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암 묘역

남면 가정리 류성균 가옥

원래 있던 집을 6.25전쟁이 끝난후인 1956년 새로지었다고 하며 서면 박광순 가옥과 마찬가지로 집앞에 커다란 향나무가 심어져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반증한다.

특히 이 고택은 류성균 변호사의 소유로서 서면 금산리 박광순 가옥과도 연관이 있는데 바로 이 가옥의 안주인이 박광순씨의 누이이며 지금 집을 지키고있는 이도 박광순씨의 동생이라 집안대대로 고택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엿볼수있다.

특히 이 가옥의 기둥중 하나가 향나무로 되어있는데 이 향나무는 사진에 보이는 향나무와 함께 자라던 것이 죽어서 그 나무를 기둥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며 살아있는 향나무와 죽은 향나무가 마주보도록 설계가 되어 집주인의 배려가 엿보인다.

특히 이 가옥은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꾸준한 관리를 통해 마치 지은지 몆년안된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관리가 잘되어있고 골격은 보존하되 내부의 생활공간은 개수를 통해 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한 노력이 보인다.

집주인의 말로는 모든 목재를 이 지역에서 구하여  지었다고 하며 구불구불한 나무를 자연그대로 이용하여 서까래로 사용하고 죽은 행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는등 볼거리와 담고있는 스토리가 탄탄한 주목할만한 가옥이다.

◇윤희순 의사(1860~1935)

윤희순 의사는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나 16세에 의암 유인석의 조카인 유제원과 결혼해 춘천에 터를 잡았다. 유학자 집에서 태어났으나 대대로 의병활동을 주도해 온 집안에 시집오면서 함께 항일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당시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유교사회에서 여성의병장 역할을 함으로 전통사회의 틀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정의 안녕은 조국의 평안함 없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과 구국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윤희순은 일본을 항한 저항과 경고를 담은 의병가사를 쓰고 배포해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을 했다. 또 여성도 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잠재된 구국의식을 자극시켜 여성구국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것은 여성들로 이뤄진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한 것이다. 안사람 의병단은 강원 춘천지역 여성 30여명으로 구성됐으며 이들은 남성들과 다름없이 무기 및 탄약제조, 공급, 군수품 전달, 의병 연락활동, 군자금 모금 뿐 아니라 군사훈련에도 참여했다. 의병활동 후에는 해외로 이주해 노학당을 짓고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며 항일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췄다. 1935년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아들이 죽음을 맞자 그 슬픔으로 아들을 따라 7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춘천 의암 유인석의 기념관에서 조금 더 가며 나오는 여의내골에 윤희순 의사가 여성의병들과 함께 훈련했던 터와 무기 제조소, 윤 의사 생가와 이 집안의 3대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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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고택

동면 장학리 민성기 가옥

휘문중 고등학교 설립자이며 친일파의 거두인 민영휘 묘막으로 지어졌으며 50년을 넘게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한옥이다. 원래 한옥의 부재는 화천에 있던 건물을 이곳에 옮겨 지었다고 하며 바로 뒤편에 민영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민성기 가옥의 특징은 뒤편의 느티뒤편의 느티나무와 황토로 만들어진 담장 그리고 와송이 대규모로 자라는 기와등에서 고풍스런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신동면 정족리 김정은 가옥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SBS 토크 프로그램 땡큐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진 한옥 체험 건물이다.나지막한 산 아래에 세운 집으로 자형 안채에 사랑채가 딸려 있어 전체적으로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건넌방을 두고 오른쪽으로는 웃방·안방·부엌을 배치하였는데 부엌 천장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대청 뒤쪽 벽에는 2짝 문을 달고, 웃방과 안방 사이에도 문을 달아 공간을 구분하였다. 안채 대청 앞쪽으로는 햇빛을 막고 비가 들지 않게 높은 기둥을 세워 지붕을 덧댄 차양시설을 두었다. 사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부엌과 사랑방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광과 그 뒤편으로 방을 놓았다.

