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알' 낳는 소나무를 싹뚝? 분통 터진다

강릉시 구정리 골프장 반대대책위 부위원장 조승진씨
강릉시청 현관 옆 노숙농성장. 17일자로 122일째 농성이 되고 있었다. 그 사이 시청과 관변단체들로부터 몇 차례 철거 요구를 받았다.
ⓒ 성낙선
강릉시청

강릉에 갈 때마다 반드시 보게 되는 건물이 있다. 영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마주치는 건물, 강릉시 시청 청사다. 도로 왼쪽 언덕 위로 높게 솟은 18층 건물이 자못 위풍당당하다. 그 건물을 올려다보면 강릉시의 발달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릉 시내는 또 얼마나 거대한 건물로 가득할 것인가, 짐작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발달상이 시청 청사를 지나치면서부터 종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강릉시에서 왜청사로 이처럼 거대한 건물을 지어 올렸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뿐, 경포해변이나 경포대, 선교장 등으로 핸들을 돌린 사람들은 곧 그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먼 거리를 달려 휴식 취하러 온 마당에 위압적인 현대식 건물을 머리에 계속담아둘 이유가 없다. 그런 마당에 강릉시청 높은 건물 아래 120일 넘도록 비닐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기 어렵다. 그들이 왜 그곳에서 노숙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까닭이 없다.

게다가 그 비닐 천막이 시청 청사와 어떤 관련 있는지는 더더욱 알기 어렵다. 하지만 강릉시에서 그 비닐 천막은 많은 걸 상징한다.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상징이다. 청사 1층 현관 옆 기둥에 대충 붙잡아 맨 비닐 천막이 한겨울 찬바람을 맞아 심하게 떨고 있다.

그 광경이 시청 청사로 대변되는 거대한 권력과 비닐 천막으로 상징되는 주민 생존권이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골프장 속에 버려진 주민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강릉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조승진 부위원장.
ⓒ 녹색연합
조승진

이곳에 비닐 천막을 세운 사람들은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주민들이다. 마을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걸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다 지난해 10월 18일 "이렇게 몸을 던져서라도 해결해야겠다"는 판단에 시청 코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골프장 건설에 반대해 싸움을시작한 지 4년째 되던 해다.

구정리 주민들은 골프장 문제가 표면화된 2008년 겨울에만 강릉시청 앞에서 60회 집회를 가졌다. 그 이후로 시청에 골프장과 관련한 온갖 문제점을 다 지적했지만, 주민들의 목소리는 어느 것 하나 올바르게 반영되지 않았다. 시장은 물론이고 도지사와 한 약속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믿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몸'에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비닐 천막은 찬바람이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해 비닐 끝자락에 돌멩이를 달아 눌러 놓았다. 그렇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천막 전체가 들썩이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천막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그런 곳에서 대부분 육순이 넘은 마을 주민들이 17일 122일째 노숙하고 있다.

한겨울 아랫목 절절 끓는 방에 누워 있어도 시원찮을 양반들이 얼음장만큼이나 찬 대리석 바닥 위에 누워 122일을 버텼다. 그러다 보니 몸이 성한 사람이 드물다. 농성 주민들 대부분, 위장병이나 당뇨, 고혈압 같은 병들을 앓고 있다.

지난 17일, 그 바람 소리 요란한 천막 안에서 구정리 골프장 반대대책위 부위원장인 조승진(49)씨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새파란 나이에 속한다. 젊어서 한창 농사를 짓는 데 써야 할 힘을 어쩌다 보니 농성을 이끌고, 시청 공무원이나 골프장 사업자와싸우는 데 쓰고 있다. 그 역시 '젊디젊어서' 가능한 일이다.

조씨 말에 따르면, 구정리 주민들이 강릉시를 상대로 이토록 오래, 이처럼 질긴 싸움을 벌이는 데는시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 개발'이 주민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씨를 비롯한 구정리 주민들이 마을에 골프장이 들어설 거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가장 크게 분노한 것은 그 같은 계획이 자신들의 삶이나 미래 같은 것은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조씨는 "골프장 사업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라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닌데, 그런 사업자를 위해 최명희 강릉시장과 시청 공무원들까지 나서서 '도시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데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구정리에 들어서는 골프장 강릉CC의 사업자인 ㈜동해임산은 삼천리그룹의 양대 주력사 중 하나인 ㈜삼탄의 계열사다. 삼탄은 2010년 매출액만 1조9731억 원인 데다 영업이익률만 38.96%를 기록한 초우량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소나무 향기 짙었던 마을이 골프장 속 외로운 '섬'으로

