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 선생  

 

南田 元仲植 약력

본관: 原州

아호: 南田, 阮劍齋, 松茂竹苞齋, 自怡軒.

 

1941328仁川 출생

1968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학과 졸업

1960-1976劍如 柳熙綱선생에게 서예 사사

1962 국전 입선(이후 5회 입선)

1969-1990년 서울시립대학교 및 서울시 재직

1980 한국서법학대회 한국 대표(대북), 1회 국제 서법연합전 한국대표(홍콩)

1981~98 국제서법예술연합전

1988년 삼인행전(三人行展: 丘堂 呂元九, 艸丁 權昌倫, 南田 元仲植)

1988~98 전국휘호대회 심사위원, 서울시립대 강사,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

1994국제서법대전 금상 수상

1999년 제1회 남전 원중식 서법전(예술의 전당 서예관)

2010년 일중(一中) 서예상 대상 초대전(백악미술관) 

현재 국제 서도연맹 한국본부이사, 한국서예가협회 상임위원, 한국전각회 이사

 

<주요사항>

한국전각학회 회장

경동대학교 석좌교수 겸 문화원장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자문위원

예술의전당 자문위원

 

한국 서단의 원로이신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선생이

지난 27일 오후 6시에 별세했다. 향년 72.

 

고인은 항암 치료하는 와중에도 왕성한 작품활동과 동시에

한국전각학회 회장과 경동대학교 문화원장 등의 직책을 담당하며 한국의 서예와 문화계를 선도해 왔다.

고인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선생에게 정통으로 서예를 사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승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의 수족이 되어 보필하고

그의 작품을 집대성한 일은 한국서단의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고인은 도연명(陶淵明)을 흠모하여 20여년의 공직생활을 훌훌 접어 버리고

강원도 심신산골에 정착하여 서예에 정진하였다.

그의 작품에 대해, 고 임창순(任昌淳) 선생은 준마가 거침없이 들판을 내닫는 듯하다.”라 하였고,

고 김응현(金應顯) 선생은 천성이 진중하여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신()을 창출해 내었다.”라 하였고,

최완수(崔完秀) 선생은 한중(韓中) 서예를 관통하여 자기화하고 채색을 이용해

문자조형의 미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그의 서예 경지는 사계에서 인정을 받아 1회 일중서예대상’(2008)을 수상하여

백악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기도 하였다.

 

고인은 후학양성에 남다른 애정으로 시계연서회(柴溪硏書會)를 결성해 매년 전시회를 개최하고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작은 밀알과 같은 그의 실천철학은 사표로써 귀감이 될 만하다.

 

자연을 사랑하여 채마밭과 식물을 가꾸며 강원도 화진포에서

서예 작품 활동에 혼혈을 바치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선생의 온화한 인품과 걸출한 예술혼은 후학들의 가슴에 길이 길이 전해질 것이다.

 

유족은 미망인 강석인, 장남 유정(44), 유련(41)11.

장례식은 30일 오전 1030. 서울대병원.

 

 

1. 靜中動 삶 지향... "서예는 마음 담는 도구"

 

서예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자유인이자 서단의 마지막 버팀목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남전 원중식(64).

그에게 있어 삶의 형식은 그 자체가 형식일 뿐, 생활에 있어서

모든 구속과 억제를 받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삶의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삶의 내용은 정중동(靜中動)을 지향하고 있다.

 

부인 강석인(58)씨와 고성의 서실에서 초등학생 5명을 함께 데리고 살면서 학교교육과 서예의 기본을 가르치고 있는 남전은

 여초 김응현 선생과 같은 100년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대가를 키우는 디딤돌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와같은 남전의 서예사랑은 바로 스승 검여 유희강(1976년 작고)선생으로부터 배운 겸허한 자세에서부터 출발한다.

 

한국서예가협회장을 역임하며 여초 선생과 함께 현대서예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검여가

 68년 뇌출혈로 쓰러지자 남전은 스승이 좌수서(左手書)로 재기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필하며

76년 생을 마칠 때까지 8년간 지척에서 모든 병수발을 들어 두고두고 서단에 화제가 됐다.

