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백범을 다시 보다

백범 김구가 1947년 2월 심산 김창숙에게 써준 ‘일송오강’.

사람의 도리를 요약한 5개 강령으로, 70여 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사진 은평역사한옥박물관]

 

1947년 2월 10일 겨울 찬바람이 불던 날, 백범(白凡) 김구(1876~1949)가

평생 동지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과 마주 앉았다.

 

고희(古稀) 전후의 두 노인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광복을 맞은 지 3년째 됐건만 진정한 독립은 아직 멀어 보였다.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정국은 혼탁하기만 했다.

심산이 백범에게 부탁했다. “백범, 내게도 글씨를 하나 써주시오.”

평생 동지 심산에 써준 ‘일송오강’
백범 특별전서 73년 만에 첫 공개
독립운동 매진한 두 거목의 우정
‘사람이 곧 글씨’ 우국충정 돋보여

 

중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지인들에게 글을 나눠주며 조국 광복을 염원해온 백범이었다.

그가 심산에게 되물었다. “어떤 문구가 좋겠소.”

 

심산이 답했다. “스승이신 대계(大溪) 선생의 ‘일송오강’(日誦五綱)이 적당할 것 같소.”

백범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산의 오늘을 있게 한 대계 선생이 아닌가.

그리고는 ‘일송오강’ 5개 강령 25자를 써내려갔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부모를 위해 몸을 세우고, 나를 위해 도를 세우고,

백성을 위해 진력을 다하고, 만세를 위해 규범을 세운다.’

(爲天地立心 爲父母立身 爲吾生立道 爲斯民立極 爲萬世立範)

두 노인은 뜻이 통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한 문구로 모자람이 없었다.

‘일송오강’은 중국 만주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독립운동 기지도 세웠던 대계 이승희(1847~1916) 선생이 직접 지어 매일 외던 글귀였다.

심산 자신에게도 좌우명 같은 경구였다.

'사는이야기 > 붓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사에 얽힌 일화와 인물  (0) 2022.11.16
인제 합강정  (0) 2021.04.07
세한도  (0) 2021.01.05
수타사  (0) 2020.11.06
서예, 현대미술이 되다  (0) 2020.04.28

추사의 삶만큼 파란만장...

주인이 10번이나 바뀐 그림

일본에서 사라질 뻔한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

 

-오마이뉴스-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 그려진지 180년 만에 주인이 10번이나 바뀌며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세한(歲寒)’은 설 전후의 추운 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문인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거칠게 그려진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모진 풍파에 꺾인 가지는 겨우 생기를 유지한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그리고 잣나무 세 그루. 잣나무 사이 대충 윤곽만 그려진 초라한 집 한 채. 텅 비어 있는 오른쪽 여백에 화제가 적혀 있고 붉은 낙관 두 개가 찍혀 있다. 그게 전부다. 전체적으로 춥고, 외롭고,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다.

산수화도 아니고 인물화도 아니다. 메마른 붓질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고아하게 표현한 그림과 글씨. 우리나라 문인화의 정점을 이룬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 이야기다.

무릇 예술가들은 작품 속에 그들이 겪었던 삶의 이야기들을 오롯이 투영해 놓곤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명작의 이면에 불우하고 궁핍했던 예술가들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추사의 절친 권돈인이 이한철에게 주문하여 그린 김정희 초상(좌측. 보물 제547-1호)과 추사의 수제자 소치 허련(小痴  許鍊 )이 그린 추사의 초상(우측)
 추사의 절친 권돈인이 이한철에게 주문하여 그린 김정희 초상(좌측. 보물 제547-1호)과 추사의 수제자 소치 허련(小痴 許鍊 )이 그린 추사의 초상(우측)
ⓒ 국립중앙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일생을 불행하게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웠던 시기에 귀를 자르고 '결핍과 고독'을 자양분 삼아 예술혼을 불태우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겼다.

