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많은 연말년시

 

/이명수

 

#1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는 때 묻지 않은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모순과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어른들에게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한다.

 

어린왕자는 소혹성을 떠나 여러 별을 여행하는데, 세 번째 별에서 술꾼을 만난다.

술꾼이 사는 별에는 아주 잠깐 들렀을 뿐이지만, 어린왕자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뭘 하고 있어요?"

 

빈 술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찬 술병 한 무더기를 앞에 두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어린왕자가 물었다. 술꾼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술을 마시지."

"왜 술을 마셔요?"

"잊기 위해서지."

"무엇을 잊으려고 하는데요?"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야."

 

어린왕자는 그를 돕고 싶어 물었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술꾼은 이렇게 말하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왕자는 당황해서 그 별을 떠났다. 어린왕자는 여행을 계속하면서 중얼거렸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

 

#2

불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한다.

의역하면 감인토(堪忍土), 인계(忍界), 인토(忍土)로 번역되는데,

 

인내를 강요 당하는 세간,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은 참 고통이 많은 곳이다.

 

갖가지 문제들이 끝없이 생겨나서 몸과 마음을 괴롭힌다.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를 풀려는 의도에서 한잔 술로 기분전환을 꾀한다.

알딸딸하게 이성을 마비시켜 온갖 시름을 잊으려는 것이다.

 

<고삐 풀린 뇌>의 저자 데이비드 J. 린든은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교수로 신경학의 세계적 권위자다.

 

그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 존재로 만드는 고유한 특성인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누구나 쉽게 중독자가 되는 것은 '뇌 속 쾌감회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곳을 자극하면 쾌락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알코올 섭취를 통해 비정상적인 쾌감을 느끼게 되면

지속적으로 마시고 싶은 갈망을 유발하여 알코올중독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 술의 기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 지구상에서 최초의 인간이 포도나무를 심고 있었는데

악마가 다가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인간이 대답했다.

 

"멋진 식물을 심고 있지. 이 나무에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가 열려서

그 즙을 마시면 누구라도 기분이 황홀해질 것이네."

 

이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긴 악마는 자기도 한몫 끼워달라고 했다. 인간이 흔쾌히 허락했다.

악마는 양과 사자, 돼지와 원숭이를 죽여 그 피를 포도밭의 거름으로 뿌렸다.

 

그래서 술은 마시기 시작할 때는 양처럼 순하고,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용감해지고,

그보다 더 마시면 돼지처럼 더럽게 된다. 너무 지나게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서 추태를 부린다.

이것이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악마가 인간을 찾아가기가 너무 바쁠 때는

대신 술을 보낸다"라는 유대인의 격언이 비롯되었다.

 

#3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맥락의 '술 귀신'에 관한 민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옛적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효자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풍모가 범상치 않은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아버지의 병은 선비, 광대, 미치광이 세 사람의 간을 먹이면 나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고민 끝에 노인이 말한 세 사람을 죽여 간을 약으로 썼다.

그러자 정말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아들은 자신이 죽인 사람의 시신을 한 곳에 수습했는데 그 무덤에서 밀이 돋아났다.

밀알의 세로 선은 세 사람의 간을 꺼내기 위해 배를 짼 자국이라고 하는데,

이 밀로 빚은 것이 술이다.

 

술에는 죽은 세 사람의 혼이 깃들어 있어서 마시는 양에 따라 차례로 나온다.

처음에는 선비처럼 점잖고, 취기가 오르면 흥이 올라 광대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도가 지나치면 미치광이가 되어 날뛴다는 것이다.

 

#4

좋으나 싫으나 술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술을 즐기고 있으며, 술을 마시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기뻐서, 슬퍼서, 울적해서, 속이 출출해서 등등 무엇이든지 그냥 같다가 붙이면 이유가 된다.

 

술 마시는 이유가 998가지라면, 술을 못 마시는 이유는 단 두 가지뿐이다.

그것은 술이 없거나 몸에서 술을 받지 않아서다.

 

애주가들은 하루 중 술 마시기 좋은 시간을 '술시'라고 부른다.

술시(戌時)는 오후 7시에서 9시까지이다.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할 시간이다.

속이 출출할 때는 술이 술술 잘 넘어가는 법이다.

 

그래서 '개 술()' 자를 쓰는 '술시'는 술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거기에서 꼭지가 더 돌면 돼지(亥時)가 되어 버리는 것이리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술도 처음 배울 때가 중요하다.

잘못 배우면 그 고약한 버릇이 평생을 간다.

 

사마천은 <사기>"술에는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으니,

엎어지도록 마시지 마라(酒有成敗而不可泛飮之)"고 경각심을 주었다.

만사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술을 잘 마시는 법은 '술 주()'자에 나타나 있다.

()자를 파자해 보면 '물 수 변()''닭 유()'자가 된다.

 

닭이 어떻게 물을 마시는지 생각해 보라.

닭이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하듯이

술을 마실 때는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면서 천천히 마셔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술이 나쁜 것이 아니라 폭음이 나쁜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술을 지혜롭게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의 호는 '취옹(醉翁)'이다.

'술 취한 늙은이'라 자처한 이유가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잘 나타나 있다.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술에 기탁하여 산수를 즐기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내면의 수련이 깊은 선비의 풍류가 느껴지는 글이다.

 

술 앞에서는 늘 사양지심(辭讓之心)을 가져야 가슴을 치며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드는 승정원 관리들은 '갈호배(蝎虎杯)'란 잔으로 술을 마셨다.

 

갈호는 사막에 사는 도마뱀의 일종인데, 술 냄새만 맡아도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일부러 술잔을 갈호 모양으로 만들어 과음을 경계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처럼 입술과 혀를 적시며 천천히 술을 음미하고,

기분 좋게 살짝만 취한 상태에서 담소를 즐기는 것이 지혜롭고 멋진 술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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