신동면 정족리 최재근가옥

1917년에 세운 집으로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웃방·안방·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을 꾸몄다. 지금은 생활하기에 편리한 구조로 개조하였는데,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고 안방과 웃방 사이의 벽과 바깥쪽 툇마루를 없애 방을 넓혀 쓰고 있다.

사랑채는 대문 왼쪽에 외양간··방을 배치하였고 오른쪽에는 부엌··광을 놓았는데, 왼쪽은 삼량구조이나, 이 오른쪽 부분은 평사량구조를 취하고 있다.

남면 가정리 류성균 가옥

원래 있던 집을 6.25전쟁이 끝난후인 1956년 새로지었다고 하며 서면 박광순 가옥과 마찬가지로 짚앞에 커다란 향나무가 심어져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반증한다.

특히 이 고택은 류성균 변호사의 소유로서 서면 금산리 박광순 가옥과도 연관이 있는데 바로 이 가옥의 안주인이 박광순씨의 누이이며 지금 집을 지키고있는 이도 박광순씨의 동생이라 집안대대로 고택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엿볼수있다.

특히 이 가옥의 기둥중 하나가 향나무로 되어있는데 이 향나무는 사진에 보이는 향나무와 함께 자라던 것이 죽어서 그 나무를 기둥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며 살아있는 향나무와 죽은 향나무가 마주보도록 설계가 되어 집주인의 배려가 엿보인다.

특히 이 가옥은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꾸준한 관리를 통해 마치 지은지 몆년안된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관리가 잘되어있고 골격은 보존하되 내부의 생활공간은 개수를 통해 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한 노력이 보인다.

집주인의 말로는 모든 목재를 이 지역에서 구하여 지었다고 하며 구불구불한 나무를 자연그대로 이용하여 서까래로 사용하고 죽은 행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는등 볼거리와 담고있는 스토리가 탄탄한 주목할만한 가옥이다.

서면 금산리 박광순 가옥

농협장을 역임한 박광순씨의 가옥으로 집주인의 말로는 약 90여년전에 지어졌다고 한다.앞쪽에 심어진 향나무 두그루를 통해 역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으며 안채와 일부는 수리를 통해 조금씩 손을 보았으나 전체적인 골격은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청평사 고려선원

청평사는 불교의 선()을 닦는 도량(道場)으로 고려선종 6년 이자현이 문수원을 중건하면서 선원을 확대한 곳이며, 지형지세를 이용해 자연과 인공을 조화롭게 조성하였으며, 보물(164호 회전문), 강원도 기념물(5호 청평사지), 문화재자료(8호 청평사 3층석탑) 등 유구 및 유적 등이 있는 역사문화유적지다.

산수가 빼어난 경승지로 유명한 청평사 일대는 아늑한 분지형을 이룬 입지환경 속에 계곡, 영지(影池), (), 반석(너럭바위),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절경(絶景)이며 선경(仙境)으로서 천혜의 산수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명승지이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973) 승현선사가 세워 백암선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몇 번에 걸쳐 고치고 절을 넓혔는데 청평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명종 5(1550) 보우선사가 이곳에 와 다시 고쳐 세운 뒤부터이다.

청평사의 회전문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이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춘천 보타사 관음보살좌상

춘천 보타사(주지:진철 스님)가 소장하고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복장유물'이 최근 도 문화재자료 164호로 지정됐다. 보타사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섬세한 손이 특징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 중에서도 머리카락을 눈에 띄게 표현한 불상은 흔치 않다.

