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꽃만 말고 이마음도 함께 따가 주.’
시인 김동환(1901∼?)의 ‘봄이 오면’ 첫 구절이다. 이처럼 진달래는 봄의 도착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꽃이다. 따뜻한 바람을 타고 잎보다 먼저 연분홍 꽃이 산등성이에 무리 지어 핀다. 진달래의 먼 선조들은 생존경쟁에 밀려 비옥하고 아늑한 땅은 다른 나무에게 빼앗기고 척박한 산꼭대기로 쫓겨나게 됐다. 바위가 부스러져 갓 만들어진 흙으로 말이다. 수분이 부족해 대부분의 식물이 싫어하는 산성(酸性) 땅으로….
경쟁자가 많지 않아 좋은 점도 있다. 그러나 평생 고난의 행군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진달래는 생명력이 강인하다. 사이좋게 오순도순 모여 그들만의 왕국을 이룬다. 특히 우리나라 진달래는 중국이나 일본 진달래보다 꽃이 곱고, 양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품종개량이란 성형수술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자연미인이다. 다만 숲이 우거지면서 그 영토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옛 문헌에 나오는 진달래는 모두 두견화(杜鵑花)로 기록돼 있다. 중국 이름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런 전설이 있다. 중국의 고대국가인 촉나라 임금 두우는 벌령이란 신하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한다. 억울하고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죽어서 두견새가 돼 촉나라 땅을 돌아다니며 목구멍에 피가 나도록 울어댔다. 그 피가 나뭇가지 위에 떨어져 핀 꽃이 두견화란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계모의 구박에 못 이겨 죽은 어린 여자아이의 혼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는 슬픈 전설도 있다.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는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꽃전(花煎)을 부쳐 먹는 풍습이 있었다. 꽃전이란 찹쌀가루에 꽃잎을 얹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한다. 이 풍속은 고려 때도 있었으며, 조선시대는 창덕궁 비원에서 중전이 궁녀들과 함께 ‘화전놀이’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진달래 꽃잎에다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 삼짇날의 계절음식이다. 조선말기 문신 김윤식이 쓴 『운양집(雲養集)』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은 큰 병에 걸려 고향인 당진 면천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그의 열일곱 된 딸 영랑이 날마다 아미산에 올라가 기도를 했더니 어느 날 꿈속에 신선이 나타났다. ‘아비의 병을 낫게 하려면, 아미산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과 찹쌀로 술을 빚어 마시게 하라’고 했다. 신선의 말대로 하자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이후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는 약술로 애용됐으며 기침을 멈추게 하고 신경통·류머티즘 등 성인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부지방에서는 진달래보다 참꽃이란 이름에 더 친숙하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진달래가 필 즈음에 굶주린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따먹고 허기를 달랬기에 진짜 꽃이란 의미로 참꽃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너무나 친숙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비롯해 옛 선비들의 시문집에도 진달래 시가 수없이 실려 있다. 아래는 백성에서 임금님까지 우리 모두가 좋아하고 사랑한 꽃이었다. 진달래 축제가 벌어지는 여수 영취산, 강화 고려산, 대구 비슬산의 진달래 등 지금부터 우리의 산은 진달래 천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