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산명 : 천황산(1,189m)~재약산(1,108m)
0 위치 : 경남 밀양시 단장면, 산내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0 코스 : 배내고개-능동산-사자봉-수미봉-사자평-층층폭포-흑룡폭포-표충사
0 일자 : 2007.10.14(일)
0 시간 : 8시간 소요 /맑음
<산행시간>
03:00 태백가든
07:00 건천휴게소 /조식
08;30 배내고개
09:00 석남고개갈림3거리
09:10 능동산
09:25 쇠점골약수터
09:30 임도
09:50 공터봉
10:00 임도
10:35 얼음골갈림봉 /천황산1.4km,얼음골1.9km,가지산
10:45 1048.9봉/삼각점
10:55 샘물산장
11:15 얼음골3거리
11:45 천황산 /사자봉 /재약산2.0km, 얼음골3.3km
12:50 천황재 /사자봉0.8km, 재약산1km, 천황산1.0km, 표충사3.4km, 배내골8km
13:35 재약산/수미봉
14:05 삼거리 /고사리분교0.5km, 재약산0.9km, 진불암0.9km
14:15 삼거리 /표충사3.9km, 진불암1.0km, 재약산1.3km
14:20 사자평 /표충사3.8km, 재약산1.4km, 배내골, 고사리분교
14:30 층층폭포
15:15 흑룡폭포
15:30 계곡
15:35 이정표 /표충사0.8km, 층층폭포4.4km
15:50 표충사
16:05 일주문
16:25 주차장
억새 산행의 대명사는 누가 뭐래도 영남알프스. 이 영남알프스에는 신불평원과 간월재,
사자평과 천황재, 고헌산 등이 주요 억새 산행지로 손꼽힌다.
이곳은 높이 1000m 이상 되는 가지산, 사자봉, 신불산, 취서산, 고헌산, 간헐산등
7개의 산군이 늘어서 겨울이면 눈 덮인 고봉들의 모습이 알프스의 모습과 같다 하여
'영남 알프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대부분의 지도는 수미봉을 재약산으로, 사자봉을 천황산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천황산은 일제때 붙여진 지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최근 산악인들은 두 봉우리를 재약산의 형제봉으로 부르고 있다.
수미봉과 사자봉은 예로부터 `삼남의 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재약산 기슭은 광활한 억새평원 사이로 얼음골, 표충사, 층층폭포, 금강폭포 등
수많은 명소를 간직하고 있다.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가람이다.
이 가람을 빙 둘러 수미봉(재약산), 향로봉, 사자봉, 필봉 정각봉
다섯 개의 봉우리가 연꽃 형상으로 감싸고 있고 그 연꽃의 가장 중심이 바로 수미봉이다.
수미산(재약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높게 솟은 산,
그래서 수미봉이라 이름이 붙었다. 이 수미봉을 재약산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자평과 주암골 등지에서 약초재배가 많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이 수미봉의 북쪽으로 더 높게 솟은 봉우리를 사자봉이라 부른다.
그 기상이 사자처럼 힘차고 늠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행기>
배내고개
석남사를 지나 굽이지는 고갯길을 버스가 힘겹게 오른다
고개에서 내려다보는 신불산과 재약산의 첩첩능선
그리고 골짜기는 운무에 덮여있다
다소 쌀쌀한 날씨속에 비가 내릴 것 같은 먹구름이 덮인 하늘
능동산이 제법 가파르게 올려다 보인다. 낙동정맥 주능선길이다.
계단으로 시작되는 오붓한 오솔길
산능선으로 이어지며 갈지자로 올라간다.
석남고개 삼거리.
처음부터 가파른 오름길을 쉬엄쉬엄 오르면
미끄러운 경사길이 끝나는 삼거리
우측은 석남고개로 내려서는 낙동정맥 주능선
좌측 능동산-천황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향한다.
능동산
조그마한 돌무더기 옆으로
경남 울주군에서 세운 표지석과 삼각점이 있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있지만
산봉우리는 짙은 운무에 가려있다
쇠점골 약수터
순한 내리막이 이어지고
도중에 푯말 아래로 줄기차게 흐르는 샘이 있다
약수터를 내려서면 능동산을 돌아가는 임도를 만난다.
공터봉
조금가다 다시 임도 우측의 능선으로 붙는다
계속 임도를 따라가면 지름길이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으로 올라선다
시야가 탁 트이는 공터.
끝없는 억새초원을 이루는 끝으로
사자봉과 수미봉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임도
능선을 따라가면 다시 임도를 만난다
능선 좌측 사면을 따라 고사리 분교까지 이어지는 임도다.
