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
0 위치 : 평창군 진부면
0 일시 : 2009. 7.25(토)
천년역사의 자취를 찾아서 떠난 아름다운 숲기행
- 오대산 적멸보궁을 다녀왔다.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금강산과 설악산을 일으키고
이어 세운 영산(靈山)이 오대산(五臺山)이다.
금강산과 설악산은 충천하는 불길모습을 하고 있어
기암, 괴석이 많기 때문에 이를 감상하는 흥취가 있는 반면
오대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어머니의 품속과 같이 푸근하다
오대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본사인 월정사,상원사
그리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에서도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정골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이 있다.
오대산은 다섯 봉우리를 방위에 따라 붙인 이름으로,
동쪽의 동대 관음암 관세음보살, 서대 염불암 아미타불, 남대 지장암 지장보살,
북대 미륵암 석가모니불, 중대 문수보살 모시는 보살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월정사는 하산하면서 보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10km나 되는 상원사까지의 숲길을 천천히 달렸다.
포장을 거부한 상원사 숲길은 아주 쾌적한 찻길이었고,
옆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의 화음은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악단의 협주곡과도 같았다.
관대걸이 /세조와 문수보살
"중전, 방금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모친 · 세조의 형수) 혼백이 나타나 내 몸에 침을 뱉지 않겠소"
이튿날 아침. 이게 웬일인가.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다니...
세조는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었다.
명의와 신약이 모두 효험이 없었다. 임금은 중전에게 말했다.
『백약이 무효이니 내 아무래도 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가 기도처로는 적합할 듯 하옵니다."
왕은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정산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장엄한 산세와
맑은 계곡물 등 절경에 취한 세조는 불현듯 산간벽수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는
그날도 주위를 물린 채 혼자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즐겼다.
그때였다.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마한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다.
『이리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으련?』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일렀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대왕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이렇게 응수한 동자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됐다.
왕은 크게 감격했다.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했다.
기억력을 더듬어 몇 번의 교정을 거친 끝에 실제와 비슷한 동자상이 완성되자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화상(畵像)은 없고,
얼마 전 다량의 국보가 쏟아져 나온 목각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또 세조가 문수동자상을 친견했던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갈라지는 큰 길목 10km 지점은
임금이 그곳 나무에 의관 을 걸었다 하여 「갓걸이」또는 「관대걸이」라고 부른다.
상원사
관대거리 지나 상원사 오르는 길목에서는 금방이라도 벌거벗은 세조의 등을 씻어 주면서
건네던 문수동자의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러나 숲 속에는 문수보살 대신 노루오줌이 가득 피어나고 있을 뿐이다.
한암 스님과 상원사
상원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스님을 비롯해
수월 운봉 동산 등 역대 선지식(善知識)들이 주석하며 수행했던 유서깊은 곳.
이들 선지식 중에서도 27년간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은 채
‘오대산 도인’으로 통했던 한암(1876-1951)스님은 상원사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선승이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한암(漢岩)은 호요, 이름은 중원이고, 온양이 본관이다.
천성이 영특하여 총기가 빼어나 한 번 의심이 나면 풀릴 때까지 캐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금강산에 유람갔다가 발심해 장안사 행름 노사를 은사로 출가한 한암 스님이
상원사에 든 것은 50세 때인 1925년. 당시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었던 스님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오대산을 찾았다.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상원사 산 중턱의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 나무가 되었으며
지금도 그 단풍나무가 서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된 것도 그 즈음이다.
