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속리산(1,057.7m)

0 위치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경북 상주시 화북면

0 코스 : 시어동~화북분소~문장대~문수봉~신선대~입석대~비로봉~석문갈림길~천왕봉

~석문~상고암~상환암~세심정~법주사

0일자 : 2008. 12. 14(일)

0시간 : 7시간 /맑음


백두대간이 남서진하며 태백산과 소백산, 그리고 죽령과 이화령 사이에 월악산군을 품어내고

이내 방향을 남으로 돌리는 한반도 남쪽 한가운데에 위치한 속리산 천왕봉은

한강,금강,낙동강 즉 3대 강 발원지라 이를 삼파수라 부르며,

안성 칠장산으로 이어가는 한남금북정맥 줄기가 나누어지는 분지점이기도 하다.


한남금북정맥이 대간에서 솔가하는 기점도 천왕봉이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말티고개를 지나 선도산과 보현산을 거쳐

안성의 칠현산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갈래친다.

종착지인 칠장산에서는 다시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으로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태안반도에서 안흥까지의 금북정맥으로 이어진다


속리산은 일반인들에게 산 자체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 대사찰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법주사와 조선조 임금 태종에게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정이품송이 산자락 내에 자리 잡고

있어 더 잘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구병산에서 형제봉을 거쳐 속리산에 이르는 산군은 산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북 알프스’로 통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산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봄철 산벚꽃, 여름에는 청송, 가을의 단풍, 겨울철 설경으로 바꿔가며 사시사철 장관을

이루는 속리산은 우리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속리산의 진수는 역시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도봉산 등과 더불어

산 전체가 바위로 넘쳐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속리산은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예로부터 소금강, 또는 제2금강이라고도 불러왔다.

또, 구봉산, 지명산, 미지산, 형제산, 자하산, 광명산, 이지메 등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법주사가 창건된 지 233년만인 784년(신라 선덕왕 5년)에 진표율사)가 김제 고을의

금산사로부터 이곳에 이르자, 들판에서 밭갈이하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회심이 저리 존엄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하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이 산으로 입산수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속세를 떠난다’는 뜻에서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헌이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속리산의 이름 유래다. 속리산은 그 산이름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산의 여러 봉우리 이름에서도 신앙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이 그러하고, 비로봉, 관음봉등이 그러하다.


속리산에는 8개의 이름(속리산,구봉산,소금강산,광명산,지명산,미지산,형제산,자하산)과

8개의 봉우리(천황봉.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

그리고 8대(문장대.입석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신선대.봉황대.산호대)가 있으며

8석문(내석문.외석문.상고내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상황석문.추래석문)이 있고

물줄기는 속리산 아홉 구비 돌고 돌아 흐르는데 여기에 놓여진 다리가 8개라고 한다.


유난히 8자가 많은 산, 불교에서 열반에 들기 위한 여덟 가지 바른길

즉 8정도를 일컫는데 불교색채가 짙은 그 8자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신랑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에 와서 남긴 시가 유명하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은폭동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양양하게 흐르는 것이 물인데/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 사람들이 때 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태백가든

거리는 어둠으로 가득하고

추위는 밀려온다

시어동

숲이 자신의 속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겨울,

가을을 보낸 숲에 찬바람이 분다.

겨울 숲에서 나무는

그렇게 맨몸으로 겨울을 맞이하는가보다.


그 고운 빛깔 자랑도 못해본 안타까운 단풍잎들이

누런 낙엽이 되어 딱딱한 등로를 수놓았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화북분소

손이 곱아오고 장갑이 그리워진다

멀리 산그리메가 사방으로 좋지만 연무에 흐리게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길

그냥 하늘을 향한다

도중에 만나는 암릉에서

잠시 쉬고

사거리

주능선에 오른다

계곡을 울리는 헬기소리

여름내 버려진 쓰레기 하산작업 중

문장대(1028m)

문장대는 속리산의 얼굴이다.

철 계단을 따라 오르면 문장대.

항상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어 운장대로도 불린다.

훨씬 운치 있는 이름이다.

세조가 몹쓸 병을 고치고 올라 신하들과

삼강오륜을 강론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천황봉까지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묘봉과 관음봉, 도명산과 낙영산이 옅은 구름을 두른 채,

바라보는 신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저 아래 법주사까지 눈에 들어오고

멀리 첩첩이 산그리메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산정을 점점이 수놓은 모습들

하염없이 바라보고 가슴에 담는다

문수봉

파란하늘아래 앙상한 나뭇가지

무엇을 닮긴 닮은것 같은데..