고흐보다 70여 년 앞섰던 조선 후기. 금수저 중의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 인생의 중년기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가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글씨와 그림으로 승화시켜 '조선 학예(學藝)의 최고봉'을 이뤘다. 그는 서화가이자 실학자이면서 인문학까지 통달한 만능 예술가였다.

조선의 황금수저, 땅끝 제주도로

제주도, 경기도 과천시, 충청남도 예산군. 세 곳에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기리는 박물관과 기념관이 있다. 한 나라에서 무려 3개의 기념관을 지어 추모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다.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가 한국 사람 치고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잘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말했듯이, 추사 김정희를 조선 후기 서예에 통달해 추사체를 남긴 명필 정도로만 아는 것은 부족하다.
​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 추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충남 유형문화재 43호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 추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충남 유형문화재 43호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 할 수 있는 정조가 집권한 지 10년째 되는 1786년. 충남 예산군 용궁리 경주김씨 월성위(月城尉) 가문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역임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한 '왕의 사위'로 오위도총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냈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에 오른 명문 중의 명문 집안이다.

로열패밀리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24살에 생원 시험을 거쳐 34살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규장각 대교, 의정부검상, 예조참의를 거쳐 1839년 54세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추사는 아직 추사가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가문의 찬스'를 활용해 잘 나가는 엘리트 관료에 불과했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세상 이치다. 조선 후기, 왕을 둘러싼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주도했던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추사 가문은 큰 화를 당한다.

아버지 김노경의 고금도 유배에 뒤이어 1840년, 추사의 나이 55세 되던 해 안동김씨 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추사 가문의 최측근이었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자 안동김씨는 추사에게 대역죄를 뒤집어 씌웠다.
  

 추사가 귀양살이를 했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유배지. 국가사적 제487호
 추사가 귀양살이를 했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유배지. 국가사적 제487호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벌한다 했으니, 국청에 수금한 죄인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도록 하라."

어린 왕,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안동김씨 순원왕후의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추사는 조선의 땅끝,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도 보통 유배가 아니었다.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도 '위리안치형'은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들에게 내려지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
 

험난한 제주 바다를 건너 한 달여 만에 도착한 척박한 땅 대정현. 추사의 거처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유배형에 따라 가시 울타리가 둘러쳐지고 울타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가택 연금의 귀양살이가 시작됐다.

남부러울 것 없던 조선의 황금수저가 인생의 절정기에 나락으로 떨어져 절해고도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원망, 외로움, 결핍, 고독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절망하지 않았다. 극한의 유배지에서 동생들을 비롯한 친구, 제자,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상과 소통하고 외로움도 달랬다. 인고의 세월을 책과 함께 보내며 학문과 인생의 깊이를 더했다. 추사는 귀양살이 9년을 학문과 예술을 연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다시 태어났다. 이 시기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의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 권력을 잃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스승을 잊지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에 비유하여 세한도를 그렸다
 추사의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 권력을 잃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스승을 잊지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에 비유하여 세한도를 그렸다
ⓒ 은송당전집

관련사진보기

   
유배생활 5년째 되던 1844년.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인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가 탄생한다. 학문과 예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추구했던 추사의 철학과 사상이 담긴 불후의 명작 세한도에는 가슴 찡하게 울리는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귀양살이가 길어지면서 주변의 관심도 점차 멀어지고,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 예안이씨(禮安李氏)마저 잃게 되자 추사의 외로움은 깊어 가고 있었다. 이때, 청나라에 역관으로 가있던 제자 이상적(1804~1865)이 북경(北京)에서 막 발행된 신간 서적 <황조경세문편> 79책 120권을 구해 제주도로 보내왔다. 수레로 한 수레나 되는 분량이었다.