일제시대 일본 조동종 사토오가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와 법거량을 한 끝에
“한암 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라며 떠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 일이 있은 뒤 상원사에는 한암 스님을 만나려는 일본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6ㆍ25전쟁 중에는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는 이유로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하자 법당에 앉아
“법당을 지키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라.”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국군이 어쩔 수 없이 법당 문짝만 뜯어내 불지르고 떠나는 바람에
상원사가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한암 스님은 이곳에서 보문 난암 탄허 스님 등 한국불교의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키워내다가
6ㆍ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좌탈입망(앉은 자세로 입적)했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신묘년 음력 2월 14일 -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 이 다함을 알고
물 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사진 앞에 있는 경상(經床)은 김현기 거사가 가져다 놓았으며
벽에 쳐져 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로 두른 것이다.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
이 종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종으로 에밀레종(선덕대왕 신종)과 함께 단 2개가 남은 신라종이다.
국보 제36호.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세조는 전국에서 제일 좋은 종을 상원사로 옮기려고 했는데, 안동부의 종이 뽑혔다.
이 종은 ‘소리가 우렁차고 맑아 멀리 백리까지 들린다’고 하였고,
안동의 어느 절에 있던 것을 안동부 남문루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구실을 했다.
이 종을 수레를 이용해 옮기는데, 종이 죽령을 넘으려고 고개의 정상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수레가 움직이지 않았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허사였다.
이 때 한 관원이 ‘이 종이 옛 고장을 떠나기 서러워서인가?’하는 생각에
종의 윗부분 유곽 안에 있는 연꽃 모양의 유두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보내자 수레가 움직였다고 한다.
실제로 잘 관찰해보면 36개의 유두 가운데 한 개를 떼어낸 자국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상원사 동종의 유래는 고향을 떠나는 서러움,
이별의 아픔을 나타내는데 종종 이용되고 있다.
참고로, 종의 유두는 한국 종에만 있는 특징인데,
종의 상단부에 마치 젖꼭지 모양으로 여러개 돋아 있는 돌기로서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만든다고 한다.
공학적으로는, 진동체에 특정 위치에 질량을 부과하여
진동체의 고유진동수를 조절하는 것이다
전문용어로는 "튜닝(Tunning)이라 한다.
영산전
영산전은 선원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1946년 화재가 났을 때 유일하게 불길을 모면한 덕분에 오대산 안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 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산전이라 한다.
조선 세조가 희사한 39함(函)의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이 장경은 본래 다섯 질을 인행(印行)하여 삼보사찰과 설악산 오세암
그리고 상원사에 봉안한 것이데, 오세암의 장경은 소실되었고
통보사, 해인사, 송광사의 삼보사찰과 이 곳에만 보존되어 있다.
5층석탑
석탑은 본래 지금의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계곡에 있던 폐탑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도 하고 영산전 옆에서 출토됐다고도 전한다.
단층 기단 위에 세운 5층석탑으로 추정되나 화강암석재가 많이 없어져 자세히 알 수 없다.
1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은 20엽(葉)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고
갑석에도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삼존불을 비롯한 불보살을 가득 새겨 매우 호화로우며
옥개석은 1층만 남아 있는데 거의 파손되었고 층급은 나타내지 않았다.
조성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학계에서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양이석상
문수전 앞 두마리의 고양이가 나란히 선 석조상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양이가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는 자신의 옷소매를 물고 늘어진 것을 수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 좌대 밑에 칼을 품고 숨은 자객을 찾아냈다고 한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의 고양이를 잘 보살피라는 뜻으로 묘전(猫田)을 하사해
상원사는 사방 80리의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세조의 원찰이 되었던 상원사는 안타깝게도 1946년 선원 뒤의 조실(祖室)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지금의 문수전과 청량선원 등
대부분의 전각은 모두 그 이후 복원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우통수(于筒水)
1987년 국립지리원에서 위성사진 판독을 비롯한 재실측 결과에 따라
태백의 ‘검룡소’ 에 자리를 내줬지만 "우통수"는 오대산 능선 해발 1,200m의 높은 곳에서
발원되어 오랜 역사 동안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졌던 샘이다.
