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해인사
法寶宗刹 伽倻山 海印寺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길 122
2017. 1. 30 (월)
해인사는 佛寶宗刹 通度寺, 僧寶宗刹 松廣寺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로 꼽힌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절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625~702)의 법손인 순응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해인사 계곡
혜암대종사부도.부도비
현대적 조형미 담은 성철스님 부도
해인사 원경왕사비.
고려시대 고승 원경왕사를 기리고자 인종3년에 세운 비다.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왔다.
거북받침돌, 비몬,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 때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주차장에서 걸어오르는 길은 완경사 길이지만 거리가 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때문에 발걸음은 구석구석 찾아가기를 거부한다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에서 우측으로 일주문이 보인다
해인사 일주문
일주문 앞쪽에는 "가야산 해인사"란 현판이, 안에는 "홍하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해인사 일주문을 홍하문이라 부른다.
안으로 들어와서 본 일주문. "해동제일도량"이란 현판이 보인다.
맞은편에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이 보인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바라본 해인사. 여기서부터 해인사 경내가 시작된다.
맞은편에 천왕문이 보인다. 양쪽의 고목이 해인사의 내력을 말해주는 듯 하다.
해인사 천왕문(봉황문)
앞에는 "해인총림"이란 현판이 있고 안에는 "봉황문"이란 현판이 보인다.
해인사 천왕문을 봉황문이라 부른다.
봉황문 뒤에는 해탈문이 보인다.
해인사 해탈문
앞에는 "해동원종대가람"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안에는 "해탈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해탈문을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며 사찰 중심전각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 된다.
해탈문은 깨달음의 세계, 곧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이다.
不二란 우리 앞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존재들이 다름이 없으며 근원은 하나라는 의미다.
전통적인 사찰의 출입문 구조를 보면 규모가 있는 사찰에서는
맨 처음 일주문에서부터 금강문, 천왕문, 해탈문(불이문)을 거쳐 중심전각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금강문은 없는 사찰이 많으며, 해인사도 금강문은 없다.
국사단(局司壇)
가람의 수호신을 모신 집이다. 소원나무. 국사단 앞에 있다.
소원을 적어서 이 나무에 달고 국사단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단다.
해탈문을 들어서서 바라본 해인사 전경. 가운데 큰 건물은 구광루다.
구광루 좌우 축대위의 건물들은 전부 승가대학(강원)으로 쓰이고 있다.
구광루(九光樓)
사찰에 따라서 보제루, 보화루, 우화루, 만세루 등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물의 용도도 사찰에 따라 다르다.
해인사에서는 아래층은 찻집, 윗층은 전시실로 쓰이고 있다.
구광루는 들어오면서 보면 2층구조지만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단층구조로 보인다.
종각
화엄일승법계도
마당에 하얀 선이 도표처럼 그어져 있는 것이다
구광루 옆에서 내려다 본 해탈문과 사운당(종무소)
마당에 "화엄일승법계도"가 뚜렷하게 보인다.
의상대사의 법성계 210자를 54각이 있는 도안에 합쳐서 도식화한 것이다.
이 도면에 법성계 210자를 넣으면 아래와 같은 모양이 된다.
중앙에 붉은 원 안의 "法"에서부터 시작하여 왼쪽으로 돌면
마지막으로 法의 아래 있는 "佛"에 이르게 된다.
대적광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해인사 중심전각으로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다.
중앙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였다.
삼층석탑과 석등
9세기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해인사 창건 당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에 놓인 돌은 부처님을 향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頂禮石(또는 拜禮石)이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정료대(庭燎臺)"."불우리"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물이다.
사찰이나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를 할 때 관솔지나 송진을 태워 경내를 밝히 역할을 했던 것이다.
비로전. 몇년 전에는 "대비로전"이라 했는데 지금은 "대"자가 없어졌다.
명부전과 응진전
선열당은 노전스님과 부방장스님 거처다. 응진전 뒤에 있다.
퇴설당은 방장스님 처소다. 선열당 위에 있다.
대적광전 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경판전
계단 위에 경판전으로 돌어가는 문이 있다.
"팔만대장경"이란 현판이 보인다. 안에는 "보안당"이란 현판이 있다.
이곳은 관람이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
팔만대장경판전. 국보 제52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앞 건물을 수다라장, 뒷 건물을 법보전이라 부른다.
장경판전은 과거 출입이 자유로웠지만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출입이 전면 통제됐다.
이 때문에 대장경을 보관중인 내부는 물론이고 수년간 마당조차 외부에 개방되지 않았다.
장경판전 마당으로 통하는 입구인 연화문을 닫아둬
관람객들은 판전의 겉모습조차 제대로 보기 힘든 실정이다.
내부 통풍이 원활하도록 설계된 서로 다른 크기의 살창도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경판전 벽면의 아래·위, 건물 앞·뒤 살창은 제각각 다른 크기로 만들어졌다.
국보 제52호인 장경판전은 조선 전기인 1488년 현재 장소에 건립됐다.
대장경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져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보존하는 데 필요한
구조를 알맞게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판전 내부에서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보수가 진행됐지만,
여전히 기본 골격을 유지하는데다 목판 보존 기능면에서도 탁월하다고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 하는데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 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판전의 터는 토질이 좋은데다가 땅속에 소금과 숯 그리고 횟가루와 마사토를 넣으므로서
방충은 물론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 들이고,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판전의 창문을 격자창으로 하였으며
각 건물의 앞쪽 창은 아래창이 위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뒤쪽의 창은 그 반대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 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준다.
해인사를 지나 오르면 상가가 있다