 

서울대 농학과 3년시절 검여 선생을 만나면서 서예에 심취하게 된 남전은

휴학한 후 서실에서 기거하면서 주경야독으로 사법(師法) 익히기에 열중,

서예입문 4년만에 국전 초입선에 성공했으며 이후 졸업할 때까지 세차례 더 국전에 입선했다.

 

국전에서 불공정 심사 등으로 한국서단에 회의를 느낀 남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회상하며 43세되던 해(1984?) 인제 내린천 줄기를 찾아 터를 잡았다.

 

199049세 때 인제 미산리에 정착, 10년동안 이곳에서 살며 모든 물욕과 사심을 접는 고행의 길을 걸었다.

남전은 "정말 나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시간이었고

올바른 서예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마음의 휴식처였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1999년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속초에 정착한 남전은

예술의 전당에서 제1회 원중식서법전을 열며 오랜 고뇌와 방황을 끝내고 '남전서예인생'을 활짝 열었다.

 

첫 개인전을 서법전이라고 한 것도 임서(臨書)에 두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남전은 '항상 스승보다 10년은 뒤졌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는데

절대 10년가지고는 선생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요즘 서예문화와 관련, "서예는 선비문화의 정수였는데

 이제는 돈있는 아주머니들이 하는 취미문화로 퇴색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앞으로 100년이내에 여초와 검여 선생을 능가할 수 있는 서예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등 수많은 서예대전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남전은 이젠 심사위원 소리만 들으면 손사래를 친다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예인들의 치부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는 자신의 마음을 담는 도구가 될 때 진정한 예술로 승화되고

 자신이 진실로 참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세계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이길 남전은 아직도 꿈꾸고 있다.

 

2. 목간 예서의 남전 원중식

 

거친듯 힘찬 필치 격조높은 書風 구축

 

인제 내린천의 깨끗한 물줄기가 쌓아놓은 3천여평의 퇴적토 위에 아담하게 지어진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58)선생의 서실은 마치 선경(仙境)을 연상케 하는 아취를 풍기고 있었다.

 

인천에서 출발한지 8시간 만에 도착한 도원경이다 

필자와 강하진화백을 반갑게 맞이하는 초로(初老)의 선비는 위엄과 기품이 넘치는 용모와 언행을 보였으나

 손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이곳에 독거하며 생활해 온 그의 관록(?)을 보여주는 듯 했다.

 

남전은 10년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부인과 외동딸을 서울에 남겨둔 채 이곳에다 손수 집을 지었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자급할 농사도 짓는다 

대화하고 산책할 친구는 세 마리의 토종개 뿐이다.

 

20여년의 공직생활과 작품활동도 그에게 있어서 한낮 세속의 속물적 행동양식에 영합했던 쑥스러운 과거일 뿐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가족도 만나고 대학에서 후진을 가르치던 일 때문에 밖에 나가던 것도 아예 끊어버렸다.

 

"도연명은 마흔셋에 구차스러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지 않았습니까.

 나도 도연명을 따라 마흔셋에 실행하려 했는데 그게 조금 늦은 셈이죠.

새로운 삶을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아수라장 같은 세상에서 하지 못했던 공부도 해야겠고

자연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 바른 글을 쓰기 위함이지요."

 

그의 서재에서 풍기는 은은한 묵향은 사방벽에 빽빽히 정리되어 있는 고서 등

한적(漢籍)의 깊은 향취와 더불어 선비로서의 그의 무욕의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1941년 인천에서 태어난 남전은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에 입학한다.

고교시절 미술에 재능이 있어 미술대학 입학을 고려하였지만

집안의 반대로 포기하고 대학 진학후 본격적으로 서예수업에 임하게 된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에게 사사받은 바 있는 그는

검여가 타계한 1976년까지 17년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검여의 서법을 습득했다 

말하자면 소석 심현삼과 함께 검여의 수제자인 셈이다.

