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서단에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이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두 사람은 120년 이상의 세대 차이가 있으나 미술을 대하는 마음은
평행을 이룰 만큼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에게 가장 공통되는 일면은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
곧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실제 서예가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점이 많았다.
그는 옛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예술 세계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대 서예가들 중 일부는 옛 것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다른 일군의 서예가는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인격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비해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창조적인 정신을 가졌고, 인생살이에서도 큰 흠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유희강의 존재는 한국 서예사의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유희강의 극적인 삶의 역정
▲ 검여 유희강. 1976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인천 출신 유희강은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명륜전문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에 들어가 1937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방문화학원'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한편
중국어를 공부하고 서예와 금석학을 연구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한커우(漢口)에서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난창(南昌), 상하이(上海)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때 같은 지역에서 서양화가 임군홍(林群鴻)도 광고회사를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유희강은 중국에 있으며 상하이에 자주 머물렀는데,
이는 상해 임시정부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1945년 경 해방 즈음이 되어서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주호지대장의 비서로 일하였다.
해방이 되고 임정 요원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앞장서 주도적으로 일했다.
이를 보면 유희강은 당시 미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관여한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1946년 귀국한 유희강은 인천시립박물관장과 인천시립도서관장 등을 역임하고,
여러 학교에서 글씨를 가르친다.
1962년부터는 서울 관훈동 '통문관(通文館)' 건너편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열어
서예 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썼다. 현재의 통문관 건물의 제자(題字)도
통문관 주인과 가까이 지내던 유희강이 1967년에 쓴 것이다.
통문관 이름을 쓴 이듬해 1968년, 유희강은 친구인 화가 배렴(裵濂)의 만장을 쓰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이 일어나 오른쪽 반신 마비가 되어 서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애주벽(愛酒癖)이 초래한 불상사였다.
서예가에게 글씨 쓰는 손 마비는 예술가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유희강은 불굴의 의지로 남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계속해
십 개월 만에 오른손 못지않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서예는 필획의 움직임에 따라 글씨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손이 바뀌면 새로이 본래의 글씨 수준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유희강은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좌수서(左手書)' 세계를 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그의 서예 세계는 '우수서(右手書)' 시대와 '좌수서' 시대로 나누기 시작한다.
이러한 재기는 세계 서예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불굴의 인간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유희강의 미술 세계
▲ 유희강 ‘금문(金文)’ 검여 유희강 서예집(일지사. 1983) 재촬영 ⓒ 일지사
유희강 예술의 본령은 서예에 있다. 그의 글씨는 전서·예서·해서·행서에 두루 능하였으나 특히 전서와 행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그에 비해 초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의 전서와 예서는 청나라 등석여(鄧石如, 1743-1805)를 주로 본받았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노력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만들었다.
또한 전서를 쓸 때 갑골문과 화상석의 문양을 사용한 것이 많은데, 이러한 것은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이라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창조적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러한 문양을 서예 작품 바탕에 자주 배경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이러한 혼성적인 모습은 현대 미술에서 서로 다른 갈래를 혼성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 유희강 ‘다반향초’ 1975년 ⓒ 황정수
해서와 행서는 처음에는 중국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과 유용(劉鏞)을 바탕으로 하여 유연하면서도 단정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웅혼한 기운이 담긴 북위(北魏)시대의 글씨체를 더해 필획의 힘이 강한 서풍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이 더해져 그의 서풍은 당대 서예가들 중 특히 남성적인 면이 강하고, 대륙적 분위기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