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겨울 산에 돋을새김된 ‘빛살무늬’
‘서 있는 키 큰 형제들.’ 인디언들은 나무를 이렇게 부른다. 나무의 직립성을 이보다 더 직절하게 보여 주는 말은 또 없을 것 같다. 말의 결은 또 얼마나 고운가. 이에 견주어 볼 때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는 말에서는 관념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자작나무. 이런 나무가 형제라면, 지나가는 아무라도 붙잡고 나의 형제라고 어깨를 으쓱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인간은, 나무와 아니 모든 생명체들과 형제 사이다. 모두가 태양의 자식이지 않은가. 광합성을 할 수 없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철저하게 식물에게 빚지는 방식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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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사는 것이 자작나무뿐일까만, 얼마나 지극했으면 저리도 하얀 가슴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 자작나무와 태양의 관계를 보면 그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일단 나는 그것을 ‘지독한 사랑’이라고 불러 보겠다. 자작나무가 곧은 것도 바로 그 사랑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햇빛을 지극히 좋아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극양성’ 식물이다. 추위를 견디는 힘이 강하지만 그 힘의 원천은 햇빛이다. 그래서 높은 산의 양지바른 곳을 좋아한다. 결코 이기적인 나무는 아니지만 너무도 햇빛을 좋아하는 탓에 자신의 그늘 아래서는 어린 나무를 기르지도 못한다.
자작나무는 그 이름만큼이나 귀족적이다. 하지만 오만하지 않다. 유아독존과도 거리가 멀다. 만약에 그렇다면 홀로 떨어져 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독립적으로 사는 자작나무는 곧게 자라기가 힘들다.
자작나무는 대단히 예민하다. 누군가로부터 간섭받기를 생래적으로 싫어한다. 가지치기는 극도로 싫어한다. 가로수로 기르는 자작나무의 몸통에 생긴 흉터가 크고 짙은 까닭은 가지치기 때문이다. 가지 친 부위가 썩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작나무는 빽빽하게 무리지어 살기를 좋아한다. 나무끼리 서로 부딪치며 자연스럽게 가지를 정리한다. 그것을 산림학에서는 ‘자연낙지(自然落支)’라고 하는 모양이다. 형제가 많은 아이들이 걸핏하면 다투면서도 우애가 두터운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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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뚝 솟아오르고도 내려보는 일 없다. 함께 있어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버리지 않고도 '우리'가 된다.
- 숲의 귀족이자 가인이며 나무의 여왕
‘숲의 귀족’, ‘숲의 가인(佳人)’, 혹은 ‘나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자작나무가 홀로 자존을 드높이지 않고 무리 지어 살기를 좋아하는 건 지극한 햇빛 사랑과 예민함 때문이다. 서로 경쟁하면서 하늘로 곧추서는 것이다. 사실 자작나무들끼리의 경쟁은 배려와 의지의 다른 형태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자 바람막이다. 그러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마다 독자적 자존으로 빛난다.
모습뿐만이 아니라 사는 방식도 귀족적이다. 얼마나 신사다운 태도인가. 이에 비해 인간의 삶은 참으로 가련하다. 온통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사고무친한, 그야말로 ‘의지가지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같은 종끼리 서로의 능력을 흡혈하며 사는 생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작나무를 말할 때, 영화 닥터 지바고나 시베리아 벌판을 떠올린다. 그것에 견주어 우리나라(특히 남한) 자작나무의 왜소함을 아쉬워한다. 정서적 사대주의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투적 감성임에는 분명하다. 미감의 번지수가 틀렸다는 얘기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나라인 데다 생육특성상 한랭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공 조림을 한다고 해도 높은 산기슭 말고는 마땅히 기를 곳이 드물다. 수액에 당분이 많기 때문에 낮은 지역에서는 해충에 시달려서 잘 자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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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된다. 저 시린 빛깔을 그냥 하얗다고 말해서는. 저 빛은 자작나무의 정령이다.