또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약한 손에 생채기 하나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보통 불상에서 가장 약한 부위인 손은 청동같이 튼튼한 소재를 사용해 따로 만든 뒤 완성된 불상에 끼운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따로 만든 손이 아니라 불상을 만들 때부터 손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복장유물'은 목조관음보살좌상 속에 들어있는 후령통, 연기문 등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후령통은 부처님의 사리나 보물을 넣어 불상 안에 세워놓는 통을 말한다. 같이 안에 들어있던 연기문은 불상의 제작 시기와 만든 사람 등을 알 수 있는 문서다. 이에 따르면 불상은 270여 년 전 조선 시대 유일 스님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춘천문화원

이 건물은 원래 강원도지사 관사로 건립하였으나, 1999년부터 춘천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춘천시청 부속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전면 출입구에 설치한 캐노피를 지지하는 V자모양 기둥이 독특하며, 철재 옥상 난간과 반원형 벽면, 비대칭적 공간 구성 등 근대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춘천 한백록묘역 및 정문

충장공 한백록(15551592)의 묘역과 정문(旌門)이다. 한백록은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과 합포해전 등에서 활약하였으나 미조항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영조 21(1751)에 그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다.

한백록의 묘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묘의 형태로, 묘 앞에는 최근에 세운 비석과 상석 망주석 등이 있고 묘의 왼쪽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다. 효종 8(1657)에 세운 이 묘갈은 두동강난 것을 다시 붙여 세운 것이다. 묘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은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1.5되는 곳에 사당과 함께 있다.

소양정

봉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소양정은 삼국시대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이요루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순종 때 부사 윤왕국이 소양정이라 고쳐 불렀다. 원래는 지금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안에 있었다.

조선 선조 38(1605) 홍수로 없어진 것을 광해군 2(1610) 부사 윤희당이 다시 짓고, 인조 25(1647)에는 부사 엄황이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지금 있는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6년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춘천 의암유인석 묘역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91

한말의 위정척사론자이며 의병장인 의암(毅菴) 유인석(18421915)의 묘역이다.

헌종 8(1842) 춘천시 남면에서 태어나 14세 때에는 친척인 중선에게 입양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그곳에서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오랑캐를 배척하는 존화양이(尊華攘夷)사상을 익혔다.

고종 32(1895)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을 시작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1908년 해외로 망명한 후 1910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였고 여기에서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는 현실적인 위정척사론으로 의병운동을 전개시킨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장절공묘역

고려의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의 묘소이다.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이바지하였다.태조 10(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적군이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하고 그의 목을 베어가자 태조는 머리없는 시신에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장례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도굴을 막기 위하여 묘는 하나인데 봉분을 3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이 묘에는 3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다. 묘역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및 묘비가 서 있다. <문화재청 제공>

김청풍부원군묘역

강원 춘천시 서면 안보 1155-1

영의정 김육(金堉)의 아들이며, 조선 현종의 장인인 충익(忠翼) 김우명(16191675)의 묘역이다. 인조 20(1642)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 참봉, 세마, 영돈녕부사,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우명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부원군(府院君)의 대접을 하기 위하여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에 묘소를 하사하였다 한다. 시신을 배에 싣고 한강을 거슬러 가던 중 현재의 묘소 앞의 강에 이르렀을 때 배가 움직이지 않고 돌풍에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산으로 날아갔다. 명정이 날아간 곳으로 가보니 그곳이 명당이어서 하사한 땅을 취소하고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강원도 내에 있는 왕릉 이외의 묘지에는 담장이 없는데, 이 묘소는 담장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묘비는 숙종의 친필로 쓰여졌으며,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민서가 짓고 윤심이 글씨를 썼고, 전서는 서포 김만중의 솜씨이다.

춘천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전하지 않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27(1594)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으며, 한국전쟁으로 불탄 것을 1960년에 복원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장수루·동재·서재·동무·서무·내삼문 등이다.

