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로마의 여신 유노(Juno)의 달
그리스신화에서 헤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그녀는 여신들 중
유일하게 제우스신 한 남자만 사랑한 가정의 여신이기도 하다
그녀의 내적 아름다움은 유월의 신록으로 살아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기운을 길어올려 더없이 싱그러운 등푸른 유월
유월은 가을출산을 앞둔 설레는 젊은 엄마의 환한 미소다
하지(夏至)의 논에서는 벌써 이팝*의 단내가 난다
소만(小滿)즈음에 모내기를 한 후 보름정도 자란 모들은 벌써 여름옷을 갈아입었다
강냉이밥 만으로 연명하던 어린시절
내가 다섯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쉰해 생신상에 떡 하니 자리잡은
고등어 자반 한마리와 고봉으로 담은 흰 쌀밥 한 그릇
그리고
놋쇠수저 한가득 떠 올린 쌀밥에 얹은 붉은 고등어살 한점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진 당신보다 먼저
칭얼대던 늦둥이인 내게 첫술을 먹이셨다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버린 처음 본 천상의 음식
벼에 낱알이 맺히지도 않은 유월의 논에서 난
어릴적 그날 나를 바라보던 가난했던 아버지의 글썽이던 눈을 본다
*이팝/쌀밥의 함경도 사투리
멀리 모악산이 아물거리는 아뿔사(兒佛寺) 아랫마을
분주해야할 하지농사철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누이의 갈래머리처럼 단아한 고구마밭 이랑이 정겹다
장마가 시작된 후 며칠동안 내린 비로 황토고랑은 찰박거린다
두 해 전 가을
수확을 앞둔 이 고구마밭을 멧돼지들이 내려와 잔치를 벌여
일년 농사를 고스란히 저(猪)네들에게 바쳤건만
작년에도 올해도 고구마밭은 가지런하기만 하다
예전부터 음력 유월이면 시골 마을마다 술익는 냄새가 좋았다
요즘도 복분자가 까맣게 익어가면 전라도 사람들은 술을 빚는다
예전처럼 누룩을 만들어 버무르고 걸러내는 전통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황설탕에 발효시켜 소주에 재우는 복분자술 냄새도 그럴싸 하다
매실,오디,살구,버찌,앵두등을 따다가 술을 담그는 유월은
애주가들에겐 여간 설레는 달이 아니다
이것 저것 잘 익었나 맛 보다가 얼얼하게 취하기 일쑤다
더구나 장마가 시작되고 논밭에 나가는 일이 줄어들면
술의 유혹이 절정을 달린다
동네 어르신 자식일도, 한 해 농사도, 복잡한 나라일들도
술술 넘어가는 술처럼 그저 술술 잘 풀리길 바라는 마음에
마을 정자엔 막걸리 병이 걱정처럼 쌓여간다
벼농사가 없는 산골의 유월은 보리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하지만 보리도 귀한 산에선 알이 채 여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구워먹는
보리서리도 녹녹한 일이 아니였다
보리농사가 많이 되지않아 보리를 금쪽같이 여기던 어른들 때문이였다
대신 그저 흔한 옥수수를 자루채 가마솥에 삶아 간식거리를 대신하곤 했는데
옥수수알을 말려 맷돌에 갈아 한해 내내 밥을 지어먹던 내겐
풋내 풍기는 옥수수 삶는 냄새조차 싫었다
그럴때면 산에 올라 종일 산딸기를 따 먹으며 놀곤 했다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산딸기 밭은 여름내내 따 먹어도
줄어들지가 않았다 지금도 그 밭이 있긴 한 걸까
요즘도 사실 산길을 걷다 멈춰서 눈만 크게 뜨면 먹을거리들이 지천이지만
성큼 손이 가질 않는다
산딸기 밭의 기억처럼 그저 가물거릴뿐이다
입맛을 잃은걸까 자연을 등진걸까
여름 들꽃중에 이 개망초처럼 천대받는 꽃도 없을거다
왜에서 들어와 나라를 말아먹을 만큼 온 천지를 뒤덮고 활개를 치며
마당이나 뒤뜰이나 밭이나 과수원이나 할 것없이 마구 올라오는 녀석은
농군에겐 잡초중에 잡초다
하지만 자세히 볼수록 참 예쁜 꽃이다
그래! 어느 누군가 붙여준 이름처럼
개망초보단 계란프라이꽃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이름을 지였는지 몰라도 "개"자는 좀 그렇다
언젠가 "개"자가 붙은 모든 풀과 나무들이 집단행동을 해 올지도 모른다
이름이 별로라는 이유로,같은종이 많다는 이유로,
혹은 화려한 옷이 없다는 이유로 천대 받을순 없다
계란프라이꽃!