구정리 강릉CC 조감도. 노란선 안이 골프장 건설 예정 부지.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 왼쪽이 마을 주민들이 사는 곳이고, 오른쪽은 청학사라는 절이 있는 곳이다.
ⓒ 녹색연합
구정리

구정리에 들어서는 골프장은 현장 도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마을 머리 위에 진을 친 골프장이 마치 먹이를 덮치는 거미처럼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듯 발을 뻗어 내리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골프장이 마을을 포위하듯 에워싼 형태다. 그 형세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조씨는 "사업자가 이런 형태로 골프장을 짓겠다는데 시청이 무슨 생각으로 동의해주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골프장 티박스에서 주택까지 거리가 겨우 2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잔디밭에 뿌리는 농약이나 비료는 물론이고 자칫 잘못하면 돌덩이 같은 골프공들이 집안으로 날아들 수도 있는 거리다.

조씨는 시청이 이런 식의 골프장 건설을 허가한 것은 주민들이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전혀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분노했다. 안전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생존권 역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정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전체 면적의 80~90%가 산지다. 그동안 소나무숲이 우거진 산에서 상당한 소득을 거두며 살았다.

이곳은 한때 구정리 영농조합법인에서 지키던 땅이다. 이제는 구정리 주민들조차 출입이 금지됐다.
ⓒ 성낙선
구정리

조승진씨는 소나무숲이 골프장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이 그동안 이 일대 소나무 숲에서 거둬온 수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처지가 되었다고 하소연했다. 조씨에 따르면, 구정리 주민들은 골프장 예정지 너머 소나무숲에서 매년 2억 원에서 3억 원가량의 송이를 수확해 왔다. 마을 주민들이 국유림을 관리해 주는 대신 그곳에서 나는 송이 등의 임산물을 채취할 권리를 가진 것이다.

런데 골프장이 들어서게 되면서 주민들이 '송이밭'으로 들어가던 길목이 차단됐을 뿐만 아니라, 설사 송이를 수확하게 된다고 해도 골프장에서 날아온 농약과 비료가 송이에 미칠 악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정리 주민들은 송이를 수확하는 것과 더불어 산에서 산나물이나 장뇌, 표고 등을 재배해 소득을 올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 역시 실행에 옮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마을이 골프장 안의 '섬'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데다 마을의 주요한 소득원 중 하나를 잃게 된 것 못지않게 안타까운 일은 수십만㎡에 달하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일거에 밋밋한 잔디밭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구정리는 소나무가 무척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위엄 있는 자태로 서 있는 풍경이 이 마을이 결코 예사로운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마을 입구뿐만 아니라 한겨울인데도 숲 전체를 파랗게 뒤덮은 소나무 군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만든다. 강원도, 그것도 '솔향'이라 이름 붙인 강릉시가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큰 가치를 가진 숲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사실 마을 주민들에게 이 소나무숲은 지금도 골프장이 가진 가치를 능가한다. 그 소나무숲이 골프장 건설로 하루아침에 파괴될 위기에 놓이게 됐다. 오랫동안 소나무숲을 지키며 소나무와 함께 살아온 주민들로서는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없다. 그런데 주민들이 이 소나무숲을 지킬 방법은 없었을까? 그런 방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소나무숲은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다. 일정 연령대를 넘은 소나무숲은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연령대가 41살에서 50살에 해당하는 소나무를 5령급이라고 하는데, 그 나이에 속하는 소나무숲은 원칙적으로 개발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산림청에서는 10년 주기로 '임상도'를 작성한다. 그 임상도에는 특정 지역 소나무의 분포와 나이도 기록이 되어 있다.

따라서 임상도를 확인하고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의 나이를 파악하면 숲을 살릴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구정리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강릉시청 역시 당연히 산림청에서 제작한 최신의 임상도를 참고해 구정리의 소나무숲이 개발 가능한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황금알' 낳는 소나무숲,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구정리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소나무들.
ⓒ 성낙선
구정리

강릉시청은 토지적성평가 과정에서 사업자가 제출한 임상도의 적실성을 검토했다. 그런데 강릉시청은 사업자 측이 제시한 임상도를 별다른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구정리의 나무숲이 5령급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골프장을 건설하는 데 걸림돌이 될 요소 하나를 제거해 주었다.

