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제호(題號) 글씨와 그 이력서(履歷書)

 

신문의 제호(題號)는 바로 그 신문의 얼굴이다.

독자는 자기가 선택한 제호에 모든 신뢰를 걸고 하루의「뉴스」를 읽게 되는 것.

그럼 신문의 얼굴인 그 제호들은 누가 썼을까? 당대의 명필들의 글씨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몇 십 년 제호에 익숙한 독자라도 그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거의 모른다. 연륜이 오래된 신문사인 경우 그 신문사의 사장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게 바로 제자(題字)를 쓴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처럼「베일」속에 감추어 있는 글씨의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일까? 오는 7일은 제13회 신문의 날 - 아득히 잊혀진 제자의 주인공들을 찾아가보자.
현재 서울에서 발간되는 전국 독자를 대상으로 한 종합일간지는 모두 8개. 이중 대한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의 3개지가 한글제자를,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신아일보가 한문제자를 쓰고 있다.
글씨체는 거의가 궁체 아니면 예서(隷書). 광범위한 독자층을 상대로 하다 보니 알기 쉽고 눈에 잘 띄는 체를 골라 쓰게 된 것이다. 제자 뒷배경으로 쓰인 무늬로는 한반도가 들어간 것이 동아일보, 대한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5개지, 무궁화를 무늬로 넣은 것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2개지, 횡선(橫線)을 사용한 신문이 대한일보, 서울신문, 신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의 5개지이며, 경향신문만은 아무런 무늬 없이 흰 배경이다. 신아일보는 횡선뿐.
횡선에 한반도를 넣은 신문이 대한, 조선, 서울, 한국 등 4개지로 제일 많고, 동아, 중앙이 무궁화무늬다. 제호는 한반도와 무궁화와 횡선을 가장 좋아하는 모양.
 
제자를 쓴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분들로 역사가 오랜 동아, 조선은 이미 고인이 된 김돈희(金敦熙)씨, 오세창(吳世昌)씨가, 그리고 해방 후의 신문제자는 주로 김충현(金忠顯)씨, 안종원(安鐘元)씨, 이철경(李喆卿)씨 등이 많이 썼다.

 

[조선일보(朝鮮日報)]
위창(葦?) 오세창(吳世昌)씨의 글씨다. 1920년 창간 당시 방응모(方應模) 사장이 직접 오세창씨를 찾아 부탁, 아무런 보수 없이 써준 것이다.
하루는 소전(素?) 손재형(孫在馨)씨가 위창댁을 찾아가니 4, 5개의 제자를 놓고『어느 것이 좋은가 골라 내라』고 하여 소전이『이왕이면 다 신문사로 보내시지요』하였더니 위창은『그러면 신문기자들이 보나마나 이것저것 좋은 글자 골라서 오려 쓸 터이니 안된다』하면서 하나를 골라 보겠다고. 그 후 야간 개칠이 되어 현재까지 쓰여지고 있다.
창간 당시 관여했던 인사들이 모두 작고(作故)하거나 납북되어 신문사 자체기록엔 제자를 누가 썼는지 밝혀져 있지 않고 심지어 몇 십 년을 근속한 고위간부 되는 분도 모르고 있는 실정.해방 후 신문판형이 바뀌거나 단수(段數)가 조정될 때마다 그 크기는 바뀌었으나 글씨는 여전히 오세창씨의 것.
 
[경향신문(京鄕新聞)]
 
1946년 10월 창간 당시 편집국장이던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씨가 당대의 명필 안종원(安鐘元)씨에게 부탁, 제자를 받아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경향(京鄕)」은 원래 교황청 기관지인「우르비·엣·오르비」의 의역(意譯)으로 초대사장인 양기섭(梁基涉) 신부가 정한 것.
창간 당시부터 현재처럼 무늬없이「京鄕新聞」의 네 글자만 박아 넣어 쓰다가 4·19 이후 이준구(李俊九)씨가 사장이던 한때 볏잎 무늬를 넣어 썼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창간 당시로 되돌려 현재와 같이 무늬 없이 쓰고 있다. 개칠을 너무 많이 해서 제자의 원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에 최근 창간 당시의 신문에서 제자를 복사해서 원래의 모양을 다시 찾았다.
창간 당시 관여했던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글에 의하면 제자를 오세창씨가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소전 손재형씨는 안종원 오세창 양씨에게 부탁, 안씨의 것을 썼다고 한다.

