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아호에 얽힌 사연

지금도 학자나 예술가 중에는 여전히 아호를 즐겨 쓰고 있다.

/ 김삼웅

▲당호 현판 ⓒ 이상기관련사진보기


한자 문명권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름이나 자(字) 외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호(號)를 지었다.

벼슬아치나 선비들이 즐겨 써왔다. 아호(雅號)는 예술가들이 시문이나 서화 등에 쓰는 본명 외의 뜻으로,

당호(堂號)는 사는 집이나 서재에 붙이는 이름이다.

사람에 따라 아호와 당호가 함께 쓰이는 경우도 많았고, 역사상의 인물이 되면

본명보다 호가 더 많이 회자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구화의 물결과 함께 저명 인사들도 호보다 영문 이니셜로 불리게 되면서

아호와 당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학자나 예술가 중에는 여전히 아호를 즐겨 쓰고 있다.

선비들의 경우 호는 바로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고,

문인과 관리들 중에는 시류에 좇아 '종횡무진'하다

 

, 자신의 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또 거창하게 호를 짓다보니

그 무게에 짓눌려 '압사당하는' 형국의 인사도 없지 않았다.

조선후기 영·정조시대는 세종 이래의 문화적 융성기였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정조 대에는 글을 좋아하는 군주에 영명한 제상 채제공 체제였다.

 

그래서 서자와 중인출신의 문인들이 모처럼 사람 대접을 받고

고위직은 아니지만 규장각 검서관의 직에 나갈 수 있었다.

북학파 지식인들이 나타나고 이들은 관직보다는 학문을 선호하여 우리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각종 저술을 남기고 백탑 모임을 가져 연구와 토론으로 학문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몇 사람의 호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본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자는 무관(懋官), 호는 청장관(靑莊館)이다.

나의 호, 청장(靑莊)은 푸른 백로를 말한다. 청장은 고요히 물가에 살면서,

눈앞에 지나가는 고기를 필요한 만큼만 먹고사는 상정이 맑고 욕심 없는 새라고 한다.

 

하늘처럼 미더운 새라는 뜻인지, 하늘도 그 고요한 성품을 믿는 새라는 뜻인지,

사람들은 이 새를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높여 부른다.

나도 그리 살고 싶었다. 달리 누리는 것이 없어도 좋으니 그저 약간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책 속의 글귀들로 머리와 가슴을 채우며, 고요히 한자리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간절한 바람에 지나지 않아서, 오랫동안 내게는 마음 편히 머무를 곳이 없었다.

백탑 아래, 벗들이 공부방을 지어 주면서 비로소 나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청장이 푸른 날갯짓을 하듯이, 나는 날마다 방 안에서 책 속을 누비며 다녔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고,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마음껏 내 발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림을 보듯, 소리를 듣듯, 나만의 작은 방에서 마음껏 책 속에 빠져들었다.(이덕무, <이목구심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이다. 호에 대한 자변이다.

담(湛) 자가 허명(虛名)하고 소광(昭曠)하여 외물(外物)의 누가 없기를 바라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텅 비고 맑으며, 밝고 넓은 집으로, 숨은 선비의 뜻을 드러낸 말이기도 한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절친이었던 이덕무 의 글이다.

선생의 호, 연암(燕巖)은 황해도 금천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우리가 백탑 아래에 모여 살던 무렵, 나와 벗들은 선생과 함께 개성과 평양 일대를 유람한 적이 있다

그때 백동수의 안내로 연암골을 찾게 되었는데, 선생은 그곳이 무척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속이 다 비칠 정도로 맑은 시냇물 위에는 검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항상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하여

'연암(燕巖)'이란 이름이 붙은 바위였다.

언젠가 그 곳에 내려가 살리라 마음을 먹은 선생은, 그때부터 호를 '연암'이라 하였다.

제비와 바위, 날렵한 몸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제비와 한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르는 듬직한 바위,

이 두 가지를 함께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에게만큼은 참 잘 어울리는 호라고 혼잣말을 하며,

나는 가만히 웃었다.(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호가 여럿이다. 흔히 쓰는 다산(茶山)은

유배지 강진 처소부근에 야생 차나무가 많아서 택하였다.

 

그 외에 사암(俟菴), 태수(苔叟), 열수(洌水) 등이 있고,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지었다.

반대세력의 집요한 참소에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노자의 <도덕경>에 "신중하라. 겨울에 살얼음판의 시내를 건너듯(與兮若冬涉川),

경계하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유여약외사린 猶兮若畏四隣)"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유당은 이 글에서 '여(與)'와 '유(猶)'를 가져와 지은 이름으로,

겨울에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가 당시의 상황을 얼마나 엄중히 여겼는지 잘 알 수 있다.(김삼웅, <다산 정약용 평전>)

최북(崔北, 1720?~1770?)은 생몰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화단에서 기행과 파격과 풍류의 한 획을 긋는 화가이다.

 

여러 가지 자와 호 중에 칠칠(七七)이란 자호가 있다. 이름 북(北) 자의 좌우 획을 나누면 七七이 된다.

칠칠의 사전적 의미는 ① 잘 자라서 길차다 ② 나이에 비해 숙성하고 점잖다

③ 일의 솜씨가 능란하고 빠르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칠칠치 못한 사람을 칠푼이라고 한데서 '칠칠'의 반어를 뜻하여 아호로 썼다.

이병기(李秉岐, 1891~1968)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시조시인이고 올곧은 학자이다. 그의 호는 가람이다. 아호의 변이다.

수당(壽堂)께 갔었다. 이말 저말 끝에 내 호를 지어준다. 한자로 임당(任堂)이라 한다.

나는 이미 '가람'이라 했다.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다.

온갖 생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모여 바다가 된다. 그러면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 근원은 무궁하고 그 뜻도 무궁하고 영원하여 이 골목 저 골목 합하여

진실로 떳떳함을 이루어 완전하여, 산과 들 사이에 끼어 있어 뭍(陸)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함이다.

이 세 가지 뜻을 붙여 지음이다. 우리말로는 '가람'이라 하고

한자로는 '임당'이라 하겠다.(이병기, <가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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