도중에 임도가 좌측으로 갈라지면서
다시 능선으로 산길이 이어지고 있다.
희미한 숲길은 이내 오르막이 끝나면서 작은 봉우리를 지나고
다시 뚜렷한 산길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다.
사자봉이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다.
1048.9봉
우측은 얼음골 하산길. 이정표만 있을 뿐..
작은 오름끝에 삼각점(동곡 492-1998 재설)이 보인다.
역광으로 비추는 억새와 함께
건너로 보이는 신불-취서산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다.
샘물상회
내리막 도중에 만나는 작은 암릉
구름과 어울려진 산군들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는데
바로 아래로 펼쳐지는 대평원
안부에 있는 커다란 건물 하나. 일명 '샘물산장' 이다
새하얀 억새 초원이 은빛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평원을 지나 그 뒤로는 사자봉이 우뚝 솟아 있다.
1980년대 가게 바로 아래 너른 터에서 목장을 운영하다
여의치 못해 10여 년 전부터 이곳에서 산꾼들을 위한
쉼터 및 민박을 하고 있다.
제법 큰 누렁이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지만
눈만 멀거니 뜬 채 힐끗 쳐다보고는 딴청을 피운다.
오댕국물을 먹으며 휴식
얼음골 삼거리
다시 순한 오르막이 이어지고
우측으로 얼음골 하산길이 있는 삼거리다.
산행안내판이 있고 계단이 이어지는 하산길
지척의 천황산이 더욱 웅장한 느낌이고,
뒤돌아보면 시원한 능선이 장쾌하다
억새평원
이름에서 연상되는 투박함과 달리 한줌 실바람이라도 스치면
가녀린 여인네의 자태마냥 서럽도록 아름다운 억새.
이 가을 한 철 화려한 나래를 펴기 위해 작열하는 뙤약볕과
세간의 무관심을 묵묵히 이겨낸 인내의 산실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장관이라 예부터 '광활한 평원의 가을 파도'라 했을까.
억새밭에 가을 햇살이 엷게 비칠 때 스쳐가는 바람결이 빚어내는
억새들의 화려한 합창은 대자연의 교향악이다.
사자봉
광활한 억새밭 사이로 이어지는 오름길은
특유의 은빛 색채를 간직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사자처럼 보이는 우둘투둘한 바위봉우리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사자봉이다.
영남알프스의 정 중앙에 위치하여 둘레산군을 이루는 산들이
모두 시야에 펼쳐지고 있으니 그 조망이 가히 환상적이다.
좌우로 펼쳐진 가지-운문-억산과 취서-신불-간월산이 길게 이어지고
지나온 능동산, 그리고 정면으로는 수미봉이 제법 암산을 이루고 있다.
갈색풀잎 사이로 키작은 용담꽃이 한창이다
바람을 피해 초원에서 점심
천황재
내리막 우측으로 조망바위에서
한눈으로 표충사를 내려다 보며 발걸음을 멈춘다.
잡석이 섞인 내리막 그리고 암릉의 연속
도중에 간이매점을 지나고
건너로는 수미봉으로 이어지는 억새밭이 운빛이다
천황재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는 털보상회
정면에는 재약산의 위용이 좌우로 억새의 군무가 장관이다.
정상에 다가갈수록 크고 작은 탑들이 곳곳에 널려있고
억새와 함께 종종 바위군을 이루고 있는 멋진 풍경이다.
/사자봉0.8km, 재약산1km, 천황산1.0km, 표충사3.4km, 배내골8km
수미봉
일명 재약산...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정상석과 바로 옆에 돌탑과 이정표
지나온 사자봉이 더욱 웅장한 느낌이고,
저 아래 사자평은 내려다보는 자체로써 그저 평화스럽기만 하다.
건너로 간월산, 간월재, 신불산, 신불평원, 영축산, 시살봉, 오룡산이
키재기를 하며 하늘금을 이루고
바로 아래로 사자평원이 황금빛을 자랑하며 화려한 군무를 선보인다
능선을 넘나드는 구름이 걷힐적마다 보여주는 파노라마
수미봉 정상은 미끈하게 생긴 거대 암봉으로 조망도 뛰어나다.
암릉을 내려서자 너덜길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로 일열로 이어지고 지체되는데
사자평 /고사리분교터.