그래 넌 그렇게 열심히 살아라
일년에 한두달 네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기다리며
나도 그렇게 또 한해 열심히 살거다
뱀이 누워자는 침상이라하여 사상자(蛇床子)라 불리는 뱀도랏(뱀도라지)
한방에서는 복분자,오미자등과 함께 오자(五子)라 하여
남자의 정기를 높여주는 특효약이라 하는데
혼자사는 나로선 쓸모없는 녀석이건만 아뿔사 주변엔 유난히 많다
뱀이 어떻게 녀석으로 침상을 꾸미는지, 뱀이 자고 갔다고 해서
그걸로 남자에게 그리 좋은지 알 수 없지만
좁쌀처럼 작은 꽃들을 산형(傘形)으로 피워내는 모습은
막 유치원에 입학한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 뛰어나오는것 같이 귀엽다
이렇게 작은 꽃들에 자꾸 눈이 간다는 건 나이가 들어 간다는 거지
아이가 점점 예뻐지는것도 산길이 점점 좋아지는 것도..
꿀이 더없이 달고 많아 꿀풀이라 부르는 이 녀석
특이하게도 동지에 싹을 틔우고 가을이 오기전 여름날 허무하게 말라버리는 녀석을
사람들은 하고초(夏枯草)라 부른다
요즘은 녀석의 약효가 많이 회자되면서 재배마을이 생길 정도 라지만
내겐 사루비아나 아카시아처럼 꼬질꼬질한 손으로 꿀을 빨아먹던
어린시절이 고스란히 엉겨붙어 있는 풀이다
특히 무덤가에 많이 피곤 했는데 할아버지 무덤가에서 꿀을 빨다 잠이들어
저녁에 간신히 내려오던 날도 있었다
양지꽃은 보통 4월이면 피기 시작하는데 녀석은 늦게 물이 오른 모양이다
양지쪽에서만 노랗게 물드는 수줍은 그리움
그 수줍음으로 줄기조차 하늘로 똑바로 뻗치지 못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개울 하나 건너면 양지마을이 있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유난히 빛이 잘 들었던 마을이였다
봄이면 볕 잘드는 흙돌담아래 어르신 몇 분 나와 앉아
한가로이 한담 나누시던 개울 건너 풍경
그 어릴적 기억 한 조각 잘 말려
흑백사진 하나 양지쪽에 널어놓는다
자귀나무가 딸기 아이스크림같은 꽃망울을 내밀면 여름이 시작되였다는 징조다
밤이면 양쪽 빗살잎을 오무려 잔다고 자귀나무라 부른다
또한 자귀나무는 합혼수(合婚樹) 즉 부부나무라고도 하여 금슬을 상징하기도 한다
옛날 장가 못 간 한 노총각이 신령의 말에 따라 자귀나무를 꺾어
좋아하는 여자에게 바쳐 장가를 들어 잘 살다
훗날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아내를 등한시 하자
아내가 신령의 말에 따라 자귀나무 가지를 꺾어 침상 아래두니
남편이 크게 뉘우쳐 평생을 잘 살았다는 전설로 합혼수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후 금슬이 좋지 않은 부부들이 침상밑에 자귀나무를 잘라 몰래 넣어두곤 했다는데
이 역시 혼자사는 나로선 재미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삼복이 시작 될 무렵이면 딸기 아이스크림 같은 꽃망울이 터지고
양귀비도 울고 갈만큼이나 아름답게 감실대는 속눈썹이 터져 오르는데
그 모습을 보고 혼자 늙겠다는 총각은 있을 수 없을게다
이 땅에 모든 부부들에게 자귀나무 속살같은 포근한 노래하나 바친다
사실 이 시절 산과 들에 엉겅퀴만큼 화려한 녀석은 없다
뻐꾹채,조뱅이,지칭개,방가지똥 등 비슷한 모양을 한 친구들은 많지만
유월. 녀석의 풍채는 온 산길을 압도한다
그 눈부시게 빛나는 보라빛은 때론 나를 숙연하게 만들기도한다
약용으로 널리 쓰임은 물론이거니와 잎에 톱니가 없는 고려엉겅퀴는
봄날 가난하던 산골살이의 주식이기도 했다
고려엉겅퀴가 바로 요즘 강원도에서 별식으로 유명한 곤드레밥의 주재료인 곤드레이다
카메라를 가까이 해도 식도락에 빠져 꿈쩍도 안하는 녀석의
엉겅퀴와 잘 어울린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녀석의 이름은 노랑나비
그런데 어이없게도 녀석은 흰나비과이다