그러나 사업자가 2008년 당시 강릉시청에 제출한 임상도는 최근에 작성이 된 임상도가 아니었다. 사업자는 당시 가장 최근 시점에 만들어진 96년도판 4차 임상도를 놔두고, 그보다 10년 전에 작성된 86년도판 3차 임상도를 가져다 쓰면서 소나무들의 나이를 10년 이상 낮춰 잡았다. 게다가 86년 이후의 소나무 나이는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는 배짱을 보였다.

당시 강릉시청이 왜 최신 자료를 놔두고, 하필이면 그보다 10년이나 더 오래된 낡은 자료를 가지고 토지적성평가를 승인했는지 그 속셈을 다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결과 골프장으로 개발이 불가능한 숲을 한순간에 개발이 가능한 숲으로 뒤바꿔 놓은 것만은 속일 수 없게 됐다.

강릉시청은 그 후로 언제 적 임상도를 사용했는지를 검증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말을 바꿨다. 최신 자료를 사용했다는 주장을 계속했지만, 결국 2009년 국정감사를 통해 "강릉CC의 임상도는 적법하지 않으며 그 책임은 강릉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주민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시청에 여러 차례 해명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강릉시청은 그 후로도 여전히 행정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구정리 소나무숲. 이 멋진 숲이 이제 잔디밭으로 바뀔 위기에 놓여 있다.
ⓒ 녹색연합
구정리

구정리의 소나무숲은 '소나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가졌다. 그 가치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조승진씨는 골프장 예정지 내의 소나무는 대략 6만여 주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씨는 강릉시 내 조경업자에게 문의한 결과, "이곳 소나무들의 가격이 한 그루에 대략 150만 원에서 200만 원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그 계산대로 하면, 이곳의 전체 소나무 가격은 천억 원대에 가깝다. 그런데 동해임산이 구정리에 18홀 규모의 골프장을 건설하는 데 투입하는 총사업비가 딱 1058억 원이다. 그러다 보니 강릉시 시민들 사이에서는소나무값만으로 골프장 하나를 짓고도 남는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소나무 전체를 제값을 받고 다 팔았을 때 가능한 얘기다.

동해임산은 한때 소나무 가격 문제로 논란이 일자, 구정리 소나무들은 골프장 조경에 쓰겠다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소나무를 골프장 조경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동해임산은 공사가 본격화되면, 숲에서 뿌리째 굴취한 소나무들을 어디론가 반출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강원도, 그것도 소나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강릉시에서 소나무는 결코 가볍게 다룰 대상이 아니다. 강릉시는 한때 이곳의 소나무숲을 그대로 보전해 '치유의 숲'으로 가꿀 계획이었다. 그 계획대로였다면, 구정리 소나무숲은 '솔향 강릉'을 구체화하는 숲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획이 어느 순간, 골프장 유치 사업으로 바뀌었다.

강릉시청에 최명희 시장이 들어서고 나서 이런 식으로 파괴된 소나무숲이 여의도 면적의 2배나 된다는 보도(<시사IN> 206호)도 있었다. 소나무 굴취 사업이 돈이 되는 사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소나무를 매개로 거액의 돈이 오가다 보니, 강릉시에서는 소나무와 관련한 비리로 고위 공무원들이 옷을 벗거나 구속이 되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동해임산에서 강릉CC 골프장 건설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고병식 본부장은 한때 최명희 강릉시장의 선거 회계 책임자로 일했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때 최명희 시장의 핵심 측근이었던 사람이 이 골프장 사업의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기다려달라"는 말, 그 말에 자꾸 뒤통수 맞는 주민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구정리 주민들은 이제 강릉시청과 강원도청의 공무원들을 상대하는 일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편에 있지 않고 알게 모르게 사업자 편에 서 있는 걸 보면서 진저리를 치고 있다. 그런 마당에 강릉시장을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고, 지난해 4·17 재보궐 선거를 통해 새로 강원도 행정을 책임지게 된 최문순 도지사를 만나고 나서도 애초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주민들은 선거가 끝난 뒤, 최문순 도지사로부터 '자신이 도지사로 있는 이상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새로 골프장 허가를 내주는 일은 없다'는 약속을 받아 놓았다. 하지만 지난 해 11월 3일, 이틀 전 도청에서 마지막으로 실시계획인가를 내주면서 구정리 골프장이 최종적으로 허가가 떨어진 것을 알고 나서는 심한 배신감에 젖었다.

강원도청은 나중에 이 사안을 담당 과장이 전결로 처리하는 바람에 달리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담당 과장은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드러나 있지 않은 사안을 가지고 결재를 계속 미룰 수만은 없었다고 했고, 도청은 결과적으로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에 당황했다.