 

[서울신문]
우리나라에서 한글제호를 제일 먼저 쓰기 시작한 게 바로「서울신문」이다. 그러나 제호의 운명은 무척 기구해 역대 고위간부가 바뀔 때마다 제호의 글씨와 모양도 바뀌어 왔다.
그 동안 김충현(金忠顯)씨 등 수많은 명필들이「서울신문」이란 제호를 써왔다. 그러다가 1966년 7월 8일자부터 한글 궁체의 제1인자로 알려진 이철경(李喆卿)여사의 정성 어린 글씨를 받아 오늘날까지 계속 써오고 있다.
지금 쓰이고 있는 글씨는 1점 1획의 수정이나 가필 없는「텍스트」그대로이다. 장태화(張太和)사장을 비롯한 간부진은 제자에 여간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문화부 기자는 거의 열흘 동안 딴 일은 못하고 이철경여사와 제자에만 매달렸다는「에피소드」도.
이여사는「서울판」「전남판」하는 10개 지방판의 제호 글씨도 또한 썼다.
 
[한국일보(韓國日報)]
「태양신문(太陽新聞)」을 인수, 약 20일 그대로「태양신문」제호를 사용하다 창간한 해인 54년 6월 9일자부터「한국일보(韓國日報)」로 개칭.
약 1년간「韓國日報」로 그대로 쓰다가「한국일보」로 한글로 바꾸면서 독자들에게 제자를 공모했다. 현재 쓰고 있는「한국일보」의 제자는 바로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현상응모서 당선된 사람의 이름은 확인할 길이 없다.(동사(同社) 조사부 보관사사(保管社史)나 사고(社告)철에 남아 있지 않음)
어쨌든 이 현상 당선된 제자를 사장인 장기영(張基榮)씨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씨에게 들고가 신문에 어울리게 가필한 것이 오늘날 한국일보의 제자다.
자매지인「주간(週間)한국」은 제자는 창간 당시 김기승씨에게 씌운 것을 오늘까지 계속 써오고 있다.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보다 창간이 약간 늦은「동아」는 원래 설립자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씨가 朝鮮日報로 제호를 내정했다가 조선일보에 빼앗기는 통에「동아(東亞)」를 채택, 전 동남아를 상대로 한 신문을 만들겠다고 기염이 대단했단다.
글씨는 인촌이 직접 당대의 명필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선생(작고)에게 부탁, 몇 차례 왔다갔다한 끝에 현재까지 쓰고 있는 글씨로 결정되었다. 김돈희선생의 수제자인 소전 손재형씨의 말을 따르면 김돈희선생은『근대 한국의 제1의 명필』이었다고.
김돈희선생이「東亞日報」의 넉 자를 일부러 멋을 살려 좀 삐뚜름히 썼더니 신문사측에선「곤란하다」고 난색을 보여 5, 6회 다시 썼다고 한다. 인촌선생은 김돈희선생의 글을 받았다고 좋아하는가 하면 김돈희선생은「동아」의 제자가 자기 글씨라 서로 좋아하기도.
 
[중앙일보(中央日報)]
65년 9월 22일 창간 두어 달 전부터 김충현씨에게 부탁 받아 썼다. 당시 삼성(三星)의 모비서가 10여 차례 돈화문 앞 김충현씨가 차린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드나들며 몇 차례 받아갔다가 다시 쓰고 한 무척 힘이 든 글씨다.
마지막 김충현씨가 써준 5개의「中央日報」제자 중 몇 개에서 집자(集字)해 썼을 것이라는 게 김충현씨의 의견. 김충현씨는「중앙일보」제자 외에 2개의 휘호(揮毫)를 창간 축하인사로 써주었는데 중앙일보측에선 양복감 한 벌과 10만원을 사례로 보내왔다고.
창간 당시부터 동아일보에 의식적으로 신경을 써온 동사에서는 제호의 무늬도 동아일보가 쓰고 있는 무궁화무늬를 쓰기로 결정. 동아일보가 무궁화에 둘러싸인 한반도를 그려 넣은 대신 중앙일보는 무궁화무늬만을 넣고 한가운데 한반도 모양의 흰 공백을 두고 있다.

 

[대한일보]
 
1960년 10월 19일「평화신문(平和新聞)」을 그대로 이어받아 4개월간 쓰다가 61년 2월「대한일보(大韓日報)」로 게재하면서 김충현(金忠顯)씨에게 제자를 부탁, 계속 써왔다.
그러다가 66년 8월, 한글로 바꾸면서 한글 궁체의 1인자 이철경여사에게 글씨를 받아왔으나 획이 섬세하고 가늘다 해서 동사 사장인 김연준(金連俊)씨가 가필(加筆), 획을 굵게 고쳐서 썼다. 그러니까 이철경씨의 글씨도 아니고 김연준씨의 글씨도 아닌 제호를 약 6개월간 써오다가 동사 전무이며 한글학회이사인 한갑수(韓甲洙)씨가 쓴 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제호이다.
한갑수씨의 경우도 5, 6회 글씨를 써서 직접 동판을 떠서 인쇄해 보고 효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쓰곤 했다. 그러니까 외부인사 아닌 사내 식구에게서 제자를 받아 쓰고 있는 것은「대한일보」단 하나뿐.
 