흰나비과 노랑나비에 흰노랑나비와 노란 노랑나비가 있다는 이야기다
부모는 분명 한국사람인데 여행지에서 지도를 보고 있을때면
슬쩍 내게 다가와 "May I help you?" 라고 말하는
너무 친절한 우리나라 사람 그런 어떤 분이 붙인 이름일게다
그래 색이 뭐 중요해 이름은 이름일 뿐인게야
하지만 나처럼 녀석도 사춘기 시절엔 고민 꽤나 했을걸?
그땐 피부색도 부모도 이름도 중요하거든...
유월 야산은 까치수영의 계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큰까치수영은 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가까이 보면
예식장에 배달 된 크고 근엄한 화환같다
어떤이는 녀석을 개꼬리풀이라 부르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개"자 쓰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더러
이렇게 섬섬옥수처럼 희게 부서져 만발하는 개꼬리가 어디있다고..
잠시 한 철 그리고 또 한 해 뒤에만 만날 수 있는,
"척" 하지 않고 "체"하지 않는 저절로 베어 나오는 화려함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아우라(Aura)
몸 열고 맘 비워내는 자 만의 선물일게다
이정표가 제대로 없던 그 옛날엔 오리(五里)마다 나무를 심어 거리를 표시했다는 설이 있는 오리나무
그 토종은 개망초에 밀려 설 곳을 잃은 망초처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 사방오리는 이름에서처럼 자연재해복구를 위한 사방용으로 들어왔고
바닷바람이나 공해에 대한 저항성이 크고 질소를 고정시키는 힘이 탁월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한다
하여간 난 사방오리가 만드는 열매의 질감이 좋다
사방오리의 열매가 오돌도돌 푸르면 유월신록은 제 오르가즘에 못 이겨 몸부림을 친다
마타리가 샛노란 혀끝을 내밀면 우린 이미 여름속에 젖어들은 거다
원래 키가 크고 하늘을 향해 비쩍 마른 몸을 세우는 놈인데
부모탓인지 저 잘난 탓인지 산길 두덩에 가파르게 피어 오른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어 가까이 가서 얼굴을 마주대면
된장 혹은 똥내가 난다 해서 똥꽃이라 하기도 한다는데
난 녀석의 냄새가 그다지 향기롭진 않아도 그저 은근히 좋은걸 보면
나도 참 구린게 많은 사람인가보다
단감이 실하게 익어간다
누군가 차랑이란 종이라 얘기 했지만 내겐 그저 뒷마당에 단감일 뿐이다
내가 사람이란 종인걸 단감이 알아주었다면 그 이상 고마운 일이 있을까
혹여 누구라도 그런 감에게 다가가 자기 이름까지 물어보는 이도 있을까
풀이나 꽃이나 나무들은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단지 사람이 헤치거나 옮겨 심지만 않는다면...
한 번 옮겨진 놈들은 극심한 몸살을 앓거나 죽고만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제자리가 있다
본래 태어나 자란 산과들에 그대로 살아 있을때만 야생이고
바람타고 지아비씨에 엉겨붙은 끈질긴 놈만이 자연이다
인간의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끊임없이 스스로 부유(浮流)하는 인간만이 외로움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도 정해진 제자리가 있다면
이젠 그 자리로 가고싶다
모두들 부지런히 여물어 가는 유월의 숲속에서
풀씨처럼 보잘것 없이 내 자리에서 그저
일일여여(日日如如)하게 그들속에 스미고 싶다
/글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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