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0 위치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485

0 면적 : 5,179ha

0 코스 : 대형2주차장트램출발트램종점암석원호랑이숲국화전시장대형2주차장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우리나라 핵심 생태축인 백두대간의 자생식물과

고산식물을 수집전시 및 연구하고자 조성되었습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보전 가치가 높은 식물자원과

전시원, 백두대간의 상징 동물인 백두산호랑이,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목원입니다.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은 과거 한반도에 서식하던 호랑이가 서식하던

숲의 원형을 재현하고, 시베리아 호랑이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중우호사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시베리아 호랑이 두마리를 이전하였고,

현재 3마리를 전시하고 있어 수목원의 주요 관광포인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자 페스티벌926일부터 1013일까지

개최하고 있습니다. 봉화 지역 자생식물을 활용한 축제라 하여 '봉자 페스티벌'

이름 짓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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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손이 마비된 서예가는 어떻게 이름을 남겼을까

서예가 검여 유희강의 법고창신

 

/황정수

 

 

조선후기 예원에 독보적인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있었다면,

근현대 서단에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이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두 사람은 120년 이상의 세대 차이가 있으나 미술을 대하는 마음은

평행을 이룰 만큼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에게 가장 공통되는 일면은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

곧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실제 서예가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점이 많았다.

그는 옛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예술 세계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대 서예가들 중 일부는 옛 것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다른 일군의 서예가는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인격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비해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창조적인 정신을 가졌고, 인생살이에서도 큰 흠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유희강의 존재는 한국 서예사의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유희강의 극적인 삶의 역정

▲ 검여 유희강. 1976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인천 출신 유희강은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명륜전문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에 들어가 1937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방문화학원'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한편

중국어를 공부하고 서예와 금석학을 연구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한커우(漢口)에서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난창(南昌), 상하이(上海)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때 같은 지역에서 서양화가 임군홍(林群鴻)도 광고회사를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유희강은 중국에 있으며 상하이에 자주 머물렀는데,

이는 상해 임시정부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1945년 경 해방 즈음이 되어서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주호지대장의 비서로 일하였다.

해방이 되고 임정 요원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앞장서 주도적으로 일했다.

 

이를 보면 유희강은 당시 미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관여한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1946년 귀국한 유희강은 인천시립박물관장과 인천시립도서관장 등을 역임하고,

여러 학교에서 글씨를 가르친다.

 

1962년부터는 서울 관훈동 '통문관(通文館)' 건너편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열어

서예 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썼다. 현재의 통문관 건물의 제자(題字)도

통문관 주인과 가까이 지내던 유희강이 1967년에 쓴 것이다.

통문관 이름을 쓴 이듬해 1968년, 유희강은 친구인 화가 배렴(裵濂)의 만장을 쓰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이 일어나 오른쪽 반신 마비가 되어 서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애주벽(愛酒癖)이 초래한 불상사였다.

 

서예가에게 글씨 쓰는 손 마비는 예술가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유희강은 불굴의 의지로 남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계속해

십 개월 만에 오른손 못지않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서예는 필획의 움직임에 따라 글씨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손이 바뀌면 새로이 본래의 글씨 수준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유희강은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좌수서(左手書)' 세계를 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그의 서예 세계는 '우수서(右手書)' 시대와 '좌수서' 시대로 나누기 시작한다.

이러한 재기는 세계 서예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불굴의 인간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유희강의 미술 세계

▲ 유희강 ‘금문(金文)’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유희강 예술의 본령은 서예에 있다. 그의 글씨는 전서·예서·해서·행서에 두루 능하였으나 특히 전서와 행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그에 비해 초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의 전서와 예서는 청나라 등석여(鄧石如, 1743-1805)를 주로 본받았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노력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만들었다.

