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통행불가? 법으로 막자"

어느 건축가의 이색 제안

아파트 단지 공공보행권 회복 정책 제안

홍윤주 웹진 '진짜공간' 대표가 1월 30일 오후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 용산구 보광동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홍 대표는 이곳에서 아파트 단지 공공보행권 회복을 위한 정책 제안의 필요성을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 유지영관련사진보기

 

동일한 면적의 위성 사진 세 장(아래 사진)에서 녹색 선으로 표시된 곳은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첫 번째 사진은 2월 현재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 일대다.

 

다른 사진 두 장은 서울 강남구 아파트 단지다. 강남구처럼

보광동에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웹진 <진짜공간>의 홍윤주 대표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기존 도시가 제공했던

다양한 경로 선택권이 사라지고, 보행자가 아파트 단지 외곽의 도로로 우회할 수밖에 없는 점을 지적한다.

마치 동맥경화처럼 기존에는 구석구석 순환되던 활발한 공간이 더는 흐르지 않고 고인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오랜 시간 도시의 공간 문화를 고민해오며 2011년부터 건축 웹진 <진짜 공간>을 만들고,

같은 이름의 책(프로파간다 출판사)을 내기도 한 건축가다. 그는 지난해 12월 정부의 온라인 국민 소통 창구인

소통24에 '담장 없는 도시 : 아파트 단지 공공보행권 회복 및 소셜 스트리트(보행자 중심의 거리)

조성 방안'이라는 제목의 정책 제안을 올렸다.

아파트 단지 완전 개방을 법적 의무로 만들고, 보행자 중심의 도시로 다시 설계하자는 제안이다.

지난 1월 30일, 이 정책 제안의 계기가 된 보광동 일대에서 홍 대표를 만났다.

재개발 후 아파트 들어서면 벌어질 일

"같은 면적의 보광동 일대와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항공사진을 겹쳐보았다.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

기존 도시 조직이 제공했던 다양한 경로 선택권이 사라지고, 보행자는 단지 외곽의 간선도로로만

우회해야 하는 강제를 당한다." (홍윤주 대표가 올린 정책 제안 중 일부 발췌)

ⓒ 진짜공간 홈페이지(jinzaspace.com)관련사진보기


홍 대표는 과거 보광동 일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원래 살던 곳은 보광동 인근 경리단이었고,

작업실은 해방촌에 있었다. 친구들의 작업실도 근처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보광동 골목을 활보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며 이상하고

어딘가 찌그러진 동선을 발견하는 일은 그에게 큰 재미였다.

그러나 재개발이 한창인 지금 홍 대표는 "온기로 가득 찼던 동네가

마치 폭탄 맞은 것처럼 쓸려가 허허벌판이 됐다"고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보광동의 모습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재개발로 인해 이태원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했다.

"지금 이태원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다양함을 품은 마을이 없어지면 우리가 아는 이태원이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곳이 좋았다. 어떤 이상한 사람도 여기 와서 옷을 이상하게 입어도 아무도 눈총을 주지 않았다."

이곳에서 재개발을 마주한 그는 흐르지 않는 도시의 문제를 몸소 느꼈다.

여기에다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지하철역 반경 500미터를 표시해두고,

동네가 가진 문화를 살펴보는 프로젝트를 통해 아파트 단지의 문화적 공백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심각성을 말하며 지역 문화의 변질을 비판하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문화의 변질을 넘어 문화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

이는 홍 대표가 '공공보행권 회복'에 대한 정책을 제안한 이유다.

건축가인 그가 정책을 제안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여러 회의나 간담회를 주재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정책을 제안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개인이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부가 바뀌고 시민들이 대통령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언론에 많이 보이더라.

 

대통령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의 말을 메모하고 옆사람에게 확인해보라고 하는

모습에서 그래도 문턱이 낮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통24에는 누구나 정책 제안을 올릴 수 있다.

누군가 올린 정책 제안에 30일 내에 30명 이상이 공감하면 '제안 숙성' 단계로 넘어가

논의를 거쳐 행정안전부 등 각 부처가 검토를 해 실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

현재(2월 5일) 그의 제안은 '제안 숙성' 단계에 가있다.

홍 대표가 제안한 것과 비슷한 내용의 시민 정책 제안은 2025년에도 존재했다.

강남·서초·송파 등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 공공보행로에 울타리를 세우자,

한 시민이 서울시 시민 제안 창구(상상대로 서울)에 '아파트 내 공공보행로

지정 부분 불법 보행 차단 근절을 위한 법안 개정'이라는 글을 올린 것이다.

홍 대표는 그 제안에서 더 나아가 아파트 단지를 전부 개방하자고 말한다.

그는 공공보행권을 시민들의 권리로 보았다.

"원래 우리 모두가 다닐 수 있는 공공 도로다.

나도 세금을 낸 시민으로서 그 도로에 대한 권리가 있다."

아파트 담장 허물면 벌어질 일

최근 강동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선 입주민에게만 전용 반려견 목줄을 나눠주며

입주민이 아닌 이들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홍 대표는 이를 두고 "울타리를 올려 동네를 단절시키면 소외만 일어날 뿐"이라며

"아파트 단지 내에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커뮤니티 센터를 만드는데 그러한 인위적인 프로그램은

길 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소통의 역동성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홍 대표는 아파트 단지를 모두 사유지로 묶는 기존의 '빗장 커뮤니티'에서 탈피해

단지 내 도로는 공공이 관리하고 건물만 민간(입주자대표회의 등)이 관리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공공 도로가 재개발 아파트 단지에 포함될 경우 완전 개방을 법적으로 의무화해

입주민이 아닌 이들을 차별하지 않도록 '보행권 조례' 제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홍 대표는 이러한 조치가 입주민에게도 좋다고 말한다.

분양비나 관리비 부담을 덜 수 있고, 고립된 섬이 아닌 자연스런 동네 산책로이자

쉼터 같은 단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해 "이것이 탄소 중립 시대에 걸맞은 보행 중심의 교통 체계 확립에도 기여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에선 꿈처럼 들리는 이러한 제안을 두고 홍 대표는 "(정책 제안 내용을)

<진짜공간> SNS(@JinzaSpace)에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전했다.

 

'제안 숙성' 단계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시민 30명도 금방 모이기도 했다.

그는 "같은 (건축) 업계가 아니어도 많이들 (이 사안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의 제안은 길을 중심으로 한 도시 공간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최근 '핫플레이스'로 불리는 곳들은 모두 경리단길, 망리단길, 삼청동길처럼

길을 중심으로 이야기된다. 사람들은 길을 좋아한다. 나는 사람들이 길을 걸어다니면서

다채롭게 즐기는 걸 여전히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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