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릉

 

경기도 여주에는 두개소의 영릉이 있다.

그 하나는 영릉(英陵)으로 조선 제4대 왕인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를 모신 능이고,

다른 하나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봉림대군)과 인선왕후의 능 이다.

 

 

 

 

세종대왕릉 정문으로 들어서니 좌우로 세종전과 재실 건물이 눈에 든다.

재실 옆으로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종전은 현재 공사중.

 

 

 

세종전 앞에는 만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와 자격루,

측우기 등 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재실은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건물로

제관들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 하던 집이다

 

 

 

훈민문

 

훈민정음은 세종 25(서기 1443)에 완성되어 3년의 시험기간을 거쳐

세종 28(서기 1446)년에 세상에 반포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한자, 한문생활에 익숙해진 조선의 사대부 계층들은

한글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오히려 연산군때는 한글을 탄압하여

아녀자들이나 쓰는 글로 전락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훈민문을 지나자 잉어가 가득찬 연못과 소나무의 조화가 참 아름답다.

연못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이다.

 

 

 

홍살문

 

홍살문 형태는 자를 형상화 하였으며 화살의 표시는 나뿐 잡귀나

무례한 귀신이나 불순한 사람이 친입할때는 활로 쏘아 버릴것이라는 상징적 의미이며

 

가운데 태극문양은 천도에 기초한 음양의원리를 표현한 것이며

붉은칠을 한 것은 척사의 의미다 좌대는 팔가인데 이는 여덟 방위를 뜻한다  

삼도삼문(三道三門)과 정자각은 공사중으로 출입금지

 

 

 

 

 

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원래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1(1469)에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 4대왕으로 3대왕인 태조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1397년에 태어 났다.

재위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6진 개척, 쓰시마 섬 정벌,

측우기 제작 등 정치, 경제, 문화 전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다

 

1446(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춘천부사 박승임에게 농사직설 내사하였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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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읍성으로 사적 제116. 

1491(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둘레 1,800 m, 성 높이 5 m,

성 안의 넓이 196,381m2이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며,

폐성된 지 오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나,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

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었다.

 

본래의 규모는 동··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이 2개소, 객사 2,

포루2, 동헌1, 총안 380개소, 수상각 1개소, 신당원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 동헌 1, 망루 1개소뿐이다.

1418(태종 18)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었다.

 

해미는 1414(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

 

해미읍지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 380()이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이 1579(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어사·교련청·작청·사령청 등의 관아 건물이 분포해 있다.

 

해미읍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하였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터가 확인되었고,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터가 발견되었으며,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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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추사 고택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추사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안채 뒤쪽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구조는 일반인들의 눈에 그리 특이한 것은 없다.

 

그러나 추사고택 주변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을 즐기거나 쉬기에 좋으며 또 주변에 추사 선생의 묘와

 

추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인 월성위묘가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영조대왕의 부마 월성위 김한신이

1700년 대 중반에 건립한 집으로,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아 자리잡았다고 한다

 

추사고택의 규모는 53칸인데, 영조는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축 비용을 분담하여 지어주도록 했다는데,

 

집을 지을 때도 궁궐 건축을 담당하는 경공장의 목수들을 파견하여 완성하여

추사고택은 격조가 있어 보인다.

 

 

 

 

 

사랑채의 문위에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가 있다.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는 59세 때인 1844

제주도 유배 당시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라 한다  

 

 

 

 

추사 고택은 온통 집 전체가 주련으로 두른 "주련의 집" 이다.

서예의 대가 집 답게 수많은 주련이 대문 옆에도, 현관 앞에도,

기둥에도, 담벼락에도 걸려 있음을 볼수 있어서,

 

학문과 예술에 높은 안목을 지녔던 추사(秋史)는 가고 없지만,

그의 글씨와 주련들이 남아서 생전에 가슴에 품고 있었을 사상과 뜻을 전하고 있는듯 하다.

 

안채에는 제대로 된 부엌도 없고 나무도 하나 심어져 있지 않다.

이곳은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자 형태의 집에 나무()이 들어 있으면

"곤할 곤()"자가 되어 좋지 않다 하여

집안에 풀 한포기조차도 자라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다고 하는데, 그녀가 둘째 딸이라고는 하지만

장녀인 화억옹주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어 사실은 장녀나 마찬가지였고,

그녀가 결혼할 당시 나이가 불과 13세였다.