암봉이 아름다운 속리산 주능선

오르락 내리락 산행의 맛 또한 제맛이다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면

손끝은 시렵기까지 하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이미 산정은 겨울이다


신선대

문장대에서부터 신선대는 걸음걸음마다

확연한 원근감을 보여주며

마중이라도 나오듯 가깝게 다가선다


입석대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이 독보대사를 스승 삼아

7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고 일으켜 세웠다는 입석대

제대로 보려면 좁은 바위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무등산, 치악산, 대둔산… 이름난 바위산마다 하늘로 몸을 곧추 세운

거대한 바위기둥들은 모두 입석대란 이름으로 사랑을 받는다.

속리산 입석대도 마찬가지.


비로봉(1,025m)

다가가 쓰다듬고 싶은 기암을 두고

휑하니 지날 수는 없는 일이다.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고

능선을 따라 이름모를 기암이 도처에 늘려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하나 글이 모자라고

멋진 풍광 보여주고자 하나

솜씨가 미천함이 안타깝기만...


석문갈림길

아무리 눈앞의 풍경이 마음을 어지럽히더라도

정신없이 앞사람만 쫓아가다 보면

우거진 조릿대 사이로 휭 하니 뚫린 길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헬기장

산정의 나목들은 이미 겨울을 준비하는가 보다

앙상히 뼈대만 드러내놓고

거세바람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간간히 걸려있는 잎새들 조차도 위태 위태

그렇게 속리산정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천왕봉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천왕봉 역시 우거진 수풀 사이에 핀 바위 꽃이다.

하늘의 왕이란 이름의 바위 꽃송이에서

백두대간 굵은 줄기는 한남금북정맥이란 푸른 가지를 뻗어 내린다.


‘상황봉~묘봉~문장대~천황봉~형제봉~장고개~구병산’ 구간은

통상 ‘충북알프스’로 불린다.


속리산은 제1봉의 지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산이다.

천왕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약 3,8km의 등성마루 전체가,

그 기기묘묘한 암릉 전체가 하나의 봉우리다.


옛사람들도 제1봉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예 천왕봉을 언급하지 않고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안타깝게도 정상 표지석은 천황봉(天皇峯)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

왕(王)을 황(皇)으로 둔갑시킨 일제의 잔재 그대로다.

언제부터 천황봉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분명히 ‘천왕봉(天王峯)’이라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천왕봉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속리산 마루에 대자재천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의 천황을 염두에 두고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석문

지나온 천왕봉도 바라보고

주능선이 암릉과 어울어져 그림같이 펼쳐진다

암봉에 피어오른 소나무 한그루

한폭의 동양화다


상고암

세심정으로 내려가는 하산로에서 갈라지는 상고암 가는 길

조릿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오솔길을 따라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너른 터가 열린다.


상고암은 법주사보다 먼저 속리산에 둥지를 튼 절이다.

상고암 대웅전 뒤로 걸어 올라가면

문장대부터 천왕봉까지 병풍처럼 펼쳐진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는데.


상환암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


계곡도 가뭄에 물이 마르고 나무들은 앙상하지만

겨울을 느끼게 하는 바람으로

계곡을 벗어난다


세심정

세속을 떠난 산에서 마음을 씻는 정자(터)란 뜻으로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

속세의 복잡하고 힘든 문제들은 저산 밖에 내려놓고

이곳에서는 내 앞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을 즐기라는 뜻일게다.

지금은 개인이 이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목욕소

조선조 7대왕 세조가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인근 법주사에서 대법회를 연후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약사여래의 명을 받고 온 월광태자라는 미소년이 나타나

세조의 피부병이 곧 완쾌 될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보니 신기하게도 몸의 종기가 깨끗이 없어 졌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

8세기 초엽 신라 성덕왕 때 중창하였다.

지행록에 의하면, 이때 왕이 법주사라는 절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법주사의 중창 시기에 있어서 흔히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진표율사 사적기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결과에서 초래한 잘못이다.

766년~770년 시기에 진표율사가 속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갈 때 속리산에서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길상사 창립지지로서 표시해 둔 곳에 제자인 영심이 776년에 길상사를 창건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라는 이름은 의신대사가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

또는 그 나귀들이 이곳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의신대사가 새로 세울 절터를 찾기 위해 보은 땅으로 들어서서

오늘의 말티고개를 넘어 속리산으로 들어섰는데,

그때 대사는 눈앞에 펼쳐진 기막힌 전경에 감탄하여 자신도 모르게 합장 배례했다고 한다.