급경사 내리막
토사는 흘러가 버리고 자갈만 남은 잡석길은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고 버티려고 발끝에 힘을 모은다
이정표를 따라 숲길로 들어서고
크고 작은 바위가 이어지는 미끄로운 길
아늑한 고사리분교가 있던 자리
1966년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로 개교하여 1996년 폐교될 때 까지
거의 1년에 1명, 30여 년 동안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삶의 흔적조차도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계곡을 거치지 않고 바로 표충사로 하산할수도 있다
층층폭포
다시 좌측 임도를 따라가다 폭포를 보기위해 우측 계단으로 내려선다.
폭포는 출렁다리를 중심으로 상단부와 하단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로는 병풍을 두른 듯한 바위절벽 가운데로
수많은 갈래의 물줄기가 층을 이루며 떨어지는 폭포
수량은 적지만 떨어져 부서지며
포말을 일으키는 폭포소리가 장관이다
다리 아래로는 높은 단애를 이루고
계곡과 골짜기의 단풍이 한 눈에 들어오는 쉼터
출렁다리를 건너면 급경사 너덜길이 시작된다
파헤쳐진 등산로는 온통 바위로 이어지는
지루하고 험한 하산길
도중에 길 아래로 샘터가 있다. 휴식
그리고 안전로프를 설치한 전망바위에 선다
흑룡폭포
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까마득한 절벽아래에 자리 잡은 흑룡폭포
이름그대로 용이 물을 박차고 꼬리를 휘저으며 하늘로 솟아오른 형상이다.
너덜 길의 힘겨움이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낀다.
다시 이어지는 위험한 너덜길은
계곡을 건너서부터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표충사0.8km, 층층폭포4.4km
표충사
경내에 들어서니 호국문화축제가 시작되고
계단을 오르면 삼층석탑이 보이고 법당이 있는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주법당인 대광전, 팔상전, 응진전, 관음전, 명부전과
누각인 우화루와 범종각 등이 있다.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보우국사와 일연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던 유서 깊은 사찰이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유적지로,
표충사 경내에는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이 있으며
이후 절의 이름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
인도가 없는 포장도로
힘든 산행길을 지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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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보우국사와 일연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던 유서 깊은 사찰이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유적지로,
표충사 경내에는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이 있으며
이후 절의 이름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층석탑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보물 제465호로 높이 7.7m의 탑.
특히 삼층석탑에서는 1995년에 이루어진 해체 보수 때에 나온
많은 유물들은 표충사의 유래와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표충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우화루와 범종각
우화루와 범종각 뒤로 보이는 산이 재약산이다
대광전
표충사의 주법당으로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대광전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본래는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하나 소실되고
숙종 때 표충사가 불에 탄 이후 다시 지어진 것이다. 단층 팔작지붕 목조 건물
관음전
관음전은 새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
관세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 보살로 현실의 구세주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
표충사 관세음보살은 다른 사찰에 있는 관음보살보다 특이하게 손이 참 많다.
관음보살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피고
중생이 괴로울 때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를 해준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으며,
정병이나 연꽃 등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아미타불의 협시불인 경우가 많고 독립상으로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이곳 표충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독립상으로 세워진 경우로
손이 많은 것은 중생들에게 여러 다양한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닐까
표충사 명부전의 시왕들
불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심판을 담당한 지옥의 왕들을 시왕이라고 한다.
7번에 걸쳐 심판을 받으며, 심판이 끝나는 날이 49일 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후손들이 조상이 죽은 지 49일 째 되는 날
조상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제를 정성스럽게 드리는 것이다.
나머지 세 명의 대왕은 49일 이후 백일간, 100일 이후 일년간, 일년
이후에는 전륜대왕이 최종적으로 지옥의 형량을 가리게 된다고 한다.
*명부시왕*
처음 7일 간은 진광대왕에게 눈이 지은 죄를 심판받고
두번 째 7일 간은 초강대왕에게 귀가 지은 죄를
세번 째 7일 간은 송제대왕에게 코가 지은 죄를
네번 째 7일 간은 오관대왕에게 혀가 지은 죄를
다섯 번째 7일 간은 염라대왕에게 몸이 지은 죄를
여섯 번째 7일 간은 변성대왕에게 듯이 지은 죄를
일곱번 째 7일 간은 태산대왕에게 속마음으로 지은 죄를
49일 이후 백일까지는 평등대왕이, 100일 이후 일년 간은 도시대왕이,
1년 이후 최종적인 형량은 전륜대왕이 심판을 한다고 한다.
팔상전
대광전 왼쪽에 있는 전각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탱화를 봉안한 법당으로 석가모니불과 탱화를 볼 수 있다.