이 샘을 두고 양촌 권근(1352~1409)이 ‘오대산서대수정암중창기’에 쓰기를
"…서대 밑에서 샘이 솟아나서, 빛깔과 맛이 보통 우물물보다 낫고
물의 무게 또한 무거운데 우통수라고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가다 한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가 중령(中령)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으므로 한강이라 이름 짓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통수의 근원에 수정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옛날 신라 때 두 왕자가 이곳에 은둔하여
선을 닦아 도를 깨쳤기에, 지금도 중으로서 증과(證果)를 닦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거처하기를 즐겁게 여긴다.…"라고 했다.
또한 우통수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나라 안에서 차를 달이는 물로는 으뜸이라고 소문나기도 했다.
호를 성소(惺所)라고 쓰던 조선 중기의 허균(1569~1618)이 남긴 ‘화사영시(和思潁詩)’중
‘소회를 쓰면서 소자정에게 답한 운을 쓰다(書懷 用答邵資政韻)’의 끝 부분에
봄날이 끝나갈 무렵 차를 끓여 갈증을 달래고 싶지만 어찌하면
우통수의 물을 얻어 올 수 있을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기에 덧붙여 “우통은 오대산 상원사 곁에 있는데,
한강의 상류이며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샘이다
(于筒在五臺山上院寺側 是漢江上流 爲東國第一泉)”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곧 그 샘물이라야 차를 제대로 끓일 수 있는데
그것을 구하지 못하는 귀양살이의 답답한 현실을 빗대어 읊은 것이지 싶다.
이곳은 漢水(한수)의 발원지로 물빛과 맛이 특이하고 물의 무게 또한 무거워 우통수라 불리며
속리산 삼파수와 충주 달천과 함께 조선삼대명수로 전하여 지고 있다.
오대신앙을 정착시킨 신라의 보천태자가 수정암에서 수도 할 때에
물을 매일 길어다가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중대 사자암
상원사 경내를 둘러보고 상원사 옆 적멸보궁 가는 표지판을 따라 계단길을 올랐다.
경사가 심한 길이지만 시원한 산바람이 불고 계곡의 시원스런 물소리에
더위를 잊고 중대 사자암에 도착했다.
중대 사자암이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중대 풍로산(風爐山, 혹은 지로산)은
비로자나불을 상수로 1만의 문수보살께서 상주하시는 곳이라 했다.
또 그 남쪽 아래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사)에는
새벽마다 문수대성이 36가지의 모습으로 화하여 나타난다고도 했다.
중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적멸보궁은 여러번 왔었지만 중대가 이렇게 변해 있을줄은 몰랐다.
중대는 원래 조그만 암자로 내려다 보는 풍광이 너무나 수려한 곳이었다.
비로전 오르는 층계의 월대에 두 마리 사자가 법륜을 끌고 있는 형상이 있고.
모든 사찰 법당의 불단은 사자가 받치고 있다.
1999년부터 8년간 중대증축공사로 건립된 비로전은
법당과 요사채를 함께 갖춘 계단식 5층 건물로 연건평 500평 규모로
지금은 공양간,요사채,기도처,교육장,템플스테이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편액에 비로전이라고 씌어있는 사자암은 태종임금 때인
1400년 경왕가의 도움을 받아 적멸보궁을 지키는 암자로 세워졌다고 하며,
세조12년(1466) 상원사 낙성 때 세조가 보궁에 올라 예배하고 공양과 보시를 하였다고
세조실록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후 왕실의 내원당으로, 명종 때에는 대비의 보호아래 잡역을 면제받았고,
왕실의 보조로 사세를 유지해왔으며, 고종15년(1878) 개건되어
요사체로 사용되던 향각이 낡고 헐어 중수를 거듭하였다.
2006년에 완공된 중대 비로전 안에는 300년된 은행나무에 28개월간 정성으로
연화장세계를 조성하였고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고 점안하였다.
법당에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주불을 중심으로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푸른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좌우 협시보살로 모셔져있는데 문수보살이 탄 사자가 초록색인 점이 신기했다.