[신아일보(新亞日報)]
너무 갑자기 창간준비를 서두르다 보니 제자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단다. 장기봉(張基鳳)사장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아마추어」서예가 이(李)모교수가 장사장의 청탁을 받고 써준 것이 창간 당시 신아일보가 쓰던 것.
65년 5월 6일 창간 후 약 한 달 동안 이 글씨를 그대로 써오다가 너무 획이 약해 얼핏 눈에 뜨이지 않는다 하여 당시 동사 조사부 차장이던 장상섭(張相燮)씨(현재 문화부 차장)가 이교수의 글씨를 더 굵게 가필한 것이 지금 쓰이는 신아일보의 제자 바로 그것이다.
장상섭씨는 기자이면서 한때 교편을 잡은 바 있어 도안(圖案)엔「프로」급 이상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신아일보 제자는 이모교수와 장상섭씨가 합작해 만들어 놓은 셈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4/6 제2권 14호 통권 제2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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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에게 자문해준 조선 최고의 눈

한국 근대 미술계의 거벽 위창 오세창

/황정수(aubrey)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다방면에 많은 재능을 가진 인물로 역사의 격변기에 변화의 중심부에 있었던 시대의 어른이었다. 그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근대화 과정의 격동기에 개화사상을 공부한 지식인으로서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조국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천도교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서예와 전각의 명인으로서 예술계의 좌장 역할을 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한국의 서화사를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미술사에 많은 업적을 나타내었다.

 

▲ 정인당. 오세창 초상화 ⓒ 황정수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주역

오세창은 역관인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아들로 8대를 이어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이었다. 8세 때부터 부친을 따라 개화파 한의학자 유대치(劉大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살 때 역과에 합격하여 사역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의 기자로도 활동한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도쿄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를 지낸 후 1년 뒤 귀국하였으나,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설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한다. 망명 기간 동안 서화와 전각에 전념하였으며, 운명적으로 손병희, 권동진 등을 만나 천도교에 귀의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귀국하여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를 창건하고, 기관지인 '만세보' 사장에 취임한다. 1907년에는 '대한협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대한민보'를 발간하였다. 또한 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도 참여하는 등 문화 계몽운동에 늘 앞장섰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오세창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1919년 3.1만세 운동에 손병희, 권동진 등과 천도교의 대표로 참여하여 3년여의 옥고를 치른다. 이후 6․10만세 운동과 신간회의 활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세창은 이후에도 친일로 전향한 최린 등 대다수의 천도교 지도층과 달리 천도교를 지키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다.

암울한 36년을 견디어 낸 그는 82세의 고령으로 해방을 맞는다. 많은 이들이 반민특위에 회부되어 친일의 죄과를 물었으나, 그는 변절과 친일의 과거가 없는 민족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오히려 반민특위 재판장에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현판 글씨를 쓰는 기개를 보인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에는 일본에 빼앗겼던 '옥새(玉璽)'를 민족대표로서 되돌려 받는 역할을 한다.

심전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오세창이 살았던 집은 돈의동 45번지였다. 탑골공원 근처, 지금의 종로 3가 지하철역 있는 곳이다. 지금은 근처가 개발되고 집 앞 개천도 복개되어 그때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다행히 그 흔적을 조금이나마 추정할 수 있는 그림이 한 점 남아 있어 아쉬움을 던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린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가 바로 그것이다.

'탑원(塔園)'은 오세창 집이 탑골공원 근처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 105평의 땅에 지은 한옥이었는데, 집이 크고 정원이 넓었다. 해마다 정초에 그의 집에는 여러 친구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시·서·화를 즐기곤 하였다. 1912년 정초에는 안중식 등 모두 8인이 모였다. 이들은 새해를 기념하여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며 시회를 가졌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설날이 되기 전 집집마다 세주를 담가, 설날 아침에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세주 가운데 특히 '도소주'가 유명하였다. 음력 정월 초하루인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면 1년 동안 사악한 기운이 없어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도소(屠蘇)'라는 말은 '소(蘇)'라고 하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라 한다.

'탑원도소회지도'는 아름답고 격조 있는 그림이다. 조그만 화첩 그림이나 구성이 잘 짜여 있고, 수묵의 번짐이나 채색한 솜씨가 자연스럽다. 우측에 보이는 탑은 '원각사십층석탑'이다. 달빛 아래 아스라이 보이는 하얀 탑신이 정초 달밤의 정취를 더욱 고조시킨다. 집 앞의 호수처럼 보이는 물은 오세창의 집 앞으로 흐르던 개천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정자 안에는 여덟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한잔하며 달빛을 즐기고 있다.