법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인조 때 벽암스님이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의

재건·중수·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법주사의 상징과 같은 거대한 청동미륵대불은 본래 진표의 제자 영심이 중창할 당시

용화보전 자리에 세웠던 150m 높이의 거대한 입상이었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 주조를 위해 파괴했다고 한다.


1989년에 조성한 현재의 미륵불은 높이 25m, 둘레 17m의 거대한 규모로 표면에

입힌 순금만 해도 80kg이나 들었다고 한다.


주차장

짧은 겨울해가 어느새 찬바람을 부른다.

부채 살 같은 햇살이 앙상한 가지사이를 비추고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을 뒤돌아보며

속리산과 안녕을 고한다


* 속리산 문헌 고찰

8봉(峰), 8대(臺), 8대문(大門)과 여덟의 이명 가진 명산

최고봉 천왕봉(天王峰)은 일제가 천황봉(天皇峰)으로 표기 왜곡


속리산(俗離山·1057.7m)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 사이에 뻗어 있는,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큰 산이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우리나라 12종산(宗山)의 하나로도 일컬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산이다.

산세가 웅대하고 수려하여 옛 선인들은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옥(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고,

또는 처음 피는 연꽃 같기도 하고, 멀리서 횃불을 벌리어 놓은 것 같다고도 하면서

이 산을 소금강산(小金剛山),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으로 일컬어 왔으며,

그 승경을 조선8경의 하나로 일컫기도 하였다.

다음과 같은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속리산기(俗離山記)’에 의하면,

그러한 속리산의 개략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속리산 : 보은현 동쪽 44리에 있다. 곧 태백산의 남쪽 줄기다. 북쪽으로 조령(새재)과 이어지고,

또 이 산에서 두 산줄기로 나뉘면서 한 줄기는 꺾어지면서 북쪽으로 뻗어가 한강 이남,

금강 이북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다른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장수의 덕유산이 되고, 또 남원의 지리산이 된다.

이 산은 삼도(三道)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 신라 때에는 속리악이라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세가 웅대하고 꼭대기는 모두 돌 봉우리로서 하늘에 나란히 솟아 있어

바라보면 마치 옥으로 빚은 연꽃과 같기에, 세속에서는 소금강산이라 부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돌이 쌓여 있는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위에 돌웅덩이가 형성되어 있는데, 마치 가마솥 같다. 비가 내리면 그 속에 물이 샘처럼 고여 있다.

산 남쪽 정상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매우 높고 험준하며,

문장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보은조>

속리산의 주능선 상에서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봉인 천왕봉과 문장대 구간은

우리나라 백두대간 산줄기 상의 한 구간으로,

북쪽 문장대에서는 동북쪽 청화산(靑華山·984m) 방면으로 대간 줄기가 뻗어가고,

남쪽 천왕봉에서는 동남쪽 형제봉(832m) 방면으로 대간 줄기가 뻗어가고 있다.

이 구간은 대체로 형제봉 동쪽 갈령(葛嶺·443m)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문장대까지 가는 백두대간 산행의 주요 코스로, 속리산을 남북으로 종주하면서

수려한 산세를 감상한 후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대가람 법주사 방면으로 하산하여

문화유적지까지도 둘러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백두대간 중의 한 구간이다.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속리산의 경관이 비록 금강산에 뒤지기는 하나,

다음과 같은 여러 명산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는 훌륭한 명산이라 평하고 있다.

‘청량산과 같은 빼어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그 산세를 널리 깔고 있고,

덕유산과 같은 깊음이 있으면서도 기이함은 덕유산보다 넘치고,

지리산에 비교해도 피차 장단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걸출한 사찰과 아슬아슬한 건축물에 인간의 힘을 능가한 신의 조화가 있음에 이르러서는

가야산 해인사와 그 우열을 논할 만하다.’

<지행록(地行錄) 속리산기>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산

속리산은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전국의 명산대천신(名山大川神)에게

제사를 올릴 때 중사를 지내던 주요 명산의 하나로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속리악이라 불리어 왔다.

또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와 한국금석전문등에 수록한,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세운 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俗離山法住寺 慈淨國尊碑銘)과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등의 조선시대 주요지리지 보은조 및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등의 속리산 관련 기록에 의하면,

속리산은 고대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일관되게 속리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속리산의 산이름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국어학적 관점에서 더러 ‘속리’를 음역된 산이름으로 보고,

‘꼭대기’를 뜻하는 우리의 옛말 ‘수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시절부터 불리어 오는 수많은 산이름 중 왜 속리산만 ‘속리(←수리)’라 일컬어지고

고유 이름이 없는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 막연하여 수용하기 어렵다.