만일루
표충사 경내에 있는 H자형의 이 건물은 철종 11년(1860)에 당시
방장이었던 월암상인이 조성한 건물이다.
48칸의 선실을 108평의 대지에 짓고 동림고사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혜원법사의 유풍을 받드는 뜻을 담고,
불교의 48월과 108번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대중들의 정진 장소로 쓰였으며,
무량수각 혹은 서래각으로 편액되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신 곳으로
속세의 잡귀가 신성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감시하고 막는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들이 양 쪽에 2명씩 큰 눈을 부릅뜨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손에는 삼지창이나 칼 같은 무기를 들고 잡귀를 쫓기 위해 서있다.
수충루
표충사의 정문인 수충문은 2층 누각으로 1층은 장초석 위에 기둥이 놓인
삼문의 형태이고 2층은 누마루가 깔린 형태로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다른 절집의 경우에는 절 입구에 이런 2층 누각은
대부분 범종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충루 2층 누각에는 범종 등의 사물은 보이지 않았다
<천황산과 재약산의 지명>
1189m봉은 천황산, 천왕산, 아니면 사자봉
영남 알프스의 여러 산봉 가운데 지명과 관련된 논란이 가장 큰 것이
광대한 억새밭 사자평을 가진 재약산이다.
이 산릉의 북쪽에 1189m봉이, 남쪽에는1108m봉이 솟아 있으며, 현재 북쪽 봉에 ‘천황산’,
남쪽 봉에 ‘재약산’이라 한자로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원래는 이 산 전체가 재약산이고, 천황산은 따로 없으며, 1189m봉은 사자봉,
1108m봉은 수미봉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
이 산이름 시비에 대해 <영남 알프스>에서 저자 황계복씨는 여러 근거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재약산이란 이름은 영정사 창건 연기(緣起)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24대 흥덕왕의 세째 아들이 이 산의 약수를 마시고 고질병이 나은 뒤
‘약수를 갖고 있는 산’이라 하여 재약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의 고지도 동람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을 보면 재악산으로 표기돼 있다.
물론 신라 때 재약산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재악산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천황산이란 이름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그들의 천황을 받들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18세기 중기의 좌해분도, 18세기 말의 해동도 등 여러 지도를 살펴보면 천왕산이라 표기돼 있다.
그러므로 일제에 의해 천황으로 지명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속리산 천황봉 같은 경우는 일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지명이다.
일제 때의 조선국세견전도에도 재악산이라 표기돼 있다.
그러므로 여러 고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마친 뒤 이 1189m봉의 지명을 확정지어야 할 것이다.
천황산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 사실일까.
그래서 재약산으로 다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타당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천황산은 수백년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고유의 산이름인 것이다.
때문에 일제가 붙였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는 낭설인 셈이다.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는 지난 98년 울산에서 발행된 울산향토사연구회 향토사보 제9집에서
'천황산일식명설의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천황산이
우리 고유의 산명인 천왕산에서 유래되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들어 규명했다.
그에 따르면 천왕산은 조선조 영조 36년(1760년)에 만들어진 전통지리화인 여지도에
석남사 석골사 등과 함께 분명히 그 이름이 올라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 성균관에서 복사한 여지도 밀양부 사본을 논문에 첨부했다.
다만 그 천왕산이 천황산으로 바뀐 것은 1887년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왕의 칭호를 황으로 고쳐 부른 것과 같은 논리라고 설명한다.
이는 속리산의 천왕봉이 천황봉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밀양시에서도 지난 2002년 6월 일부 산악인들이 세워놓은
재약산 사자봉 정상석을 철거하고 새로이 만든 천황산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이렇듯 천황산의 명칭문제가 이유수씨 노력으로 일단락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심지어 전문 산악지조차도 천황산이라는 산명을 빼버린 채 여전히 재약산 사자봉으로 취급하고 있다.
잃어버린 우리 것을 되찾는 것도 중요하고 그에 따른 열정도 존중받아야겠지만
냉철한 분석없이 접근한다면 이 같은 우를 다시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걸음에 달려가 천황산을 꼭 껴안아 보고 싶은 이유다.
-진용성-
추론:
1. 신라 때 재약산이라 부름
2. 16세기 후반의 고지도 동람도(東覽圖),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을 보면 재악산(載岳山)으로 표기
3. 조선조 영조 36년(1760년)에 만들어진 전통지리화인 여지도- 천왕산으로 표기
4. 1887년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왕의 칭호를 ‘황’으로 고쳐 부른 것과 같은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