 

그런 그녀를 영조는 늘 가까이 두고 싶어 했으나

화순옹주의 슬하에 자식을 남기지 않고 부군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한신이 병사하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고 죽기를 자처하였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친히 딸의 사저를 찾아가 간절히 만류했다고 한다.

 

영조는 죽은 이들에게 김한신의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입적토록 하여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그가 곧 추사의 할아버지다.

 

추사 김정희는 178663,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부친 김노경씨와 모친 기계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제가의 눈에 띄어 학예로 대성할 것을 예언,

수제자가 되었다고 하며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금석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순조 19(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는데,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와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구양수 초상화

 

석봉서법

 

 

벼루

 

 

낙관

 

 

 

 

유복량수(有福量壽)의 현판도 보인다.

"많은 복과 한없는 수명"이라는 뜻으로 추사가 회갑때 쓴 작품으로,

불경의 극락왕생론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원래는 유대복무량수(有大福無量壽)”라 써서

방문 윗벽에 붙여 있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바탕지는 낡아 없어진 것을

1976년 고택정화사업 때 떼어서 표구한 것이라고도 한다.

 

 

 

 

추사 글씨, 그림 가운데 딱 한 점씩 꼽는다면

“글씨에선 ‘침계’, 그림에선 묵란도 ‘적설만산(積雪滿山)’. 

‘침계’(지본묵서, 42.8×122.7㎝, 간송미술관)는 추사가 제자인 침계 윤정현(1793~1874)에게 써준 추사체 편액이다.

제자의 부탁을 받았으나 ‘침’자의 예서 전형을 찾지 못해 무려 30년을 고심하고는 결국 예서·해서 합체로 썼다.

 

66~67세(1851~1852) 때 쓴 것으로 보이는데, 추사체를 만든 추사의 법고창신 정신, 추사체 특징도 다 들어 있다.

한 글자를 30년 고심한 추사의 엄정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명작이다.

 

‘적설만산’(지본수묵, 22.8×17.0㎝, 간송미술관)은 1835년에 추사가 10여폭의 묵란도를 엮은 화첩 <난맹첩> ‘상권’에 실린 첫 작품이다.

“우리나라 중부지방 춘란을 그린 것인데…, 난이 아니라 잔디 같다. 한겨울 눈보라를 이겨내고 꽃을 피운

억센 난에 우리 민족의 강인한 기상, 산악지대인 이 땅의 특성, 조선 고유의 독특한 미감까지 녹아들어 있다.

추사의 성정을 잘 보여주는 명품으로, 난과 글씨와 인장의 조화미도 일품이다.”

 

 

 

 

신안구가(新安舊家)의 편액으로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온 집"이라는 뜻의 글도 볼수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신안의 옛집" 이란 뜻으로,

주자학의 시조인 주희가 중국 송나라 신안인 이므로

"주자성리학자의 전통을 가진 집" 이라는 뜻이다.

 

"()" 자의 윗부분 점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고,

"()" 자의 가로획을 촘촘히 붙여서 쓴 것과

세로획에 변화룰 준 부분이 특이하여 추사의 조형감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유배 중이던 추사는 소치 허련 편에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을 써서 초의 선사에게 보냈다.

 ‘화로 하나 있는 다실’, 즉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는 뜻이다.

초의가 제주도까지 차를 보내준데 대한 고마움의 정표로 차향이 은은하게 나는 초의가 머무는 일지암에 걸라고 써 준 편액이다. 


 

 

 

"죽로지실(竹爐之室)"

차를 끓이는 죽로(대나무화로)가 있는 방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보여주는 글씨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좋은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幾人, 爲杏農書, 七十一果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 된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큰 황금인(黃金印)을 차고,

먹는 것이 사방 한길이나 차려지고 시첩(侍妾)이 수백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농(杏農 兪致旭)을 위해 쓴다. 71세의 과천 노인은 쓰다>   

 

 

畵法有 長江萬里(화법유 장강만리) - 그림의 법도에는 장강 만리가 들어있고

書埶如 孤松一支(서세여 고송일지) - 글씨의 기세는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네

 

요사이 건필과 검묵으로써 원나라 사람들의 거칠고 간략한 것을 억지로 꾸며 내려고 하지만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왕우승(王右丞 王維), 대소 이장군(李思訓), 조영양(趙令穰 산수화가),

조승지(趙承旨 조맹부)는 모두 청록색을 쓴 그림으로 뛰어났었다.