우리 선인들은 상고시절부터 산이든, 물이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고유의 이름을 명명하여 왔다.

우리나라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져 온 속리산을 어찌 ‘~수리(~꼭대기)’가 아닌,

보통명사로 그저 ‘수리(꼭대기)’라고만 막연히 지칭하여 왔겠는가?

‘俗離山’이란 산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속세를 여읜[離] 산,

또는 속세를 떠나 있는 산의 의미로 새긴다.

그러나 한문 문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의미의 산이름은 ‘이속산(離俗山)’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속리산이란 산이름의 의미는 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나 있다는,

곧 세속인들이 세사(世事)에 얽매여 자연을 멀리하고 있음을 경각시켜 주는 듯한 의미의 산이름이다.

다음과 같은 고인의 시(詩)에서 그러한 산이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한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있지 아니한데, 세속 사람들이 산(자연)을 떠나있네(山非離俗俗離山).’

위의 시는 고운 최치원(崔致遠·857-?)의 시라고 하지만, 실은 백호 임제(林悌·1549-1587)의 시다.

아무튼, 속리산이란 산이름이 꼭 위의 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위의 시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의미는, 후대인이 속리산에 와서 세속에 때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산을 둘러보면서 ‘俗離山’이란 산이름에서 느껴지는 시상(詩想)을 통하여

도를 멀리하고 자연을 멀리하고 있는 세속인들을 경각시켜 주고 있는 듯한 의미로 읊어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속리산의 산이름 의미는 곧 세속에서 떠나 있는 산, 때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있는 순수한 산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 속리산의 산이름과 봉이름

▲ 화양구곡의 학소대.

속리산은 여덟 팔(八) 자와 관련한 많은 승경을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첫째로, 속리산은 그 이름이 여덟 개다. 곧 예로부터 불려온 속리산과 구봉산(九峰山)·소금강산·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이지산(離持山)·형제산(兄弟山)·자하산(紫霞山)의 8개 산이름이 전한다.


둘째로 속리산은 그 주요 봉우리가 여덟 개다. 최고봉인 천왕봉(→천황봉)에서

그 산릉이 활처럼 휘어지면서 비로봉·길상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묘봉·수정봉의 8개 봉우리가 있다.

속리산의 8봉설은 다분히 인위적으로 맞춘 숫자로 보인다.

곧 앞의 첫째 항에서도 속리산의 별칭으로서 구봉산의 이름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의하면, ‘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일찍이 조선 전기에 이미 속리산의 구봉설이 전래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셋째로 속리산은 그 이름난 대가 여덟 개다. 곧 문장대·입석대·경업대·배석대·학소대·

신선대·봉황대·산호대가 그것이다.


넷째로 속리산은 바위 대문(石門)이 여덟 개다.

곧 내석문·외석문·상고내석문·상고외석문·비로석문·금강석문·상환석문·추래석문)이 그것이다.


다섯째로 속리산은 그 아래쪽에 물줄기가 아홉 구비로 돌고 돌면서 꺾어지는데,

그 한 구비마다 다리가 있어 도합 8개의 다리가 있었다.

속리산은 이렇듯 여덟 팔 자와 관련한 많은 승경을 지닌 산으로서,

또한 조선8경의 하나로도 일컬어진 훌륭한 팔자를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상봉의 본래 이름은 천황봉(天皇峯)이 아닌 천왕봉(天王峯)이다.

현재 속리산의 최정상 자리에 속리산번영회가 1994년에 세운 돌비에도

‘天皇峯’이라 써놓고 있으나, 이는 일제시대에 왜곡시켜 놓은 왜색 산봉이름이다.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보은군속리산사실(報恩群俗離山事實),

성해응의 동국명산기,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지지 등의 속리산기에 의하면,

속리산의 현 천황봉은 본래가 천왕봉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의하면, 이곳 천왕봉 정상에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속칭 천왕사, 일명 속리산사(俗離山祠)가 있었는데, 천왕봉의 봉이름과도 연관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신(神)은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아다가 제사지내는데, 그곳에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천왕봉이 천황봉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은 한일합방 직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지리를 상세히 조사하면서 제작한

‘근세한국 오만분지 일 지형도’에 속리산의 상봉을 ‘天皇峯’으로 표기한 이후부터의 일이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산이름, 봉이름 등을 접하면서 일본 천황을 인식하게 하려고 한

저의가 깔려있는 의도적 개칭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이름 중 고유의 산이름·봉이름을

천황산·천황봉으로 개칭하여 표기한 것이 상당수가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울산시 상북면과 밀양시 단장면?산내면 경계에 위치한 천황산(1,189m·원래 재약산)

②함양군 병곡면?서하면 경계에 위치한 괘관산의 상봉인 천황봉(1,288m·원래 천왕봉).