권력을 잃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스승을 잊지 않고 천리 먼길 위험을 무릅쓰고 책을 보내준 제자가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추사는 제자를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림 왼편에 쓴 세한도 발문.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공자의 ‘자한편’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에 비유하였다
 그림 왼편에 쓴 세한도 발문.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공자의 ‘자한편’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에 비유하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겠구나. 그대야말로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공자의 '자한편'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에 비유하여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세한도(歲寒圖)'라 화제를 쓰고 아래쪽에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고 약속하듯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화인(火印)과도 같은 붉디붉은 낙관을 찍었다.
        

 오른쪽 여백에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가 가로로 크게 쓰여 있고 세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적혀 있다. ‘우선, 감상하시게’라는 뜻인데 우선은 제자 이상적의 호다. 완당이란 낙관과 함께 아래에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오른쪽 여백에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가 가로로 크게 쓰여 있고 세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적혀 있다. ‘우선, 감상하시게’라는 뜻인데 우선은 제자 이상적의 호다. 완당이란 낙관과 함께 아래에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관련사진보기

       
그림을 받아 든 제자 이상적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림을 청나라 연경으로 가져갔다. 중국인 친구 오찬의 연회에 초대받은 이상적은 세한도를 중국의 문인과 학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세한도를 본 중국의 문인들 16명이 시와 문장으로 찬탄의 감상평을 써 주었다.

청나라 문사들 뿐만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오세창, 정인보, 이시영 등 4명의 감상평이 달렸다. 그리하여 원래 세로 24cm 가로 70cm 정도였던 세한도는 20명의 감상평이 이어져 15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원래 세로 24cm가로 70cm 정도였던 세한도는 20명의 감상평이 이어져 15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원래 세로 24cm가로 70cm 정도였던 세한도는 20명의 감상평이 이어져 15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관련사진보기

   

 두루마리 앞쪽의 바깥 비단 장식 부분. 제목 완당 세한도(阮堂歲寒圖)는 청나라 문인 장목(1805~1849)이 썼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감상평을 옆으로 붙여 표구로 만들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두루마리 앞쪽의 바깥 비단 장식 부분. 제목 완당 세한도(阮堂歲寒圖)는 청나라 문인 장목(1805~1849)이 썼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감상평을 옆으로 붙여 표구로 만들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주인 10번 바뀌며 돌고 돌아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국보

제주도에서 그려진 후 북경까지 다녀온 세한도는 추사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을 겪는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나고 세한도는 그의 제자,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을 거쳐 1930년대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에게 건너갔다.

후지즈카는 경성제대 교수로 한국사람들보다 추사를 더 존경하고 흠모했던 추사 연구가였다. 1944년 해방 1년 전, 후지즈카는 돌연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다.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田 孫在馨 1903~1981) 선생은 이를 알고 매우 애석해한다.

손재형은 도쿄로 건너가 100일 동안 매일 후지즈카를 문안하며 "제발 세한도를 넘겨달라"라고 호소했다. 손재형의 정성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그저 "잘 보존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한도를 넘겨줬다.

세한도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석 달 뒤 1945년 3월, 도쿄에 있는 후지즈카의 서재가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손재형의 문화재 사랑이 없었다면 세한도는 일본땅에서 한줄기 연기로 사라졌을 것이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田 孫在馨 1903~1981). 손재형은 도쿄로 건너가 100일 동안 매일 후지즈카를 문안하며 세한도를 찾아왔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田 孫在馨 1903~1981). 손재형은 도쿄로 건너가 100일 동안 매일 후지즈카를 문안하며 세한도를 찾아왔다
ⓒ 소전 미술관

관련사진보기

 
손재형이 애지중지하던 세한도는 그의 손을 떠나게 된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이 화근이었다. 돈이 부족해진 손재형은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세한도를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다. 국회의원에 낙선한 손재형은 결국 세한도를 찾아올 수 없게 됐다.