또한 전서를 쓸 때 갑골문과 화상석의 문양을 사용한 것이 많은데, 이러한 것은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이라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창조적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러한 문양을 서예 작품 바탕에 자주 배경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이러한 혼성적인 모습은 현대 미술에서 서로 다른 갈래를 혼성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 유희강 ‘다반향초’ 1975년 ⓒ 황정수


해서와 행서는 처음에는 중국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과 유용(劉鏞)을 바탕으로 하여 유연하면서도 단정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웅혼한 기운이 담긴 북위(北魏)시대의 글씨체를 더해 필획의 힘이 강한 서풍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이 더해져 그의 서풍은 당대 서예가들 중 특히 남성적인 면이 강하고, 대륙적 분위기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유희강 ‘홍매’ 1966년,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유희강은 서예뿐만 아니라 그림과 전각에도 능하였다.

그의 그림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먹으로 유희하듯 빠른 필치로 그린 문인화인데,

구성 감각이 전문화가 못지않다.

 

특히 매화 그림에 매우 능했는데, 그의 강한 서예 필획이

매화 가지를 치는데 어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유학 초기에 서양화를 공부하며 습득한 소묘 실력도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전각(篆刻)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중국에서 공부하며 각고의 노력으로 연마한 것이다.

 

자신이 쓰던 인장은 대부분 스스로 전각한 것이다.

전각 솜씨에 있어서도 글씨체처럼 작은 것에 연연치 않고 시원스레 각한 특징이 있다.

유희강의 대표작 '완당정게'

 

▲ 유희강 ‘완당정게’ 1965년 성균관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유희강이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역시 '완당정게(阮堂靜偈)'이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준 정게(부처의 가르침 찬미)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가운데에 불탑을 쌓듯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큰 글씨 여섯 자를 배치하고,

좌우에 잔글씨를 빼곡히 썼다.

가운데 글씨는 작은 글씨를 위로 하고 차례로 내려오며 커져

마지막 '불(佛)'자에서 마무리 되어 탑처럼 된다.

 

또한 좌우로 배치된 잔글씨는 글자 크기도, 행간의 제약도 없이 자유롭다.

마치 글씨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얽매이는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럽다.

이 작품은 비록 작은 글씨이지만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불교 사상과 같은 동양 사상의 축적 같기도 하다.

유희강은 '검여(劍如)'라는 강한 호를 쓰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주로 '소동파와 김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소완재주인(蘇阮齋主人)'을 주로 썼다.

 

그가 왜 소동파와 김정희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완당정게'를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또한 "며칠만 글씨를 생각하지 않으면 벌써 붓의 획이 무디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던

유희강의 서예에 대한 예술혼이 몰입해 완성되고 있음을 느낀다.

한 생애를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 성균관대학교에 전시 중인 ‘관서악부’ ⓒ 황정수


유희강의 작품은 세상에 흔하게 널려 있지 않다.

작가가 평소 작품 매매에 관심이 적어 파는데 신경을 쓰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만한 곳이 없어 애호가들에게 늘 아쉬움을 주었다.

그런데 2019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유희강의 후손들이 부친의 모교인 성균관대학에 작품 일천여 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방명록, 사진 등 대부분의 자료를

어떤 조건도 없이 모두 기증한 것이다.

이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단연 '관서악부(關西樂府)'이다.

'관서악부'는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 채제공(蔡濟恭)이

1774년 평안감사로 부임하자 평양 역사와 유적을 소재로 지은 108수 연작시이다.

 

신광수는 '관서악부'를 또 다른 친구이자 글씨에 능한 강세황(姜世晃)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으나,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강세황은 글씨를 완성하여 신광수 아들에게 전한다.

유희강은 말년에 유독 '관서악부'를 쓰는 일에 집착한다.

그는 '관서악부'를 세 차례 썼다고 하는데, 마지막 작품은 생을 마감하기 전

6개월간 매진해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친구인 한학자 임창순(任昌淳)에게 교정을 부탁한 사이에

숨을 거둬 발문을 쓰지 못한다.

결국 임창순은 유희강 사후에 발문을 넣어 완성시킨다.

'관서악부'는 34미터나 되는 대작일 뿐만 아니라 유희강 서예 예술의

기념비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이 대작은 유희강이 마치 서예가로서의 마지막 혼을 집어넣으려는 듯

온 정성을 기울여 어느 한 곳 흐트러짐 없는 절필이다.

