를 받아 그는 달라졌고 결국 빛나는 삶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해서 자신을 바꾸기에는 늦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얼마간이건,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내가 어떻게 기억될지를 결정한다.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원익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역사 속에 수많은 명재상이 있었지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만큼 완벽함에 가까웠던 인물은 드물다.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그는 능력과 인품, 청렴한 삶으로 온 나라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직후 이원익이 한양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민심이 안정됐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올 정도다.
 
이원익이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다. 평안도 관찰사를 맡아 후방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우의정 겸 4도(강원·충청·경상·전라) 도체찰사로서 최전선을 지휘했다. 특히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 평안도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의 선정(善政)에 감사했다고 한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이원익이 사당을 허물도록 하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세웠다.
 
선조가 남부 전선에 있던 그를 다시 평안도로 복귀시키려 하자 신하들이 한사코 만류하기도 했다. “오직 이원익만을 의지하고 있는 민심이 무너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선조 29년 11월 9일의 실록기사, 이하 날짜만 표시). “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이원익 덕분에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선조 27년 6월 24일)는 평가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원익, ‘항상 보이는 지도자’로 백성의 신뢰받아  
이처럼 이원익이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기 때문이다. 그는 방패를 베고 군막에서 잠들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밥을 먹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백성이 고통받는 현장을 지키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진정성을 백성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조 국가에서 임금이 아닌 신하에게 민심의 지지가 쏠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왕의 의심을 사고 심지어 제거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원익이 모신 임금은 하나같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인조는 남달랐는데 “경이 조정에 없으면 단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인조 4년 8월 16일), “과인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 경을 바라본다”(인조 4년 12월 7일), “경이 머물러만 준다면 나라의 광영일 것이다”(인조 9년 4월 4일)라고 말할 정도다.
 
이원익( 李元翼 )의 종가 옆에 있는 충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 문서들. [중앙포토]

이원익( 李元翼 )의 종가 옆에 있는 충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 문서들. [중앙포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원익이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인조 때 그의 나이는 이미 팔십 대였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조정의 최고 원로로서 그저 가만히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나라를 위한 일에 감히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며 자신이 반란을 진압하러 평안도로 가겠다고 자원했다(인조 2년 1월 24일).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4도 도체찰사를 맡아 후방지원을 총괄하고 소현세자의 분조(分朝,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책임졌다(인조 5년 1월 17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원익은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왔다. 한번은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85세의 나이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출사했는데(인조 9년 3월 28일), 이런 모습에 인조가 크게 감동했고 신하들은 “이원익이 어제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요컨대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원해 떠맡는 이원익의 행동이 백성뿐 아니라 동료 신하들, 나아가 임금의 신뢰를 끌어내게 된 것이다. 임금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곧 쓰러져 죽기 직전의 상황이어도 행동에 옮기는 이원익에게 그의 진심을 의심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한 일이었다.
 
더욱이 인조 대에 이원익이 보여준 처신에서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이원익은 인조가 왕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간청하고, 때로는 강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에 나서질 않았다. 인조 초기 잠시 영의정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면 향리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나라에 큰일이 생겨 잠시 조정에 나오더라도 그날로 돌아가 버렸다. 조정 일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자문을 구해도 “노신의 정신이 혼미하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인조 9년 4월 4일).
 
물러나 있다가 위기 닥치면 앞장선 진정한 어른 
이는 그의 정신과 기력이 쇠약해져서거나 조정 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라의 큰 공신이자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최고 원로, 그것도 왕이 깍듯이 모시는 80대 노인이 조정에 나와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해보라.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시시콜콜 잔소리하고 가르쳐 들어보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도 잘하지 못하면서 후배들에게 부담만 줄 뿐이다.
 
뒤로 물러나 있되 위기가 닥치면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준 사람, 입을 다물고 간섭하지 않되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어준 사람, 이원익은 그렇게 진정한 어른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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