대성전은 사당으로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하였다.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수춘향약·향중좌목·향안등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조양루

조양루는 춘천관아 건물인 문소각(聞韶閣)을 신축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고종 27년인 1890년 춘천관아에 이궁(離宮)을 설치할 때 개축(改築)되어 문루(門樓)로 사용되었다. 1938년 우두산으로 이전 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파손되어 1969년 크게 수리하였다. 20134월 이 자리에 이전을 완료하였다. 현판은 1818~1819년 춘천부사로 재임한 조선후기 명필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쓴 해서천자문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무형문화재인 이창석 장인이 복각하였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누각 아래에 삼문을 낸 전형적인 문루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앞뒤 8개의 원형기둥과 양 측면 중앙 원형기둥 2개를 사각형의 긴 주춧돌 위에 세웠다. 뒷면 좌측에 누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위봉문

위봉문은 춘천관아 건물인 문소각(聞韶閣)을 신축할 때 내삼문(內三門)으로 함께 건립되었다. 고종 27년인 1890년 춘천관아에 이궁(離宮)이 설치되면서 위봉문은 이궁의 내삼문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문소각 소실과 강원도청사 건립으로 몇 차례 이전되어 있던 것을 20134월 원래의 자리인 강원도청내에 이전을 완료하였다.

현판글씨는 조선후기 명필이었던 송하옹(松下翁) 조윤형(曺允亨)이 쓴 것이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내삼문의 전형인 솟을대문 양식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한 단의 장대석(長臺石) 기단을 놓고 앞뒤 8개의 원형기둥을 사각형의 주춧돌 위에 세웠다. 강원도 영서지방에 남아 있는 내삼문(솟을대문) 중 온전하게 양식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이규완 강원도지사 가옥

강원도 마지막 관찰사이자 초대도지사인 이규완 묘와 가옥을 찾았다. 1963년에 세운 이규완의 묘는 후평동 삼운사 부근이자 한림대학교 기숙사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과수원이었으나 지금은 묘소 바로 옆에 100여세대도 안되는 작은 아파트가 최근에 들어선 것 같다. 일본식 건물은 이 가옥이 춘천에서는 처음으로 지은 2층 가옥이라고 했다.

이규완이 강원도 초대도지사 재임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넓은 대지안에 좌측으로는 정방형의 연못이 있고, 그 연못 가에 100년 가까이 돼 보이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40미터 간격을 두고 서 있다. 1층 가옥은 한국전통방식으로 지은 듯 하나 한켠에 2층 누각처럼 붙여 지은 목조건물은 뒷쪽에서 나무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서재 또는 응접실 처럼 전망이 좋은 형태로 지었다.

건물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2002년 어느날 새벽 일어난 화재를 교회로 예배를 가던 인근 주민에 의해 소방서에 신고돼 가까스로 전소는 면하였다고 한다. 안방과 대청마루쪽이 심하게 불에 타 마치 흉가를 방불케 했다.

 부엌을 들어가 보니 적벽돌로 부엌을 쌓고 찬장 등의 구조가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부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소설가 오정희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이 가옥은 뒷켠에는 목욕탕으로 쓰던 별채와 저장고시설이 잘 보존돼 있었다.

아마도 춘천에서 일본식 건물로는 가장 잘 보존이 돼 있는 이규완 가옥은 일제강점기하의 쓰라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친일파의 소유물이기는 했지만 사라져가는 춘천의 근현대건축물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조명해 볼 만한 것이다.

춘천 김봉희 가옥

춘천시 서면 서상리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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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관광사진공모전 금상 우제용씨

/ 2020년 04월 11일

 

 제2회 양구관광 전국사진공모전 금상에 우제용(춘천)씨의 ‘사명산의 빛내림(사진)’이 선정됐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춘천지부(지부장 안광수)는 10일 춘천 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응모작 278점을 심사,금상작을 비롯한 입상작 7점과 입선작 60점을 선정했다.

 

은상에는 윤범석(춘천)씨의 ‘펀치볼의 겨울’이 차지했고,

동상은 김창수(인제) 씨의 ‘해안의 아침’,

정병민(춘천)씨의 ‘중앙천문대의 별일주’에 각각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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