③남원시 보절면과 산동면 경계에 위치하는 천황산. 일명 천황봉(910m·원래 만행산. 속칭 보현산).

④진안군 주천면 구봉산(995m)의 상봉 천황봉(원래 천왕봉).

⑤전남 영암군?강진군 사이에 위치한 월출산의 상봉 천황봉(809m·원래 천성봉).


세 강의 발원지 문장대

문장대(1,054m)는 천왕봉 북쪽에 위치하면서 천왕봉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속리산의 걸출한 봉우리다.

오늘날처럼 산의 고도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던 시절의 옛 사람들은

대개 문장대를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문장대는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였다.

글자 그대로 구름 속에 웅장한 대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는 봉우리다.

문장대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 초기에 세조가 피부병 치료 차 속리산에 들어와

요양하던 시기의 행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그 당시 꿈속에 월광태자(月光太子)라 하는 귀공자가 나타나

왕에게 동쪽으로 시오 리(里)를 오르면 영험한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 기도를 드리면 소원성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이튿날 조신들과 더불어 향(香)과 축(祝)을 싸들고 산꼭대기를 헤메어

이윽고 한 영롱한 멧부리에 올랐더니, 널따란 바위봉우리 위에 삼강오륜을 설파한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세조는 꿈속의 계시에 새삼 탄복하며 엎드려 기도한 후 책장을 넘기면서 신하들과 강론하였다.

이로부터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세조의 속리산 행적에 부회되어 생겨난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고려 문신 박효수(朴孝修·?-1377)의 우제속리사시(偶題俗離寺詩)에

‘문장대 위엔 천고의 이끼 덮이어 있고(文藏臺封千古蘚)’라고 한 시구를 보더라도

이미 고려시대에도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지리지에서는 모두 문장대를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금강,

북쪽의 달천으로 흘러가는 세칭 삼파수(三派水)의 발원지로 언급하고 있다. 곧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대 위에는 구덩이가 가마솥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 계속 전하여 온 세 강의 발원설이다.

속리산을 답산하면서 이를 정밀하게 살펴본 이만부는 문장대 정상의 발원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여기 와서 증험하여 보니 이 세 강은 본시 그 근원을 이 산에 두고 있기는 하나,

그것이 문장대 정상에서 발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장대 위에 있는 바위의 등에 Y자 모양의 흠 자욱이 있고 이것이 동쪽?남쪽?북쪽의

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데, 이로 인한 기록의 잘못일 것이다.’

<지행록 속리산기>

현재도 문장대 정상에 오르면 삼파수의 발원처가 되는 가마솥 만한 물웅덩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빈 웅덩이만 패인 채 두세 군데 있을 뿐이고,

이만부 선생이 이곳을 답산할 때처럼 Y자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웅덩이의 모습도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많이 변화되었는지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장대를 삼파수의 발원처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문장대를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하였던 옛날의 일이다.

현재는 천황봉(천왕봉)이 확실한 속리산의 최고봉이라 하여

그 정상에 세운 천황봉 석비 뒷면에 천황봉을 삼파수의 발원지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업대와 수정봉

문장대에서 속리산 정상의 천왕봉을 향하여 주능선을 따라가면 신선대 삼거리가 나오고,

천왕봉쪽으로 조금 더 가면 입석대가 나온다.

또 신선대 삼거리에서 서남쪽 금강골로 한 20분 정도 내려가면 경업대가 나온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경업대는 곧 조선의 영웅적 무장이었던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의 무예 수련장이었다.

독보대사(獨步大師)에게 무예를 사사 받으면서 이곳에서 불철주야하고 7년을 수도한 끝에

그의 힘을 시험해 보기위해 누워있던 집채만한 바윗덩이를 일으켜 세워 놓았다는 것이

바로 해발 약 1,000m 되는 산정에 곧추 서 있는 입석대다.


경업대 일대의 하산길에서 외돌면서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창건하였다는 관음암(觀音庵)을 향하면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거대한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진 듯 서있는 석문을 지나가게 된다.