이근태는 미술품 소장가인 개성 출신 인삼 무역상 손세기에게 넘겼고 손세기는 그의 아들 손창근(93)에게 물려줬다. 평소 기부에 앞장섰던 손세기·손창근 부자는 2018년 대를 이어 수집해온 문화재 304점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세한도' 만큼은 끝까지 놓지 못했다. 1년을 넘게 고민하던 손창근씨는 작년 2월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로서 세한도는 주인이 10번이나 바뀌며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손창근씨에게 문화훈장 중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를 기념해 <한겨울 지나 봄 오듯>이란 테마로 1월 31일까지 특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신축년 새해 들어 추위가 매섭다. 매서운 추위만큼이나 세상살이도 암울해 보인다. '의리와 절개'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티끌만 한 권세와 이익을 좇아 배신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하 수상한 세상이 돼버렸다.

180년 전, 멀고 먼 낯선 유배의 땅에서 '세한의 계절'을 견디며 고립된 채 그려진 옛 그림이 추운 날씨만큼이나 서늘하게 일갈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고. 

 

'사는이야기 > 붓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제 합강정  (0) 2021.04.07
백범의 일송오강  (0) 2021.01.13
수타사  (0) 2020.11.06
서예, 현대미술이 되다  (0) 2020.04.28
자서첩(自敘帖)  (0) 2020.02.05

'사는이야기 > 붓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범의 일송오강  (0) 2021.01.13
세한도  (0) 2021.01.05
서예, 현대미술이 되다  (0) 2020.04.28
자서첩(自敘帖)  (0) 2020.02.05
행정동우회 작품전  (0) 2019.11.26

글씨가 곧 그림…서예, 현대미술이 되다

[중앙선데이]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서예전 가보니

‘글씨와 그림은 한뿌리다(書畵同源)’. 원나라 문인화가 조맹부의 이 말은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개관 51년 만에 처음으로 서예 전시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의 시각에서 조형미가 뛰어나고 확장성을 갖춘 글씨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의 서도(書道)와 다른 한국의 서예(書藝)를, 300여 작품을 통해 재해석했다”는 것이 윤범모 관장의 설명이다.

1·2세대 서예가들 대표작 한눈에
“서법, 서도 아닌 서예의 재해석”
현대미술적 조형미, 확장성에 초점
유튜브 공개 열흘 만에 3만건 돌파

MMCA 덕수궁관의 이 야심찬 올해 첫 전시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하지만 중국 역병의 창궐로 전시장이 폐쇄되면서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먼저 관람객을 만나야 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공개된 1시간 23분 28초짜리 투어 프로그램은 열흘 만에 조회 수 3만건을 돌파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전시장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출입 기자들에게만 살짝 공개된 전시장은 일필휘지의 기운이 생동하는 예술혼의 각축장이었다.

