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은 종류가 참 많습니다. 그냥 바람꽃도 있고 바람꽃이라는 이름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들이 붙어 있는데 이런 이름들입니다. 바람꽃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회리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쌍둥이바람꽃 변산바람꽃….
이렇게 바람꽃이 많으니 그 이름만 불러줘도 시가 되고 노래가 될 것 같습니다. ‘바람꽃’의 학명은 ‘아네모네 나르시씨프리라(Anemone narcissiflira)’입니다. 식물의 학명은 라틴어로 쓰게 되어 있는데 바람꽃에는 공통적으로 ‘아네모네’가 들어갑니다. 게다가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라는 이름이 학명에 들어 있는데그 이름의 연관성을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먼저 나르시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제우스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단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는 한 가지 신탁이 따라다녔는데 자신의 얼굴을 보면 불행해진다는 이상한 신탁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고 잔잔한 호수에 엎드리게 되었어. 아, 그런데 물속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는 거야. 자신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자기의 모습인 줄도 모르고 나르시스는 그 모습에 반해서 양 떼를 지키는 것도 잊고, 먹는 것도 잊고 물속만 바라보았단다. 이 모습을 본 제우스신은 자기의 양을 제대로 치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꽃으로 만들어버렸단다. 그 꽃의 이름은 수선화라고 전해진단다. 수선화는 머리를 숙이고 피어나 마치 나르시스가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아래만 향하고 있단다. 그러나 수선화는 향기도 곱고, 꽃도 예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단다. 그러면 이제 아네모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아네모네’는 ‘바람꽃’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학명이기도 한데 바람의 신 제프로스의 시녀였지. 그런데 바람의 신 제프로스와 시녀 아네모네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어. 이것을 질투한 제프로스의 아내 플로라가 아네모네를 꽃을 바꿔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단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가 아들 에로스(큐피드)가 가지고 있던 금 화살(사랑의 화살)에 상처를 입고 아름다운 소년 아도니스를 사랑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아도니스는 사냥을 좋아했어. 사나운 짐승들을 사냥하는 일도 좋아했는데 아프로디테는 늘 이것이 걱정이었어. 그래서 늘 곁에서 아도니스를 지켜주었지만 결국 전쟁신 아레스가 멧돼지로 둔갑하여 사냥나온 아도니스의 옆구리를 찔러 죽여 버린단다. 전쟁신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의 애인이었거든. 아프로디테는 슬퍼하며 아도니스의 피에 신들이 마시는 술 넥타르를 뿌려 꽃으로 피어나게 했단다. 그 꽃 이름은 바로 ‘아네모네’란다. 아네모네는 그리스 말로 ‘바람’이라는 뜻이고, 바람이 불면 피었다가 바람이 불면 지는 짧은 생을 가진 바람꽃의 운명과도 연결이 되지. 그래서일까 바람꽃의 꽃말은 ‘사랑의 괴로움’, ‘ 비밀의 사랑’이란다. 자, 그러면 바람꽃과 관련된 신화들을 모두 합해 볼까요?
공통점은 나르시스, 아네모네와 아도니스는 모두 아름다웠지만 신의 저주를 받아 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의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여간 바람둥이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애인도 많았지요. 멧돼지로 둔갑해 아도니스를 죽인 전쟁신 아레스도 그 중 하나입니다. 결국 아도니스도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도니스의 죽음을 슬퍼한 아프로디테가 신들이 마시는 넥타르를 아도니스의 피에 부어 만들어진 꽃이 ‘아네모네’인데 공교롭게도 바람의 신 제프로스의 시녀 아네모네와 같은 이름이고, 목동 나르시스는 자아도취라는 꽃말을 가진 수선화의 기원이 되었으니 이 두 꽃의 아름다움이 합쳐진 것이 바람꽃이 아닐까요? 그러나 바람꽃의 삶은 짧기만 합니다. 길어야 피어나고 하루 이틀 자신의 빛을 발합니다. 바람꽃은 실로 나르시스가 그랬듯이 스스로의 모습에 홀딱 반할 만큼 예쁩니다. 종류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순서대로 피어나지만 공통점은 작고 연약하게 생겼으며, 이른 봄 꽃샘추위가 남아 있을 때 피어나며 활짝 핀 후에는 금방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봄바람을 불어오게 하고, 봄바람 불어오면 지는 꽃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향기도 없다고 하니 아프로디테가 애인 몰래 아도니스와 바람을 피울 때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까지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봄은 사계절 중에서 가장 짧은 계절입니다. 느낌상으로 그런지도 모르지만 봄이 왔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여름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숲에 연록의 이파리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하면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숲 낮은 곳까지 비춰주던 햇살이 기운은 더 이상 숲의 낮은 곳까지 내려오지 못하지요. 이때가 되면 눈을 녹이며 피어났던 작은 풀꽃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긴 휴식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꽃피울 봄을 위해 서둘러 자기의 모습을 감추는 것이지요.
작은 풀꽃들이 여느 꽃들보다 먼저 피었다 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연록의 숲이 되기 전에 부지런히 피어나야 하고 이파리보다도 먼저 꽃을 피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꽃은 이른 봄 얼음을 녹이며 피어나고 서둘러 우리와 작별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지혜를 봅니다.
겨울이 깊습니다. 이미 야생의 상태에서 피어난 복수초가 2008년도 들꽃의 행진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럼에도 바람꽃을 기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나지 못했던 바람꽃을 만나고 싶어서기도 하지만 역사의 겨울도 깊어간 듯한 요즘의 현실때문입니다. 복수초가 피어난 뒤에도 겨울을 한참 머물지만 바람꽃이 피어나면 제 아무리 겨울이라도 꽃샘추위 두어 번의 기승을 부리는 것으로 봄에게 바통을 물려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바람꽃이 피어야 온전히 봄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꽃샘추위쯤이야 넉넉히 보낼 수 있는 봄바람 몰고 오는 바람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