이것이 금강석문(金剛石門)이다.


이 석문을 지나면 속칭 ‘임경업토굴’로 일컫기도 하는 바위동굴이 있다.

그 동굴 속에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신기한 샘물이 고여 있다.

임경업 장군이 마시던 샘물이라 하여 세칭 장군수(將軍水)라 불린다.

샘이 깊어 배를 깔고 엎드려 팔을 뻗어 한 바가지 떠서 먹어보면 매우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과연 소문대로 불로장생의 약수로구나 하는 짜릿한 느낌이 가슴속에 전해온다.


법주사 서쪽에는 청동미륵대불의 배경을 이루면서 속리산의 주봉들로부터 외떨어져 있는 한 봉우리가 있으니,

곧 수정봉(水晶峯?566m)이다.

이 봉우리는 속리산 주능선 상에 이어져 있는 연봉들을 한꺼번에 감상해 볼 수 있는 속리산 최고의 전망대다.


법주사

법주사는 속리산 기슭,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위치한 대찰이다.

일주문 현판에 씌여 있는 그대로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이다. 경내에는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받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 팔상전(捌相殿)과 석련지(石蓮池), 쌍사자석등 등이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의 2층 불전 건물 대웅전과 그 내부의 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매우 웅장한 규모의 건물과 불상이다.

팔상전 서쪽에는 1989년에 완성한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과 지하석실 법당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금동미륵장륙존상을 봉안하고 있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일명 산호전(珊瑚殿)이 있었던 자리다.

조선 고종 10년(1873년)에 편찬된 법주사 사적에 의하면, 법주사 경내에는 60여 동 건물이,

산내에는 70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그 암자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 해도 58개 암자에 이른다.

법주사는 그 전성기 때 한 산중에 이처럼 많은 암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이들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속리산은 진실로 하나의 거대한 불국토를 이루고 있던 불교 명산 중의 하나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절이다.

초창시에 의신이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서 이곳에 와 머물렀기 때문에

법주사라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의신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절을 창건하였으므로

인도의 불법이 와서 머물고 있는 절이란 의미로 법주사로 일컫게 되었다고도 한다.


8세기 초엽 신라 성덕왕 때 중창하였다. 지행록에 의하면, 이때 왕이 법주사라는 절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8세기 말엽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인 대덕(大德) 영심(永深)이 경내 길상초(吉祥草)가 나는 곳에

스승이 절 지을 자리를 표하여 둔 곳에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였다.

속리산 경내에 창건된 길상사와 진표율사의 사상적 영향으로 인해 이후 그 본부사찰인 법주사는

모악산 금산사, 팔공산 동화사와 함께 법상종(法相宗)의 중심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법주사의 중창 시기에 있어서 흔히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진표율사사적기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결과에서 초래한 잘못이다.

766년~770년 시기에 진표율사가 속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갈 때 속리산에서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길상사 창립지지로서 표시해 둔 곳에 제자인 영심이 776년에 길상사를 창건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부의 속리산기에 의하면,

‘상고암(上古庵, 上庫庵)에 오르면 북쪽으로 상암(上庵)이 바라보이는데,

본래의 길상암(吉相庵)이다’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심 대덕이 창건한 길상사는 비로봉 기슭에 있었던 절로, 현 법주사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법주사는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왕자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크게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소된 것을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표는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했는데, 당시의 행적이

고려 신종 때 사람인 영잠대사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온다.

진표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달구지를 끌던 소가 율사의 앞에 이르자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었다.

달구지 주인이 도대체 이게 무슨 곡절인가 하고 놀라 달구지에서 내려 율사에게 물었다.


“스님은 누구십니까. 어디서 오신 분이신데 이 소가 갑자기 스님을 보고 우는 겁니까.”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입니다. 지금 새 절을 짓기 위해 속리산으로 가는 길인데,

이 소가 비록 겉으로는 어리석은 짐승에 불과하지만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수기를 받은 불법의 인연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므로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달구지 주인이 무릎을 철썩 치며 감탄했다.

“아하! 짐승도 이토록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저는 사람으로서 어찌 불법에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불연을 얻었으니 곧 마음의 때를 씻고 죄악의 뿌리를 끊겠습니다.”

그는 낫을 들어 제 머리를 깎으려 했다. 이를 본 율사는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몸소 머리를 깎아주고

수계법을 일러준 뒤 득도시켜 함께 속리산으로 갔다.

그들은 속리산 들머리에 이르러 길상초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길상사라고 하였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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