어쩌면 그는 강세황이 신광수의 청을 들어 붓을 들었던 마음으로 글씨를 썼는지 모른다.

신광수와 강세황, 유희강과 임창순 이들은 '관서악부'라는 작품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하늘이 내린 인연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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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들이 선정한 사진촬영 명소입니다.
촬영 여행 다니실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거....평생 이런곳을 다 돌수 있을까요... 
여행작가분과 사진작가분들의 추천지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역시 그래도 명소는 겹치나 봅니다.

<봄>

1/강릉 경포호 벚꽃길과 선교장
2/강화 고려산의 진달래밭
3/거제 지심도 동백숲
4/경주 남산의 진달래와 돌부처들
5/고창 학원농장의 청보리밭
6/공주 마곡사의 봄 풍경
7/광양 섬진마을의 매화밭
8/구례 문수면 벚꽃길과 사성암
9/남원 지리산 바래봉과 봉화산의 철쭉
10/달성 비슬산의 참꽃(진달래) 군락
11/보성 봇재와 회천면 일대의 차밭
12/산청 황매산의 철쭉밭
13/서산 개심사의 솔숲길과 벚꽃
14/순천 선암사의 오래 된 매화나무
15/안성 배꽃과 남사당놀이 공연
16/양산 원동 매화마을과 기찻길
17/양평 개군면의 산수유마을
18/여수 거문도의 동백숲과 백도 절경
19/영덕 지품면의 복사꽃 군락
20/영주 부석사의 사과꽃과 마구령 조망
21/완도 청산도 당리언덕의 보리밭
22/이천 백사면의 산수유마을
23/인천 승봉도의 해당화 군락
24/제주 우도의 산호사해변과 보리밭
25/제주 정석항공관 주변의 유채꽃길

<여름>

1/가평 조무락골과 명지계곡
2/고성 상족암 공룡발자국화석과 산책로
3/고양 원당 종마목장의 목가적 풍경
4/고흥 외나로도의 염포, 신금해수욕장
5/괴산 화양구곡과 선유동계곡
6/남해 가천 다랭이마을과 물미해안도로
7/단양 온달산성의 남한강 조망
8/삼척 부남해수욕장
9/시흥 관곡지의 연꽃
10/신안 홍도의 33경과 원추리꽃
11/영광 백수해안도로 일몰과 해당화
12/예천 회룡포
13/용인 한택식물원의 꽃동산
14/울릉도 성인봉 원시림과 섬말나리군락
15/울진 불영계곡과 소광리 금강송림
16/인제 진동계곡과 곰배령 야생화
17/정선 구미정과 오장폭포
18/제주 협재, 금릉해수욕장 에메랄드빛 바다
19/진도 관매도 해수욕장과 관매8경
20/태안 안면도 수련못과 토종소나무
21/통영 소매물도 등대섬과 원추리꽃
22/평창 한국자생식물원의 우리꽃
23/포항 내연산의 12폭포와 하옥계곡
24/합천 오도산 정상의 운해와 일출
25/홍천 내린천 상류와 살둔계곡

<가을>

1/고령 지산동고분군
2/고창 선운사의 꽃무릇 군락
3/김제 진봉반도의 가을 지평선
4/남양주 수종사에서 바라본 운해
5/담양 메타세콰이어길과 금성산성
6/봉화 청량산의 단풍과 청량사
7/상주 남장마을의 곶감 덕장
8/양양 주전골과 흘림골의 오색 단풍
9/영동 상촌면의 곶감과 도마령 단풍길
10/영암 월출산의 억새밭과 마애불
11/영양 서석지 은행나무와 일월산 단풍
12/영천 보현산천문대
13/옥천 용암사의 새벽 안개와 일출
14/완주 대둔산의 기암과 단풍
15/울릉도와 독도의 절경과 해국 군락
16/인제 방태산의 이단폭포와 단풍
17/임실 옥정호의 일출과 운해
18/정선 민둥산의 억새 능선길
19/제천 월악산국립공원의 단풍
20/진도 세방리의 낙조전망대
21/진안 마이산과 탑사
22/창녕 우포늪의 새벽 풍경
23/청송 주산지의 단풍과 물안개
24/하동 악양들판과 고소산성 조망
25/함양 상림숲의 낙엽길