-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 숲은 백두산 지역 말고 없다. 남한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예외 없이 외래종이다. 대부분의 숲은 인공조림을 한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30년 안팎이다. 가꾸어 기른 기간이 짧은 탓에 어떻게 가꾸는 것이 최적인지, 예를 들어 언제 솎아베기를 해야 가장 효과적인지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라고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혹시 자생하는 자작나무가 없다는 얘기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산길을 걷다가 자주 마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스래, 물박달, 거제수, 사시나무 따위는 같은 자작나무과 인데다 나무의 피부(수피)가 하얗기 때문에 전문적인 식견이 없으면 자작나무로 오해하기가 쉽다. 특히 사스래의 수피는 많이 닮았다. 하지만 사스래는 수형이 제멋대로이고 열매가 땅을 향하는 자작나무와 달리 하늘을 향하기 때문에 확연히 구분된다.
어쨌든 지금 우리나라의 산에서 자작나무를 만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심은 것들이고, 대규모 인공 조림지에서도 자연 발아된 어린 나무는 거의 없다고 한다. 혹 인공조림을 하지 않은 자작나무과의 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은 대부분 산불이 난 이후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햇빛을 다툴 다른 종의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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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에 서서도 뒤에 선 것의 배경이 될 줄 아는, 그래서 더 충일한 존재감.
- 그 염결한 직립성과 숨 막힐 듯 토해내는 순정한 빛의 광휘여!
우리나라의 자작나무 숲은 시베리아나 북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새벽, 혹은 저녁 어스름에 상록수림을 배경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숲의 광휘. 그것은 숨 막힐 듯 침잠하는 빛의 가장 곱고 섬세한 올로 새긴, 태양을 향한 자작나무의 연서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햇살의 반사광이 아니라 자작나무 숲의 정령인지도 모른다. 야산 기슭에서 스스로를 돋을새김하는 자작나무는 또 어떤가. 대지에 새겨진 그 빛살무늬는 나에게 정서적 광합성작용을 일으킨다. 잎 하나 없는 빈 나무가 아름드리의 부피감 없이도 그리 빛날 수 있는 건 자신의 몸에 저미고 또 저며 쌓은 태양의 기운에서 비롯하는 것일 터이다.
한여름, 짙푸른 초목 사이의 하얀 모습은 또 얼마나 수줍게 고운가. 그 해맑은 웃음으로 하여 산의 무늬는 여백의 미로 충만해진다. 이른 가을, 다른 갈잎나무보다 일찍 노랗게 자신을 물들이는 모습은 아름다운 뒷모습의 한 절정이다. 고혹적이거나 관능적이지 않아서 더 그렇다.
거리에서든 숲에서든 자작나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오로지 하얀 피부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메타세쿼이아처럼 속수무책의 수직성에서 느껴지는 압도감과 달리 가녀린 듯하면서도 고결한 느낌의 직립성과, 눈부시게 하얀 살결이 본디 태양의 자손인 인간의 본성을 은근히 환기시키기 때문은 아닐는지. 러시아에서는 사우나를 할 때 자작나무 가지를 묶어 몸을 두드린다고 한다.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적 이유는 마사지 효과이겠지만.
우리 역사에 새겨진 자작나무와의 인연은 깊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의 바탕은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쌓고 맨 위에 고운 껍질을 올려 누빈 후 가장자리에 가죽으로 대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판재의 상당 부분도 자작나무로 확인됐다. 한방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을 백화피(白樺皮)라고 하여 이뇨, 해열 진통제로 써 왔다. 결혼을 일러 화촉을 밝힌다고 한 것도, 촛불이 없던 시절에 자작나무 껍질로 불을 밝힌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최근에는 가구나 마루판의 재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자작나무는 앞으로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이런 얘기들은 별 의미가 없다. 자작나무에 대해서 조금의 상식도 없던 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그 염결한 직립성과 숨 막힐 듯 토해내는 순정한 빛의 광휘 때문이다.
자존적 모둠살이의 생태도 자작나무에 대한 매력을 더한다. 또한 그것은 나를 심각히 부끄럽게 한다. 나는 과연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무런 의식 없이 의지가지가 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차라리 젊은이들의 눈먼 사랑이 부럽고 탐난다. 지금 나와 살고 있는, 나와 성(姓)이 다른 한 여인에게 연애편지라도 써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는 유치한 단어들만 골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