오세창, 고희동의 '연북향남'

오세창의 집에는 평소에도 자주 친구들이 모였다. 주로 시에 능한 문인이나 서화가들이었는데 시회를 즐기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 그와 자주 어울렸던 사람들 중에 특히 서화가가 많았다. 고희동, 박한영, 이도영, 최남선, 이기, 심인섭, 윤희구, 안종원, 김돈희 등이 자주 찾는 친구들이었다. 간혹 조카 오일영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1924년경에는 최남선, 박한영, 고희동과 자주 만났다. 그때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한 점 전한다. 제목을 '연북향남(硏北香南)'이라 하였는데, 그림은 고희동이 그리고 오세창이 화제를 썼다. 서양화를 공부하여 인물화에 능했던 고희동이 인물들의 특징을 잘 그려, 대략 보아도 인물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다.

왼쪽부터 고희동, 박한영, 최남선이 차례로 있고, 가장 우측에 오세창이 앉아 있다. 바닥에 종이와 필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회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측에 매화 화분과 향로가 있는 모습이 당대 서화가들의 방안 모습을 추측케 한다. '남쪽에 벼루가 있고, 향로가 북쪽에 있다'는 화제의 내용과 그림이 똑 같다.

미술사가로서의 모습

▲ 오세창. 근역서화징 광고지. 1928년. 계명구락부 ⓒ 황정수


오세창은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한 부친 오경석으로부터 이어받은 고서화 감식안으로 많은 명품을 수집하였다. 오세창은 수집뿐만 아니라 한국 고미술의 정리에도 관심이 많아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조선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집성하여 한국 인장 역사의 체계를 잡았다. '근역인수'에는 자신의 것 225개를 포함하여 총 850명 3,912과(顆)의 인장이 실려 있다.

한편으론 편지글을 중심의 옛 글씨를 모아 통사적으로 엮어 '근묵(槿墨)'을 만들기도 하였고, 박영철의 요청에 따라 조선시대 서화를 모아 편집하여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畫彙)'를 제작하였다. 이들 자료는 한국미술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만일 오세창의 연구와 그가 편집한 서화 자료 모음집이 없었더라면,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고통스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또한 간송 전형필이 사재를 털어 고미술을 사들일 때에도 자문 역할을 하는 등 그의 감식안은 '조선 역사 이래 최고'라 불렸다.

전각가, 서예가로서의 면모

▲ 오세창의 전각 실인과 ‘근역인수’의 한 면 ⓒ 예술의 전당


오세창의 예술가로서의 대표적인 모습은 역시 '전각(篆刻)'에 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전각가였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많은 서화가들이 오세창이 새긴 인장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전각이 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으나, 후대에 들어 강세황, 김홍도, 김정희 등 중국 미술에 정통한 뛰어난 미술인들이 나타나며 많은 발전을 한다.

특히 김정희의 문하에 있던 김석경이나 오창열, 오규일 부자는 매우 빼어난 전각가였으며, 정학교의 명성 또한 매우 높았다. 근대기에 활동한 오세창은 이들 조선시대 전각가의 기법을 잇는 한편,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 전각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전각의 폭을 넓혔다. 일본인 서화가들 중에도 오세창의 전각을 사용하는 이가 많았다.

 

▲ 오세창. 묵죽도와 서예작품 ‘서(恕)’ ⓒ 예술의 전당, 황정수


오세창의 서예나 문인화 또한 전각 못지않게 뛰어났다. 전각의 기본이 전서, 예서인 까닭에 그 또한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독특한 글씨나 와당, 고전(古錢), 갑골문 형태의 글씨는 독창성이 매우 뛰어나 '위창체', '오세창체'라 불렸다. 또한 대나무나 난초 등을 소재로 한 수묵화도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루었다.

어느 날 아주 손바닥보다 작은 글씨 하나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1942년 초여름, 79세 때에 쓴 것으로 내용은 '용서할 서(恕)' 한 자를 위편에 크게 쓰고, 아래 부분에 이 글자에 얽힌 공자의 말을 주석처럼 달아 놓은 것이다.

본래 이 내용은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제자 자공(子貢)이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마디 말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그것은 '서(恕)'이다"라 하였다는 것이다.

'서(恕)'자는 '같을 여(如)'자와 '마음 심(心)'자가 합쳐진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상대편이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용서는 내가 상대편의 마음과 같아져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서(恕)'는 곧 남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인(忍)'과 '인(仁)'의 실천인 셈이다.

이상에서 보듯 오세창은 늘 조국의 안위를 함께 하며 한 몸처럼 살았다. 그의 인생은 조국의 품안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충성스런 국민이었고, 예술가로서도 늘 미술계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많은 이들이 변절하고 친일의 길을 걸었던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은 오세창의 일생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귀감이 된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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