<겨울>

1/경주 봉길리해변 안개와 대왕암 일출
2/고성 송지호의 고니와 옵바위 일출
3/군산 페이퍼코리아철길과 금강하구 철새
4/둥해 무릉계곡의 설경과 추암 일출
5/무주 덕유산 향적봉의 눈꽃
6/문경 문경새재 옛길의 설경
7/부산 태종대의 등대와 광안대교의 야경
8/부안 변산반도의 설경과 채석강 일몰
9/서천 마량포의 일출과 동백정 일몰
10/속초 영금정 해안과 속초해수욕장 일출
11/순천 순천만 갈대밭
12/안동 하회마을 강변의 상고대
13/양양 하조대의 노송과 등대 해돋이
14/여수 돌산대교 야경과 향일암 일출
15/여주 신륵사의 상고대와 황포돛배
16/영덕 강축해안도로와 풍력발전단지
17/울산 간절곶 일출과 울기등대 대왕암
18/울진 덕구온천과 죽변항 해돋이
19/제주 형제섬의 해돋이와 송악산 전망
20/철원 민통선의 두루미와 고석정
21/태백 태백산의 눈꽃트레킹과 축제
22/태안 안면도 황도 일출과 꽃지 일몰
23/평창 대관령양떼목장과 선자령의 설경
24/해남 고천암호 갈대밭과 가창오리 군무
25/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과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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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

전통 마을이라고 언제나 환경적으로 완벽한 조건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입지에 조성된 마을이 더 많다. 외암마을도 그중 하나다.

 

외암이라는 이름은 마을 입구에서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설화산 바위에서 연유했다는 설명이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부터 시흥역이 있었는데 외암마을은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므로 오양골이라고 불렀고

오양의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외암마을은 전통 마을의 기본인 배산임수형이 아니다.

500여 년 전 강씨와 목씨가 살았고 일정 기간 동안 평택 진씨가 주로 살았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의 묘가 외암마을 남쪽으로 약 500미터 거리에 있다.

 

그런데 16세기에 이사종(?~1589)이 참봉 진안평의 맏딸과 결혼하면서 예안 이씨 일가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암마을이 본격적으로 예안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입향조 이사종의 5대손 외암 이간(1677~1737)부터다.

 

그는 숙종 36년(1710) 장릉 참봉에 천거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는데,

숙종 42년(1716) 다시 천거되자 세자시강원 자의가 되었다.

 

이후 종부시정, 회덕현감, 충청도도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서 주로 지내면서

권선재를 건립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외암유고』를 남겼다.

 

외암마을은 입구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가므로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다.

 

외암마을 입구에 있는 반석과 석각도 자랑거리다.

물레방아와 정자 아래 개천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고

마을 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글이 새겨진 석각이 있다.

 

외암동천은 높이 52센티미터, 너비 175센티미터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인 이용찬이 썼다.

동화수석은 높이 50센티미터, 너비 2미터로 역시 예안 이씨인 이백선이 썼다.

 

 

외암마을은 전통적인 상류 가옥, 중류 가옥, 서민 가옥이 함께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전통 마을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대부의 집은 기와집이고 일반 평민이나 노비의 집은 초가집이다.

 

 

건재고택, 이참판댁,감찰댁,신창댁,교수댁,외암종손댁이 있지만 밖에서만 들여다 볼수있다 

풍경으로 만나는 조화로움은 외암마을이 지닌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외암마을의 주산인 설화산 뒤에는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사위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는 맹씨행단이 있다.

이는 남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이다. 인근인 신암면 예림리에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추사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22세에 재혼한 부인이 예안 이씨 이병헌의 딸이며, 외암마을은 김정희의 처갓집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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