 

남전은 대학 졸업후 전공을 살려 서울 시립대 부속농장에 처음 취업,

구로구청 녹지과장, 서울대공원 식물과장을 지냈으며 서울시청 조경과장으로 재직하던 1988년에는

 88올림픽 조경업무를 총지휘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62년 국전 초입을 시작으로 다섯번 입선하는 등 서예가로서의 자질을 보이고 있다 

국내외의 여러 권위있는 전람회에 초대 출품하면서 젊은 서예가로 입지를 굳혀가던 남전은

 1968년 검여가 우측 반신불수로 불구가 되자 검여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검여의 개인전, 유작전 등을 돕는다.

 

지금 세상에 빛을 보고 있는 검여의 작품집 세권도 전적으로 남전의 노고에 힘입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스승 검여가 타계하자 각지에 산재해 있는 검여의 서적(書跡)

일일이 찾아다니며 정리하여 사진찍고 세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의 노고가 스승을 더욱 빛나게 한 셈이다.

 

1980년 그는 대북에서 있었던 국제 서법학 대회 한국대표,

홍콩의 국제 서법 연합전 한국대표로 참가하면서 서예계에서의 입지를 굳혀나간다.

 

이어 1988년에 전국 휘호대회 심사위원, 이어 1990년에는 동아미술제와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으로

한국 서예계의 중추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현대미술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예대전(서울시립미술관), 전각 초서의 오늘전(이하 예술의 전당),

한국 서예 백년전, 한국 서예 100인 초대전등에 출품하면서

검여의 서풍을 바탕으로한 자신의 독자적 작품세계를 펼쳐보였다.

 

한편 19883월 서울 백악미술관에서는 이색적인 전시회가 열린 바 있다.

 

중국 서법학통의 내로라 하는 세 문하 즉 검여(유희강), 일중(김충현), 여초(김응현)의 수제자

남전 원중식, 구당(口堂) 여원구(呂元九),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三人行이라는 서전(書展)이었다.

 

여기에 남전은 예서대련(隸書對聯) 21점을 출품했다.

도록 서문에서 한학의 대가이며 금석학의 권위자인 지곡서당의 청명 임창순선생(靑溟 任昌淳)

남전의 글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전의 글씨는 그 스승의 제자답게 기백과 풍운을 숭상하며 준마가 거침없이 들판을 내닫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그의 야성을 길들이기만 한다면 곱게 자란 정통적 서예기법을 뛰어넘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예술세계의 큰 마당을 펼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초 김응현은 남전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남전은 갑골(甲骨), 종정(鐘鼎), 한간(漢簡)을 기간(基幹)으로 하여

 해행이 모두 고대의 기법을 소화한 격조를 보이며 초서도 웅장하여 대체로 쾌활한 야취(野趣)에 풍만한 특색을 발휘하였다.

이형부정반)」 「정견유」 「정옥형양정(丁屋形羊鼎)」 「하패부자정(荷貝父子鼎)」 「산형부왕존(山形父王尊)

소박하고도 힘차며 대은(大隱)이자(二字)는 한금문(漢金文)의 맛이 짙다

예서대련(隸書對聯)풍악(豊樂)등은 모두 한간(漢簡)의 필치로서

야취가 농후하며 결구에 한와(漢瓦)의 영향을 풍겼으되 서출지 않다"

 

말하자면 원중식은 공무원으로 20여년 재직하면서도 늘 붓을 놓지 않고 고금의 서법을 통달하고

 검여의 서풍을 섭렵하여 그만의 독자적 서풍을 확립한 것이었다 

남전은 서예에 매진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법적 수단으로 한학과 자연을 공부한다고 했다.

 

옛날에 시3절이라 하여 문장과 글씨와 그림을 모두 잘해야 선비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듯이

 남전 역시 서예를 위해서는 그림과 학문은 필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틈틈이 문인화도 그리고 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손끝에서 나오는 기교만으론 예술의 심오한 이치를 터득할 수 없습니다.

서예란 운필만이 능사가 아니라 자신이 담고 있는 사상과 품성을

무아지경에서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어느정도 터득했다고 말할수 있지요.

 

때문에 많은 공부와 수양을 쌓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렇듯 청정한 자연속에서의 삶이 보다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이렇게 인적없고 험준한 곳에서 글을 쓰고 공부하느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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