대개 품격의 높고 낮음은 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에 있는 것이니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비록 청록이나 니금(泥金)을 쓴다해도 다 좋다.

서도(書道)도 역시 마찬가지다. 승련노인

 

 

 

차호명월성삼우(且呼明月成三友) - 또 명월을 부르니 벗이 셋이 되었구나,

호공매화주일산(好共梅花住一山)-  함께 매화를 사랑하며 같은 산에서 머무네

 

 <동인인형(桐人仁兄)에게 완당이 촉예법(蜀隸法)으로 쓰다.>

 

 

 

 

 

 

 

 

 

 

 

 

 

 

 

 

 

대련 문구를 소개한다

 

구곡수통다조외(句曲水通茶竈外)구곡수는 차를 끓이는 부엌 밖을 흐르고

경정산견석란서(敬亭山見石欄西)경정산은 돌난간 서쪽에 보인다.

 

원문거사첩심허(遠聞居士帖心許)멀리 벗의 소식을 들으면서 서첩(書帖)에 마음으로 고개 끄덕이고

노견이서유안명(老見異書猶眼明)늙어서 새로운 책들을 보니 오히려 눈이 밝아지는구나

 

유애도서겸고기(唯愛圖書兼古器)오직 사랑하는 것은 그림과 글씨 그리고 옛그릇

차장문자입보리(且將文字入菩提)또 불경으로 보리(깨달음)에 든다

 

범물개유가취(凡物皆有可取)모든 사물에 다 취할 바가 있고

어인하소불용(於人何所不容)사람에 대해 용서 못할 일이 어디 있으리

 

서이과삼천권(書已過三千卷)책은 이미 삼천권을 넘었고

화가수오백년(畵可壽五白年)그림은 오백년을 살아남을 수 있네

 

천벽신자팽옥명(淺碧新瓷烹玉茗)열푸른 새 주전자에 옥명차를 끓이고

경황가첩사은구(硬黃佳帖寫銀鉤)고급 경황 종이의 아름다운 공책에는 초서를 베껴쓰네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고요히 앉아있는 자리에 차가 반쯤 끓어 비로소 첫 향기를 내고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오묘하게 움직이는 때에 물이 흐르며 꽃이 핀다

 

 

 

 

 

 

 

 

 

 

 

 

 

추사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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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9 소재

흥선대원군의 부친이신 남연군의 묘로, 이 남연군묘가 위치한 자리는

본래 가야산 일대에서 제일 큰 절인 가야사가 있던 곳이다.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가 웅장 하게 뻗어있어 "이대 천자지지"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경기도 연천의 남송정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이때 대원군은 왕권에 야심을 품고 안동 김씨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생활을 하던터라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99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던 가야사를 불사르게 하고

금탑을 허물게 하여 이 묘자리를 차지하였으며

뒷날의 도굴을 염려하여 철 수 만근을 붓고 강회로 비비고 봉분을 했다.

 

임시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라하여 지금도 움푹 패여 있으며

묘 전방의 석조물 2조의 석양과 2기의 석주를 묘지의 좌우에 세우고 있으며

묘의 전방에는 이대천자지지라 명문된 석등이 있다.

 

1868년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있었고, 전주 이씨가 멸망한 후 묘소는 황폐화 되었으나,

왕실묘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잘 보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무덤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남연군의 무덤자리를 찾기 위해

지사(地師)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는데,

그는 지금의 자리를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원래 묘자리에는 탑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묘를 옮긴지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는데,

철종의 후사(後嗣)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高宗)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훼손하였는데,

()에는 미치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고,

대원군은 쇄국(鎖國)과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야사지 추정불전지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가야산 석문봉의 동쪽 아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가야동이라고 불리는데 99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절터의 중심지라고 전해지는 곳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묘가 자리잡고 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차례 진행된 가야사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사찰 8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추정 불전지는 장방형의 평면구조를 가지며 조사된 건물 중 완전한 형태를 띠고 있다.

 

 

 

 

 

남은들상여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했다고 전하는 궁중식 상여이다.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에 있으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비를 지원받아

국립고궁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 실측 보고서를 근거로

 

여는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이,

[매듭]는 무형문화재 32호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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