① 당대 최고의 전각가로 꼽히는 철농 이기우가 대나무에 새긴 ‘장생’. ② 소전 손재형이 1956년 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의 탁본(부분). ③ 일중 김충현이 6종의 국한문체로 쓴 ‘정읍사’(1962). ④ 강병인이 종이에 먹으로 그린 ‘힘센 꽃’.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예가 또 다른 형태의 미술임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시(詩)·서(書)·화(畵)가 하나였던 문인화가 현대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글씨가 그림으로, 조각으로, 전각으로, 도자로 어떻게 확장됐는지, 무엇보다 서예가 고루한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전시를 기획한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1층 첫 전시실로 안내했다. 글과 그림이 어떻게 어울리고 글씨가 어떻게 예술이 됐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프롤로그’ 공간이다. 근원 김용준이 수화 김환기 집에 놀러 왔다가 그려준 수화의 모습과 예서체 글씨, 도둑 쥐들을 향한 분노로 서슬 퍼런 고양이를 그린 월전 장우성의 그림과 시구가 우선 시선을 끈다. 『주역』 64괘 문자의 획을 각기 다른 몸짓을 하고 있는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고암 이응노의 작품은 간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선 귀한 몸이다. 조각가로 알려졌지만 사실 대단한 서예가였던 우성 김종영이 만든 고졸한 나무 조각 역시 단단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① 서예가 청남 오제봉의 아들인 서양화가 오수환은 필획의 찰라적 속성을 자신의 그림에 반영했다. 2008년작 ‘Variation’. ② 먹과 마스킹테이프로 한글을 구현한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해주아리랑’(2012). ③ 하석 박원규가 서주시대 청동 제기에 새겨진 글자 ‘공정(公正)’을 재해석한 2020년작.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2층 두 번째 전시장의 부제는 ‘글씨가 그 사람이다’다. 배 학예사가 골라낸 ‘국전 1세대’ 대표작가 12명은 서로 흥미롭게 연결돼 있었다. 해방 이후 ‘서도’ 대신 ‘서예’라는 명칭을 정착시키고 자신만의 한글 서체를 개발한 소전 손재형은 일본인 소장가를 찾아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돌려 받아온 인물이다. 명량해전을 기리는 노산 이은상의 글을 소전의 글씨로 새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1956) 속 조형미는 지금 보아도 놀랍다. 그런 소전의 글을 두고 “글씨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사람이 여초 김응현이다. 법첩에 근거하지 않은 글씨는 서예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는 광개토태왕 비문의 글씨를 토대로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했다. 실제 비문의 탁본을 임서한 5m 가까운 높이의 4폭 지면(2003)은 관람객을 압도한다.

전각으로 일본에서 더 유명한 석봉 고봉주의 인장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여초의 형은 소전과 함께 제1회 국전을 기획한 일중 김충현이다. 6종의 서체로 쓴 대표작 ‘정읍사’(1962)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의 가치가 있다. 일중이 국한문 혼용서체에 집중했다면, 일생을 한글 궁체에만 매진한 여성 서예가가 갈물 이철경이다. 또한 소전의 제자로 국전 사상 처음 서예로 대통령상을 받았지만 소전의 아류라는 비난에 고민하다 마침내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어낸 평보 서희환의 청출어람, 58세에 오른손이 마비돼 글을 못쓰게 되자 왼손 필법을 고안해 다시 경지에 오른 검여 유희강의 인간승리 이야기도 놓칠 수 없다.

해강 김규진이 금강산 구룡폭포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을 쓸 때 사용한 대필과 관련 자료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두 번째 전시장은 한복판이 아주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바닥에 반짝이는 검정 타일을 깔고 어두운 가운데 조명으로 분위기를 내 관람객에게 벼루 속 먹물 한 방울이 된 느낌을 선사한다. MMCA에서 10년째 전시 공간 기획으로 각종 디자인 어워드를 휩쓴 김용주 디자이너의 세련된 손길이다.
세 번째 전시장은 ‘전통의 계승과 재해석’ ‘서예의 창신과 파격’ ‘한글서예의 예술화’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전문가 15인이 선정한 ‘2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초정 권창륜이 큼직한 필획의 행초서로 풀어낸 『명심보감』 속 글귀, 하석 박원규가 서주시대 청동 제기에 새겨진 글자를 재해석한 작품이 눈길을 붙든다.

마지막 공간은 디자인의 가능성을 통해 서예의 변신을 탐색하는 자리다. 한글 자모에 특유의 움직임을 부여한 강병인, 먹과 마스킹테이프로 글씨를 만들거나 파뿌리에 먹을 묻혀 글씨를 쓰는 이상현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저명 서예가들이 제호를 쓴 잡지, 다양한 붓과 벼루와 연적, 한글 서체로 완성한 TV 드라마 제목 등 쉬어가는 코너의 알찬 수준도 전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코로나19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길 기원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사는이야기 > 붓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한도  (0) 2021.01.05
수타사  (0) 2020.11.06
자서첩(自敘帖)  (0) 2020.02.05
행정동우회 작품전  (0) 2019.11.26
제16회 신동아국제예술대전  (0) 2019.11.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