그 일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떠나서 주민들은 심한 허탈감에 빠졌다. 주민들로선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셈이었다. 그동안 골프장 건설을 막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강릉시와 싸워온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에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11월 5일 주민 60여 명이 도청을 항의 방문했다. 하지만 도지사는 만나지 못하고 주민 5명만 집시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마을 주택가에 바투 붙어 있는 방음판. 골프장이 마을을 가둔 형국이다.
ⓒ 성낙선
구정리

문순 도지사 역시 골머리를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주민들과 여러 차례 만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꽤 고심을 한 흔적도 보인다. 하지만 주민들과의 냉랭한 관계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계속 꼬이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주민들은 이제 도지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강원도청은 지난 1월 5일 구정리 골프장과 관련해 자체 감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감사관실과 주민들은 감사단에 '명예감사관'등 민간인을 포함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도청에서 골프장 업무를 맡고 있는 투자유치과에서는 명예감사관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지만, 감사관실에서는 감사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명예감사관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받아쳤다.

여기에 강릉시와 동해임산 역시 민간인 등 외부 인사가 포함된 감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들었다. 결국 도청은 명예감사관이 없는 상태에서 '문서감사'를 실시했다. 주민들은 도청의 그런 태도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현장감사' 없이 문서감사만으로 제대로 된 감사가 이루어질 리 없으며, 명예감사관 없이 공무원들만으로 실시한 감사가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승진씨는 '강릉시청이나 도청에서 자신들을 믿고 기다려 달라'는 말에도 심하게 반발했다. 그동안 믿고 기다려준 결과, 골프장 사업자측이 현장을 훼손하고 공사를 할 수 있는 시간만 벌어준 게 아니냐는 의문을 품고 있다. 지난 10일 문서감사가 끝나자마자, 골프장 측은 바로 공사를 재개했다. 그리고 주민들은 다시 문서감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마을을 둘러싼 방음판, 길 막고 담 쌓고 대화하자고?

공사장 안으로 장비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트랙터와 골프장 반대 깃발.
ⓒ 성낙선
최명희

지금 구정리의 소나무숲에서는 임목 제거 등의 공사를 벌이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조승진씨는 한층 더 불안해진 기색이다. 그는 요즘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기자와대화 나누던 중에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이 이상 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공사장 펜스로 둘러싸인 걸 본 뒤로 심정이 더 착잡해졌다며, 때로 감정이 격해져 울분이 치민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주민들 사이에서 농성이나 단식으로 안 되면 이제 누군가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상황이 점점 더 극단으로 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대책이 가능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구정리 주민들에게 소나무숲이 존재하지 않는 마을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숲이 파괴되는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 그 고통이 주민들에게만 집중돼 있는 것도 그들을 힘들게 만드는 요소 중에 하나다. 숲을 보전하는 일은 그 지역 주민들의 일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주민들 손에만 맡겨 놓았던 것 역시 큰 문제다.

누군가 그 짐을 나누어 갖는다면 그 고통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골프장 난개발로 강원도 주민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 되새겨볼 때다. 조씨는 대화 중에 이 싸움을 빨리 끝내지 못한 데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처음에 이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고 했다.

강릉시에서는 지금까지 시가 펼치는 행정에 주민들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주민들이 몇 번 집회를 가지고 나면 어느 정도 해결의 기미가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올해로 5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는 지난 17일자로 비닐 천막 농성을 122일째 하고 있고, 지난달 말일부터는 주민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릴레이 단식농성을 16일째 계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모두 조씨를 분노하게 만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유다. 조씨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문서감사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지만,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로 비추어볼 때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현재 골프장 사업자는 도지사 직속으로 있는 강원도골프장민관협의회의 현장조사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골프장 공사 현장을 둘러보러 갔다가 현장 관계자들이 길을 막는 바람에 공사장 안쪽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한 채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동해임산이 공사를 벌이기 위해 마을 주택가 주변에 설치한 하얀 색 방음판만 자꾸 눈에 밟혔다. 동해임산은 주민들더러 자꾸 대화를 하자고 하는데 그렇게 '길'을 막고 '담'을 쌓고서 어떤 대화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소나무숲 주변만 맴돌다 돌아온 뒤, 조승진씨는 여기 저기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공사가 진행 중인 걸 재차 확인하고 나서는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당장 '특단의 대책'을 내놓기 위해 주민회의를 열기로 했다. 상황은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 강원도청에서는 '기다려달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 강릉시청에서는 오늘 또 무슨 일이 있어날지 알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외부인 출입을 막는 안내문. 근처에는 감시원이 항상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 성낙선
강릉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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