이곳이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임을 상징하여 온 법당 벽면가득히
5백의 문수보살과, 5백의 문수동자를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후불탱화로 1000 문수보살 연화장세계 목탱화는 그 장대한 작품에
잠시 멍한 놀라움에 빠졌다.
한암스님이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상원사 산 중턱의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 나무가 되었으며 몇해전 까지도 그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하지만 사자암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옮겨심는바람에 고사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 오대광명이 가득한 중대 사자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다른 생명을 아끼고 함께 살아갑시다.
남의 것 욕심내지 말고 자기 살림을 아낍시다.
맑은 몸과 정신으로 바른 행동을 합시다.
남을 존중하고 말씀을 아낍시다.
밝은 생활을 하며 좋지 못한 짓을 하지 맙시다.
◆ 오대광명 표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몸이 맑아집니다.
생각이 밝아집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소원이 이뤄집니다.
적멸보궁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흘러 내린 산맥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 중앙에 우뚝 서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곳을 일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꼽는다.
부처님이 계신 적멸의 도량 적멸보궁,
그러나 적멸보궁은 ‘보배궁전’ 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촐한 모습으로 중생을 맞는다.
보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은 없고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다.
그러면 오대산 보궁 어디에 사리를 모셔 놓은 것일까.
하지만 불사리가 어느 곳에 모셔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보궁 뒤에는 약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소담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불탑도 하나의 상징일 뿐
과연 어느 곳이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믿음만이 천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유사오대산 5만 진신조(五臺山 五萬 眞身條)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석가의 불두골, 금점가사와 바릿대를 주면서
우리나라 명주경계에 있는 오대산에 안치하도록 당부했다 한다.
서기 645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석가의 신보(神寶)인
정골사리등을 안치한 오대산 적멸보궁은 비로봉의 귀한 큰 기운이 마무리되는 곳에
여인의 두 다리사이 모습을 한 겸혈장(鉗穴場)에 자리해 있는데
영월에 있는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과 같이 사리무덤을 조성했다.
위 두 보궁을 무덤으로 조성한 것은 이 두곳이 지하에 혈장이 맺어지는
천하대음택명당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대산 불사리 무덤자리에 대한 풍수지리학적 고증을 시도해 보겠다.
내청룡과 내백호는 긴밀하고 아름답게 돌아주었고
그 외곽은 비로, 상왕, 호령, 동대, 계방, 백적, 발왕 등 여러 명산들이
연꽃잎처럼 둘러서 있는 중심에 해당하는 화심(花心)에 위치해있고
어떤 거센 바람도 이곳에 모인 길기(吉氣)를 흐트릴 수 없는
완벽한 장풍국(藏風局)으로 맺어진 큰 길지이다.
또한 보궁 앞에서 두 가닥으로 갈라진 혈순은 길게 상원사 일대까지 뻗어 나갔고
내수구(內水口)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밀하며
외수구(外水口)는 2개의 삼각봉이 완벽하게 감싸주어 진기(眞氣) 누설을 막아주고 있다.
이 오대산의 불사리 안치장소는 특별한 표지가 없어 비석 뒤바위 밑이라는 설과
적멸보궁전각 안에 있는 불단밑이라는 설 등으로 의견이 엇갈려 왔다.
불단 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오랜 세월로 낡아진 불단보수를 위해
탁자제거를 시도할 때마다 불력(佛力)에 의한 뇌성벽력으로
보수가 불가능했었다는 사실을 증거로 들어 이곳에 불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말한다.
자장율사는 도굴을 막기 위해 사리안치 처를 명확히 해놓지 않은 것 같다.
이 사리안치 처는 산맥의 흐름법칙과 혈장이 맺어지는 원리에 정통한
풍수지리학의 대가가 아니고는 예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적멸보궁에서 비로봉까지는 1.5km,그리고 상원사까지가 1.5km이니 이곳이 꼭 중간지점이다.
물소리, 새소리가 어우러져 과연 심산유곡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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